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깨지기 쉬운 마음을 위해서』, 오수영, 별빛들, 2020

그루 터기 2022. 2. 18. 04:55

깨지기 쉬운 마음을 위해서, 오수영, 별빛들, 2020

 

저자는 항공사 승무원이다. 전문 작가가 아닌 분이라고 글을 잘 쓰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깊이 있는 글이 마음에 쏙 든다. 사실 난 깊이 있는 글 보다는 가볍게 읽고 넘어가는 에세이들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한 권의 책이 오로지 논어나 종교서적처럼 보고 배워야하는 글로 가득하다면 몇 페이지 읽지 못하고 책을 덮거나 졸게 될게 뻔하다. 그러나 이 책은 깊거나 조금은 가볍게 읽고 넘어갈 수 있는 글들이 골고루 섞여 있어서 나의 인내의 범위 안에 들어왔다. 어떤 분들은 책을 한 두 꼭지 읽고, 또 다른 책을 꺼내본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도 한 권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숙제하듯 끝을 본다. 이 방법이 좋고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보기 때문에 책꽂이에 꽂아두고 생각날 때 꺼내 한 두 꼭지씩 익는 방법은 나에겐 어림없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가끔 정말 가끔은 눈으로는 읽고 있는데 머리로는 읽지 못한 책들이 한 번씩 생기기도 한다. 이 책도 중간에 한 두 꼭지는 그런 부분도 있었지만 가벼운 내용도 섞여있어 그런대로 잘 넘어갔다.

가끔 책 표지에 에세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산문집이라고 표현한 책들은 경계의 대상이다. 이 책처럼 말이다. 어감으로는 산문집하면 더 가벼울 것 같은데, 역시 깊이가 다르다. 오늘도 독서 메모를 열심히 하면서 내가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저자 소개

오수영

작가가 되길 바라던 시절을 살았다. 지금은 항공사에서 승무원으로 일한다. 언뜻 보면 다른 두 시절이 이제는 하나의 플롯처럼 이어지길 바라며 글을 쓴다. 저서로는 에세이 깨지기 쉬운 마음을 위해서』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순간을 잡아두는 방법등이 있다.

 

 

독서메모

 

언젠가는 사랑에 있어서 안전벨트를 매지 않는 무모함이, 자멸할 각오로 무턱대고 웅덩이로 몸을 던지는 용기가, 모순적이게도 자신을 가장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우리도 깊숙하게 깨달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삶의 한 부분을 온전히 내어줬을 때의 허전함이, 허탈함이 아닌 충만함이 되어 우리의 삶에 분명하게 녹아들기를 바라며

 

우리의 물결이 만나 서로를 일렁이는 파도가 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하나의 계절에만 거세게 출렁이다 소명되는 파도가 아닌, 사계절 내내 잔잔하게 넘실대며 이어지는 그런 파도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날은 아닐지라도 좋은 일이 있을 대 소소한 선물 하나를 건네주기 시작하면, 지금까지는 몰랐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나로서는 별다른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았음에도 상대방의 하루가 그 작은 선물로 인해 특별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포장 안에 담겨 있는 물건의 값어치와는 상관없이 선물은 누군가의 하루 자체를 선물로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적당한 온기의 바람이 불어 그녀의 갈색 머리가 기분 좋게 흩날렸고, 그는 그 흩날리는 머릿결 사이로 어쩐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그녀의 얼굴을 발견하게 됐다. 미소를 짓곤 있지만 왠지 모르게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표정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나란히 걷게 된 우리의 운명에 슬픔은 없을 것이라고, 그는 착각했다. 노을이 저물고 우리는 다시 길을 걸었다. 밤이 되니 기온이 서늘해졌고 그는 그녀의 손을 조금 더 꼭 감싸 쥐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녀의 손은 너무나 무거웠고 서서히 힘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이내 보폭이 조금씩 좁아지기 시작하더니 그녀가 점덤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 오리는 그렇게 서로를 멀리서 바라보다 천천히 뒤돌아섰다.

 

사랑은 나란히 걷는 것도, 마주 보는 것도, 그리고 같은 방향으로 걷는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사랑은 우리가 어떤 속도와 방향일지라도, 혹은 함께 있거나 그렇지 않을지라도, 다만 실타래처럼 가늘지만 분명하게 이어져 있다면, 그것으로도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우리는 각자의 믿음으로 각자의 사랑을 한다.() 끊임없이 사랑의 감정에 대해 연구하며 우리가 조금 더 온전해질 수 있는 사랑을 나누고 싶다. 언젠가 사랑의 원형에 조금이나마 가닿을 수 있는 날들이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그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가끔은 그녀가 잠든 것을 알면서도 전화기를 내려놓지 않고, 몇 편의 글을 더 읽어줄 때도 있는데, 아직 깊은 잠에 빠지지 않았을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내 목소리를 듣고 간밤에 편안하게 잠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삶의 모든 순간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은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선택이란 하나의 선택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종의 도박과도 같은 게임이기 때문에, 선택의 결과에서 비롯된 모든 책임도 자신에게로 향한다는 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수 천 개의 조각으로 깨져버린 사랑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없듯이 우리도 이제는 잠시 머물렀던 그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새로운 날들을 살아가야 한다. 언젠가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온다면 그때는 바닥에 떨어트려 깨지는 일이 없도록 조금 더 세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을 하면서, 붉게 물든 밴드를 새것으로 갈아 붙인다.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 계절은 없다. 바람은 날마다 불어오고, 사람은 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그 바람을 감당한다. () 사람의 마음은 바람의 방향이나 속도에 관여할 수 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계절에 불어오는 바람도 금세 흘러갈 흐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초연함이, 사람을 바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한다.

 

젊은이들의 가장 큰 실수는 자신은 늙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는다. 누구든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연애는 두 개의 외딴섬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 아닐까. 오직 자신만이 유일한 섬인 줄 알았던 세상에서 또 하나의 외딴섬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건너가려 하는 일이고, 서로의 섬에 심어진 감정의 나무를 한 움큼씩 뽑아 내 서로를 잇는 다리가 될 때까지 서로에게 하염없이 던져보는 고통스럽고 소모적인 일일지 모른다. () 두 개의 섬을 연결하는 다리의 유무와 관계없이, 건널 수 있어도 하나가 될 수 없기도 하고, 건너지 않아도 하나가 될 수 있는, 바로 이것만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모순적인 과제, 그것이 바로 연애와 사랑이 아닐까.

 

우리가 사랑을 만들었으니 이 사랑은 우리에게 종속되어야만 한다는 말은 계절을 가둬두려는 마음처럼 잔인하다. 흘러가는 강물과 바람은 결코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 새장이 넓어야 그 안에서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설령 언제나 문이 열려 있어도 그들은 좀처럼 밖으로 날아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자유가 방종은 아니듯 집착하지 않는 것과 경계 없이 날아가는 것 사이에는 좁지만 깊숙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간다.

 

언젠가 부터는 엄마와 함께 나서는 오늘의 산책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엄마의 보폭에 맞춰 한없이 여리고 느리게 산책을 하면서도 나는 필사적으로 이 순간을 온몸에 새겨두려 발버둥을 친다. 마주 잡은 두 손과, 같이 걷는 이 길을 사진으로 남겨두고, 엄마의 작아진 손의 온기와 감촉을 영영 간직하려 더욱 꼭 잡아본다.

 

엄마, 잠깐 단잠에 빠진다고 생각해. 그리고 개운하게 일어나는 거야. 대신에 이따가 잠에서 깨면 꼭 아들한테 메시지 남겨 줘야 해. 낳아줘서 고마워. 사랑해 엄마.

 

영원한 순간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을 어떻게든 잡아두려는 애달픈 마음이 비로소 영원을 끌고 온다, 삶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멀 리서 바라보면 결국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다. 만남과 이별 탄생과 죽음, 행복과 절망을 비롯한 수많은 감정들과 관계와 같은 실체가 분명해 보이는 존재들까지,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고, 모든 것을 담아갈 수도 없다. 하지만 마음이 향하는 방향과 어차피 잊을 것이라는 방향은 같은 길에서 자라는 갈림길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 갈림길 앞에서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고, 그 선택이 삶의 생김새를 서서히 완성 시켜나가는 게 아닐까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빠와 나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다가 아무래도 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던 한 사람의 시선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그렇게 서툰 사진 솜씨로 아빠와 나의 뒷모습을 필름에 담았다.

 

모든 가장의 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빠는 언제나 엄마를 거들기만 할 뿐 좀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카트에 담은 적이 없었다. 어쩌다가 한 번씩 아빠가 원하는 물품을 카트에 담을 때면 엄마는 그것을 곰곰이 살펴보며 그대로 둘 것인지 아니면 원위치를 시킬 것인지를 결정했다. 보통 그런 것에서 작은 다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빠는 아무 말 없이 웃으며 엄마의 결정을 따라줬다.

 

연인 사이에 나중에 반드시 무언가로 변해야 한다는 집착이 관계를 망치는 거야. 소중할수록 부담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되는 거지. 오히려 무엇이 되거나 혹은 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편안한 마음을 가질 때 더 좋은 관계로 발전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 조급하고 불안하지 않아도 곁에 남아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짜 인연인 거지.

 

이세상의 적당한 행복과 적당한 슬픔을 모두 체험할 수 있게 되기를, 그리하여 조금 더 상대방을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넓어지고 깊어지기를, 그리고 오늘의 다짐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빗소리를 들었는데 비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꿈을 꾼 것도 아니었다. 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움의 대상은 상상만으로 도 환청이 들릴 만큼 간절한 것일까. 짙은 그리움은 현실을 지우고 사람을 꿈속으로 데려간다. 창문 밖만 하염없이 바라본다.

 

말은 도자기를 제작하는 것과 같아서 점토가 돌아가고 있는 물레에 양손을 세심하게 가져다 대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시를 쓰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에 맞는 단어와 말투는 분명히 존재하고, 자신의 언짢은 기분이 상대방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도록 마음과 말을 진정시키는 훈련도 멈추지 않아야 한다.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고 훈련해야 하는 것이 바로 말을 잘하는 일, 단어를 잘 선택한는 일, 표현을 신중하게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말을 상대방에게 건네는 선물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가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고를 때처럼 세심한 마음으로, 상대방이 이 선물을 받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궁금해 하면서, 그렇게 단어를 고르고, 말투를 골라서, 정성껏 건넨 다면, 우리의 말에서 향기로운 꽃이 만개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비는 맑은 날에는 숨어 있던 불행의 민낯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일까. 불행이 아닐지라도 슬픔이나 우울 같은 가라앉은 감정들이 아시 태어나는 것처럼 고개를 내밀고 여전히 무탈한 자신의 존재를 알려온다. 맑은 날에는 몰랐거나 모른척했던 소외된 부분들이 비가 내리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모습이 되어 다가온다.

 

나라는 인간을 직립조행 이전의 시기로 되돌리려는 듯 가까운 곳의 누울 만한 자리로 끈질기게 인도한다. 누워서 하는 일 없이 나의 삶을 시간에 묶어 허공으로 증발시키는 행위, 이것은 무기력의 촉매가 되어 바닥에 눌어붙은 나를 못으로 고정시키는 것 같다. 이것은 성실함과 생산성에 대한 강박이 아닐 수가 없다.

 

살아가다 보면 지치는 날들도 많기 마련인데, 지친 와중에도 성실함을 추구하니, 그것은 나를 더 지치게 만들 뿐이고, 결국 이것은 평소처럼 성실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가학행위가 되어 나의 심신을 고문하게 되는 것이다.

 

삶의 두께만큼 두꺼워졌을 편견의 벽에 조금씩 미세한 금을 내며 언젠가 서서히 그 벽이 무너지기를 기다린다. 모든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는 체 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라거나, 관계라거나 철학이나 지론이라거나,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깊이의 입구까지라도 닿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아우리의 태도가 만들어가는 삶을 믿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을 위해 현실을 희생하지 말라니. 어쩐지 삶의 깊이와 철학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물론 풍수지리가 완전히 미신은 아니고 자연과학이라는 입장도 많지만 지금으로서는 가구 배치에 용이한 방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창가엣 최대한 먼 방향이지만 출수지리에서는 추천하지 않는 방향으로 침대의 머리를 두게 되었다. 믿음보다 현실의 최선을 택한 것이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이다. 조언은 많았겠지만 결국 마지막 선택을 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누구나 지금의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보다 현실적인 타협보다 훨씬 중요한 가치를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일지라도 자신에게만큼은 최선이었던 선택이 많았을 것이다. 그 선택을 인정하고 끝까지 책임이 동반된다면 최소한 자신에게만큼은 떳떳할 수 있지 않을까.

 

혼자 사는 삶의 장점 중 하나가 고독을 선택할 수 있을 때 언제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나만의 공간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으면 누구와도 대면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하루에도 몇 번씩 허기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오래전부터 사람의 몸은 소모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지만 마음마저도 소모품이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마음은 세월과는 상관없이 끊임없이 우러나오고, 스스로 정화되며, 멈추지 않고 재생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연약하고 유통기한도 짧은 소모품이었다는 사실을 알아간다

 

누구나 가까스로 자신만의 균형을 찾으려 발버둥을 친다. 외줄 위에서 수없이 추락한 끝에 간신히 중심을 잡게 된 광대처럼 우리는 무수히 나락으로 떨어져가며 마침내 각자의 균형을 찾게 된다. 비틀거리고 허우적거리는 삶 속에서도 균형을 찾은 사람들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누군지 모르지만 이 집단에 소속된 일원의 가족들의 죽음과 때때로 본인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 메시지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날아들었다. 장례식장의 장소와 연락처, 그리고 친절하게 계좌번호까지 찍힌 짧은 메시지에서 나는 죽음에도 돈이 관여할 수밖에 없는 잔인한 현실이 비릿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돈만큼 성의를 표할 수 있는 간편하고 편리할 뿐만 아니라 액수만큼 그 사람과의 친분의 깊이를 적나라하게 나타내는 수단도 없는 게 사실이니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이런 관행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는 때가 많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쓴 웃음을 지으면서 말이다.

 

슬픔에 대한 눈물은 어정쩡할 때 가장 제대로 흐른다고 믿는다. 그다지 슬프지 않을 때와 극한의 슬픔에 잠겼을 때는 좀처럼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 극한의 슬픔은 우리의 몸과 감정을 마비시키는 가장 강력한 마취제와도 같아서 마취가 풀릴 때까지 우리는 그 어떤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상태가 되곤 한다. 그러다 마취가 풀리면 그제야 농축됐던 눈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해 멈출 줄을 모르게 된다.

 

우리는 낯선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녹초가 되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무심함을 베풀며 위안을 삼는다.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일한다는 것은 축복일까 아니면 불행일까. 나는 그 속에서 과연 얼마나 많은 나를 지워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렇게 지워진 나는 결국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영영 지워져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것일까. 어쩐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자꾸만 흐릿해지는 기분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과 중요성을 알지만,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들을 업신여겨서는 모든 게 무너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맹목 적인 확신과 믿음이 눈앞에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을 한 치 앞에서도 볼 수 없게 만든다.

 

에세이 쓰기로 삶의 무엇에 도달할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삶에 대해 모르는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 조금씩이나마 앎으로 향하는 길이길 바란다. 살다 보면 하찮게 여기던 것이 자신의 대부분을 채워주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삶이 날마다의 투쟁이라면, 나는 이 투쟁을 온몸으로 제대로 살아내고 싶다.

 

그녀는 내가 멀리 비행을 떠날 때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당분간 사라지는 느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짧게는 두 시간에서부터 길께는 열여섯 시간까지 우리는 완벽하게 서로 단절되기 때문이다. () 우주의 모든 별들이 결국은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여들 듯 전 세계를 떠도는 방랑의 삶일지라도 결국은 나만의 소실점인 그녀 곁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우리가 비록 나 때문에 남들과는 다르게 영원히 한곳에 머물 수 없는 사람들이 될지라도, 우리는 결국 우리의 테두리 안에서만 방랑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언제나 벽을 허무는 것은 말 한마디를 먼저 건네는 용기로부터 시작됐다. 서로가 아무도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벽이 없을지라도 서로를 건너 갈 수 없다. 바로 옆 좌석에 앉아있는 나와 전혀 비슷한 구석이 없어 보이는 그 사람이 결국은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 바로 우 리가 국경 없는 시대에 진짜의 국경을 넘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고, 그렇게 지나간 일은 또 그렇게 저 멀리 뒤편에 남겨둬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묵묵히 발걸음을 내딛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면 살아간다는 건 계속해서 덜 소중한 것을 이기적으로 삼켜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공간의 흔적을 남기면 나만의 장소가 된다. 그렇다면 나는 나만의 장소가 수도 없이 많은 축복 받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공간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잠시 다녀가는, 어쩌면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잠시만 다녀가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진 않을까. 사람이 떠나간 장소에는 그리움만 남는다. 그렇다면 장소가 떠나간 사람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얼떨결에 나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동시에 어디서나 부재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내가 마침내 돌아갈 곳은 어디에 있을까.

 

날마다 다른 일상을 보낸 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같은 모습의 밤의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분명 많은 것들이 변해가고 있지만 이 풍경 앞에서는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바깥의 소란에 휩쓸렸던 날도, 내면의 고독에 잠겼던 날도, 여기서 밤의 거리를 내려다보면 잠시나마 일었던 파문이 잠잠해진다. 어디에도 없는, 어디서도 없는 이곳이 바로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는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