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당신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조태호, 어떤책, 2020

그루 터기 2022. 2. 11. 05:00

당신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조태호, 어떤책, 2020

 

20222월 첫째 날 오늘은 설날이다. 설날의 휴무의 점심을 먹고 시작한 독서가 의자에서 한 번도 읽어나지 않고 끝이 났다. 처음 읽을 땐 앞뒤의 순서를 약간 섞어 놓은 듯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어쩜 소설의 형식을 빌린 듯한 에세이 였다. ) 이내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책을 덮는 순간 대단하다라는 생각뿐이다. 나는 요즘 자주 쓰는 용어의 결정장애가 있는 사람이다. 돌다리를 두들기다가 돌이 다 깨져서 못 건넌다는 소심파다. 그런 사람의 입장에서 본 작가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우선 질러놓고 본다는 쇼핑이 아니다. 인생의 힘든 선택에서 어쩜 그렇게 단호하게 결정할 수 있었는지 부럽다. 아름다운 글을 잘 쓰거나 문학적인 내용이 있어서가 아니라 힘든 과정을 하나하나 헤쳐 나가는 글들이 잠시도 책을 덮지 못하게 한다. 내가 만약 그런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자신있게 밀고 나갈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제 남은 인생에서도 선택의 기로에 서야할 일이 여러 번 있을 거다. 나도 나를 믿고 선택하는 멋진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작가소개

 

조태호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컴퓨터 대회에서 입상한 것을 계기로 매크로미디어 코리아(현 어도비 코리아)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며 컴퓨터 교육 TV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활동했다. 일본 도쿄의과치과대학교에서 생명정보학 전공으로 보건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미주리대학교와 미시간대학교에서 박사후과정을 지냈다. 지금은 인디애나대학교 영상의학과 연구 조교수로, 딥러닝을 이용해 치매 질환을 예측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2017년 딥러닝 입문서 모두의 딥러닝을 출간했다. 20191월부터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자신의 경험담을 연재해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을 수상했다.

 

 

독서 메모

 

 

이민 가방에, 배낭에, 기저귀 가방에 족히 리어카 한 대분은 되는 짐을 아내와 주렁주렁 나누어 들고 아이까지 들쳐 멘 채, 200310, 나의 일본 유학 첫날이 시작됐다. 어쩌면 당신의 삶에서 마주칠 이야기, 그 출발은 바로 이날이어야 할 것 같다. () 등에 멘 가방이 끊어질 듯 어깨를 짓누른다. 그래도 일본에서의 첫날, 마음 한편은 박사학위를 받고 당당하게 고국으로 돌아갈 기댈 두근거렸다.

 

지금 들은 내용이 맞는지 긴가민가하며 와카쓰키 교수를 쳐다보았다. 다시한번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듯, 교수는 내 쪽을 향해 반복했다. “위안부는 다 매춘부들이라고.”

 

일본 사람들끼리 쓰는 ‘KY’라는 말이 있다. 구키요메나이(空氣読めない)를 줄인 말이다. 직역하면 공기를 읽지 못하는 사람, 즉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연구실에서 KY가 되면 낙오다. 특별히 말로 지시하지 않기 때문에 선배들의 모든 행동에 민감해야 한다. 만일 누군가 뒤처지면 신호가 온다. 이 신호를 알아듣기 위해 늘 깨어 있어야 하는, 특유의 공기가 있다.

 

다음날, 수업을 듣고 자리로 돌아온 나는 책상을 내려다보며 한 참을 서 있었다.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제목은 친일파를 위한 변명. 뉴스엣 이 책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일본은 한국을 침략한 것이 아니라 해방시켰다거나,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모인 매춘부들이라는 일본 극우의 역사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한국 사람이 쓴 책이다. () 그 책이 내 앞에 있다. 교수가 놓고 간 거란다.

 

통장에 장학금이 들어오지 않은 건 20054월이었다. 매월 정확한 날짜에 입금되어 식비, 생활비를 해결해 주던 문부과학성 장학금이 입금되지 않았다. 교수가 보낸 그들 방식의 답장이었다. ( 일본의 회사와 16년간 거래를 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진심은 정확히 알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겪은 수십 명 수백 명의 일본 사람들은 그 교수와 달랐다. 일본사람이 을의 위치에 있었을 때나 갑의 위치에 있었을 때도 도리어 너무 친절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도와주려고 했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선 듯 다가오지 않는다. 사람마다 다르다고 표현해야 할지, 경우에 따라 다르다고 해야 할지, 아님 내가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성경에 등장하는 선악과는 선택을 의미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완전하게 만들고 파괴할 수 있는 신이 아담과 하와에게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는 선악과를 준 이유는 뭘까. 나는 딥러닝을 공부하는 과학자다. 그런데 인공지능의 한 종류인 딥러닝으로 아무리 놀라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한들 그것은 생명이 아니다. 필요에 의해 내 의도대로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로봇이 아니라 생명이기 위해서는 자유의지가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를 잊지 않게 하면 된다. 너의 생명은 스스로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는 것. 생명을 만든 신이 부여한 단 하나의 선이 선악과라면, 아담은 너무 성급히 선을 넘었다.

 

8개월 후, 매섭게 추운 겨울밤, 서울의 후미진 술집 주차장에 의료기 영업사원이 된 내가 정신을 잃은 채 꽁꽁 얼어 가고 있다. () 한 가지 묻고 싶다. 아주 쉽게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삶을 선택해야 하는 당신의 이유는 무엇인가.

 

뜻하지 않게 시작한 일본 벤치마킹 어 가이드 일은 평생 기억될 여러 만남으로 이어졌다. ()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먹고, 자고,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눴다. 숫자로 따지면 도합 1000명이 넘는 인원이었다.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싶은 낯선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어울리던 시간은 단순히 공부와 병행하는 아르바이트의 날들이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의 삶을 엿보고 그들의 비전과 고민을 듣는 기회였다. 평범한 이들의 다채로운 모습에서 사실은 나를 돌아볼 수 있었고, 나의 무제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에는 나 혼자만 살면 겪지 않을 문제들이 참 많다. 사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타인과 얽히면서 시작된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그래서 타인은 곧 지옥이라고 했다.

 

그날은 와카쓰키 교수의 학내 재판이 열리는 날입니다.” “ ?” 재판이라니? “와카쓰키 교수는 조 상이 없는 사이 새로 들어온 대학원생에게 직위를 남용한 학내 괴롭힘으로 고소를 당했어요.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조사하던 중에 한국에 있는 소장도 피해자일 가능성을 발견했고 그래서 제가 지난번 연락한 것이지요. 재판이 열리는 날 와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증언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도대체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던 그 혼란의 시간, 단 한 가지 외침만은 내 마음속에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그날은, 반드시 온다.

 

재판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내가 당시의 새로운 지도교수가 되는 것을 제안했어요. 거기 있던 모두가 이에 동의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선택하면 됩니다. 원래 세상은 그렇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원망할 건 아니다. 최선을 다했고 그게 나의 진심이라면 장차 될 수도 있는 것에 대한 소망을 품고 기다리면 된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길이 끝난 게 아니므로.

 

수년 뒤, 일본 경기가 다시 침체되어 벤치마킹 연수의 인기가 급격히 사그라들고 종국에는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도 뿔뿔이 해체됐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하라 교수님 지도하에 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 있었다. 편안함보다 변화를 향했던 나의 선택은 언제나 옳았다. 매번 그때는 모를 분이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우리 두 사람을 단단히 묶고 있었기에 두 딸과 아내, 그리고 나는 그로부터 한 달 뒤, 하네다 공항에서 기쁘게 재회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의 두 번째 일본 체류가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다.

 

지나고 나면 아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나의 초기 유학생활을 좌우했던 것은 사람이지만, 사실은 학문이어야 했다는 것. 내가 겪은 일이 고난과 상처로 남지 않을 때는, 그것이 나를 강하게 만드는 과정임을 받아들일 때라는 것.

 

그렇게 마구잡이로 이메일을 보내던 어느 날, 받은 메일함에서 처음 보는 제목의 메일을 보고 얼어붙었다. ‘당신의 이 메일이 스팸메일로 등록됐습니다.’ 누군가 내 이메일을 스팸메일로 신고했다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멀거니 한참을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태어났을 때 이미 세상은 존재했고 나의 부침과 상관없이 시간은 공평하게 흐른다. 이것을 이미 행복한 세상이라고 표현해 보니, 행복하지 않은 원인을 세상에서 찾을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다가온다. 내가 바꿀 수 없는 부분에 원인을 두어 끝없이 원망하고 불평하기보다, 세상과 나의 경계를 파악해서 나를 지키고 내 생각을 지키는 것. 세상과 분리된 내가, 긍정적이고 확신으로 가득한 작은 선택들을 계속해서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세상이 주는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기쁨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나를 찾아오는 세상의 어떠한 일들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장차 올 수도 있는 일들에 소망을 품는 것. 이러한 결단은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해 줄 수 없다.

 

우리가 종속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하나는 공간이다. 사람은 공간 속에서 시간을 통해 존재한다. 당신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이 질문이 중요한 건 시간과 공간을 묻고 있어서다. “지금 여기 있습니다.”라는 답은 그래서 존재에 대한 명료한 답변이 된다.

 

그래서, 뭘 연구했어요?” “, 나트륨-칼륨 펌프의 3차원 구조를 예측했고, 이온의 수송 경로를 파악해서…….” “아니, 그건 이미 들었고. 당신이 한 게 뭐냐고요.” “그러니까 단백질 구조 예측 툴인 모델러를 이용해서 단백질 구조를 만들고…….” “모델러가 당신 거예요? 남이 만든 걸 가져와서 돌려 보는 거 말고 당신이 한 게 뭐냐고요.”

 

기억에 남지 않는다 해도 우리 인생에는 말 할 수없이 소중한 순간들이 존재한다. 내일이면 잊어버릴 가족과의 오붓했던 저녁시간도, 아이들과 공원에서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함께 보냈던 주말 오후도, 머릿속에 세세히 남지는 않지만 그 시간들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는 작지 않다. 안타깝게도 그런 평범한 것들은, 사라지고 나서야 소중함을 알게 된다.

 

기쁜 소식을 전하려 해도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사람들에게는 전달이 불가능하다. 세상이 만든 틀에 눌려 있는 사람들, 그들은 진실을 이야기해도 듣지 않는다.

 

일등이 아니라, 유일을 추구하기 때문이죠.” 노벨상 수상자, 노요리료지 이화학연구소 소장이 명쾌하게 정리해 주었다. “연구자는 일등을 할 필요가 없어요. 일등이 누구인지, 어떻게 일등이 되었는지에 관심을 두지도 마세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자기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인지에만 관심을 쏟으면 됩니다. 내가 한 것도 오직 그것뿐이고, 노벨상과 명예는 부수적으로 따라온 것들이지요.”

 

그럼에도 결정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신혼 시절 아내가 작성한 <우리에겐 꿈과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에 쓰여진 더 큰 세상이자 가고픈 곳이 바로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선택이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미리 준비할 수 있다. 준비된 사람에게는 어떠한 발걸음도 기쁨이다.

 

우리는 없다가 있게 된 존재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부터 끝나는 시간까지가 우리의 생명이다. ‘없다있다사이, 그 사이의 것들이 아무 의미 없는 공허함일 리 없다. 없던 내가 있다는 자체로, 나보다 더 큰 세상은 이미 내게 호의적이라고 믿는다. 호의적인 세상이 지금도 당신을 기다린다. 상처와 거짓됨을 내려놓고 스스로 선택하기를. 사는 쪽으로, 포기하지 않는 쪽으로. 당신이 존재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