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공지영, 황금나침반, 2006

그루 터기 2022. 2. 19. 04:41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공지영, 황금나침반, 2006

 

오래 된 책, 정말 많은 분들이 읽어간 낡은 책이었다. 몇 분이나 이 책을 읽으셨을까? 한 동안 많은 분들게 정신없이 읽히다가 아직도 뒷방 서고에서 나처럼 늦깍이 독자와의 만남을 기다리는 책. 도서관의 보관 서고에 있는 책은 직원문의라는 형식으로 책을 빌릴 수 있다. 빌리고 싶은 책을 검색하여 검색용지를 프린트하고, 그 프린트를 보관서고(책누리실서고)에 있는 책을 빌릴 때 접수하는 플라스틱 통에 넣어두면 직원 분께서 가져오신다. 안내에는 15분 정도 소요된다고 하는데 보통 5분 정도면 어느새 찾아서 갖다 놓는다. 이 책도 그렇게 빌렸다. 장치혁 작가가 쓴 팔리는 책 망하는 책에서 감성에세이로 소개한 책. 나는 감성에세이가 좋다. 그래서 이 책을 빌렸다.(개인적으로 공지영 작가의 호불호와는 별개다.) 시가 많은 책, 서간체의 글, 나에겐 부드럽게 읽혀지지 않는 책이다. 작가가 좋아하는 시를 인용하고 작가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한다. 시적 감각이 둔한 나로서는 시를 이해하고 글을 읽으려면 몇 번이고 다시 읽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다가 결국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글들도 많다. 그러면서 한 수 배운다. 감성에세이의 진수를 배운다. J,로 시작하는 글들에 궁금증이 더해진다. 과연 누구일까? 꼭 알아야 할 대상일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긴 하다.

작년 여름에 읽은 상처없는 영혼이후 두 번째 에세이다. 항상 쉽지 않은 글이 나의 도전정신에 불을 지핀다. 한수를 배우기 위해 또박또박 읽어간다. 쉽지 않은 내용이지만. 단숨에 읽었다. 주제가 사랑, 행복, 이별, 죽음처럼 철학책 같은 거였다. 그러니 쉽지 않을 수밖에.

책은 작가의 수준이 아닌 독자의 수준에 맞게 읽혀진다. 딱 내 수준에 맞게 이해하고 내 수준으로 책을 덮는다. 좋아하는 문장을 노트하고, 다시 한 번 읽어본다. 구구절절이 옳고, 바르고, 배우고 싶고, 알아둬야만 할 내용 들이다. 그러면서도 또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 소개

공지영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8[창작과 비평]에 구치소 수감 중 집필한 단편 동트는 새벽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89년 첫 장편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1993년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통해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의 문제를 다뤄 새로운 여성문학, 여성주의의 문을 열었다.

 

1994년에 고등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잇달아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명실공히 독자에게 가장 사랑받는 대한민국의 대표 작가가 되었다. 200121세기문학상, 2002년 한국소설문학상, 2004년 오영수문학상, 2007년 한국가톨릭문학상(장편소설 부문), 2006년에는 엠네스티 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했으며, 2011년에는 단편맨발로 글목을 돌다로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2018해리 1·2서점인이 뽑은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다.

 

대표작으로 장편소설 봉순이 언니, 착한 여자1·2,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즐거운 나의 집, 도가니, 높고 푸른 사다리, 해리1·2, 먼 바다등이 있고, 소설집 인간에 대한 예의,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별들의 들판,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산문집 상처 없는 영혼,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1·2,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딸에게 주는 레시피, 시인의 밥상등이 있다.

 

 

 

독서 메모

 

 

잘못된 사랑은 사랑이 아닐까? 나이를 많이 먹은 지금 나는 고개를 저어봅니다. 잘못된 것이었다 해도 그것 역시 사랑일 수는 없을까요? 그것이 비참하고 쓸쓸하고 비참하고 쓸쓸하고 뒤돌아보고 싶지 않은 현실만 남기고 끝났다 해도, 나는 그것을 이제 사랑이었다고 이름 붙여주고 싶습니다.

 

나를 버리고, 빗물 고인 거리에 철벅거리며 엎어진 내게 일별도 남기지 않은 채 가버렸던 그는 작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망연해 있던 제 곁에서 당신은 저를 지켜주셨지요. 며칠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지요. 그가 죽는다는데 어쩌면 그가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그가 나를 모욕하고 그가 나를 버리고 가버렸던 날들만 떠오르다니, 저 자신에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리고 그의 죽음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지만 그러나 그것 역시 저의 진실이었습니다. 죽음조차도 우리를 쉬운 용서의 길로 이끌지는 않는다는 것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인간의 기억이란 이토록 끈질기며 이기적이란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나, 그 비 내리는 거리의 그와 나를 저는 아직도 가끔 회상합니다.

 

이제 내가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때의 그와 그때의 나를 이제 똑같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똑같이 말입니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 눈은 푹푹 날리고 / 나는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 나타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어디선가 당나귀가, 그것도 이 눈처럼 흰 당나귀가 응앙응앙 우는 소리를 놓치고 말까 봐 내 작은 몸짓에도 조심스럽습니다. 아름다운 나타샤와 가난한 시인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데리고 간 그 흰 당나귀도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가장 상처받는 것은 내가 무엇에 가장 집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어떤 라마승의 말을 떠올려 봅니다. () 그런 내게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라마승은 다시 말하곤 했지요. “내가 그것을 원하면 그것은 내 것이다. 내가 그것을 너에게 주었다가 마음이 변하면 그것은 내 것이다. 내가 그것을 네게서 빼앗을 수 있다면 그것은 내 것이다. 내가 잠시 전에 무엇을 가졌었다면 그것은 내 것이다. 라는 두 살배기의 집착에서 벗어나십시오.” 하고.

 

나이가 먹어 좋은 일이 많습니다. 조금 무뎌졌고,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으며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 자신에게 그렇습니다. 이젠,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말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고통이 와도 언젠가는, 설사 조금 오래 걸려도, 그것이 지나갈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틀리 수도 있다고 문득문득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학대가 일어날 수도 있고, 비겁한 위인과 순결한 배반자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한다고 꼭 그대를 내 곁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림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절망과 그의 황폐와 그의 적막과 그의 비명과 그의 무기력, 평생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습니다. () 고독과 자폐와 소통의 부재. 그것이 그의 영혼에 뿌리를 박고 그의 뇌 혈관 하나 하나를 터트리고 이리저리 비틀며 자라는 모습이 나를 엄습해 왔습니다. 말하자면 손 쓸 사이도 없이 덮쳐왔던 것입니다.

 

예술가라는 존재들은 낚싯대의 찌처럼 춤을 추는 존재들입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두운 물속에서 물고기가 1밀리미터쯤 미끼를 잡아당기면, 혼자서 그 열 배 스무 배로 춤을 추어서 겨우 물고기가 1밀리미터쯤 잡아당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는 그 우스꽝스러운, 대개는 그 빛깔이 화려한 그 찌 같은 존재들이라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알고도 피하고 모르고도 피하고 무서워서도 피하는, 생의 가지가지 모든 고통들이 실은 인생의 주요 질료하는 것을 알려주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아무리 상식적이고 아무리 튼튼한 사람도 생의 어느 봄날 한 번쯤 오뉴월의 훈풍에 아파서 울 때가 있는 것이니까요. 마치 혼자서만 세상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것같이 외로울 때도 있는 것이니까요. 그럴 때 너만 그러는 것은 아이야, 하고 다가가는 그런 존재들이 바로 예술가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건 이 자본주의와 세계화와의 효율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지만, 우리가 여전히 삶을 택하게 하고 인간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오스카 와일드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한 번쯤은 예수와 함께 엠마오로 걸어가야 하는데, 그럴 때 바로 오래도록 아픈 숙명을 유전자에 지니고 사는 예술가들이 그와 함께 그 길을 걸어준다는 것을

 

기차는 종이책과 닮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오래되고 얼마간은 비효육적이지요. 그래도 그것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저는 이제 느리고 단순한 것들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우리 사랑 이제 모두 끝났으면 / 만사를 끝내자, 아주 끝내자. / , 지금까지 그대의 애인이었으니 / 몸을 굽혀 새삼스레 친구일 수야 없지.

 

헤어진 옛 애인과 친구가 되고, 이혼한 남편과 친구가 되는 것 …… 그것이 외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아직 해 내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관계가 더 악화되어 지기 전에 그대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내 애인이나 남편으로서 그 역할에 맞지 않아서 헤어지는 것이 성숙한 이별이라고 심리학자들이 말하더군요. 처음에는 너무 무책임한 것이 아닌 가 생각했습니다만, 성숙이라는 말에는 동의했습니다.

 

되돌아보면 진정한 외로움은 언제나 최선을 다한 후에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거리를 기웃거리는 외로움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신에게 정직해지려고 애쓰다 보면 언제나 외롭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럴 때 그 외로움은 나를 따뜻하게 감싸줍니다. () 어떤 시인의 말대로 외로우니까 사람입니다. 그러서 저는 늘 사람인 모양입니다.

 

물레방아처럼 울어라 / 내 영혼의 뜰에 푸른 약초가 돋아나리니 / 누가 너를 위해 울어주기를 바란다면 / 지금 울고 있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라 / 누가 너에게 자비 베풀기를 바란다면 / 약한 자에게 자비를 보여주어라 <물레방아처럼 울어라> 루미

 

이제는 저도 압니다. 물레방아처럼 울고 나면 그 눈물 뒤에 무언가 새롭고 푸른 어떤 것이 돋아나곤 했다는 것을. 한 때는 저 자신이 얼마나 가련한 인간인지 알지 못했고 따라서 울지도 못했고 모든 것이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탓이라고 생각할 때 실은 그것이 가장 불행했던 순간이었다는 것을, 그 뒤에는 파릇한 어떤 것도 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성장에는 고통이 따른 다는 사실이, 인간이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필히 물레방아처럼 많은 눈물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게는 여전히 달갑지 않지만 이제는 볼멘소리로 그냥, ,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이란 자기 내부의 그 어떤 세계를 다른 사람을 위해 만들어가는 숭고한 계기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보다 넓은 세계로 이끄는 용기입니다.

 

둘이서 대작하는데 산꽃이 피네 / 한 잔 한 잔 또 한 잔을 마시다 보니 / 나는 취하여 잠이 오니 자네는 가게 / 내일 아침 생각나면 거문고 안고 다시 오게

이백의 <산중여유인대작>을 읽으며 밤새 그대와 술을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강원도 산골집에 흰 배꽃이 피었는데, 달은 아직 흰 빛을 다 뿌리지 못하고 그저 조그맣게 초승달로 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녀를 텔레비전에서 보게 된 것이지요. 유명인사로서가 아니었습니다. 자폐증에 걸린 아들을 위해 변호사인 남편과 떨어져 아이를 데리고 시골 분교로 이주한 한 엄마로서였습니다. 우연히 보기 시작한 프로그램에서 저는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 친구를 밟고 지나갔을 고통의 세월과 어미로서 그것과 싸우는 어떤 처연한 빛이, 이제는 나만큼 나이가 들어버린 그녀의 얼굴에 어리고 있었습니다.

 

내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J. 져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부모님의 말씀이 오랫동안 원망스러웠지만 오늘은 문득 더 약해지고 싶었습니다. 멀리 뻐꾸기가 울고 봄날의 새들이 필사적으로 짝을 부르고 하늘은 더 이상의 형용사를 쓸 수 없을 만큼 짙푸른데.……J. 오는 나는 정원에 오래도록 서 있고 싶습니다.

 

책의 위기니 문자 매체의 위기니 하지만 책이 주는 가치를 빼앗아가지는 못하리라는 낙관 때문에 저는 제 직업에 대 해 언제나 느긋합니다. 그래서 여름휴가를 갈 때는 짐의 반이 책 보따리입니다. 물가나 산속에 길게 누워 한없이 게으름을 피우며 천천히 책장을 넘기는 재미, 지인들과 떠들고 술 마시는 것도 좋지만 수영을 하고 산을 오르는 것도 좋지만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젊은 처녀를, 당신은 이해하실 수 없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저는 생각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보이는 사람조차도 저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그리움으로 병들고, 찢겨진 마음으로 죽어가는 것. 그것은 제가 좋아하는 안도현 시인의 그 유명한 시구를 빌면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냐는 것입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늙어서 죽는 것 보다 늙어서 낡아지는 것이라고.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가장 어렵고 궁극적인 것이며 최후의 시련이요. 다른 모든 일이란 실로 그 준비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일이란 한결 높고 고독한 독거입니다.

 

저는 요즘 가끔 행복이란 무엇이고 불행이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행복하겠다. 짐작하는 사람들에게서 불행의 기미를 알아차리게 되고, 불행할 거라 확신했던 사람들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평화를 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저 자신에게 그러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음식을 포크에 찔러 먹는다는 것은 가장 단순한 방법인 것 같지만 사실 굉장히 불편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꿰뚫는 것은 자연의 모든 사물들과 그렇게 어울리는 방법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찌른다는 것은 말하자면 사 물의 본형을 깨뜨리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외로움

빗방울처럼 / 나는 혼자였다 / , 나의 연인이여,빗방울처럼 / 슬퍼하지 마 / 내일 네가 여행에서 돌아온다면 / 내일 내 가슴에 있는 돌이 꽃을 피운다면 / 내일 나는 너른 위해 달을 / 오전의 별을 / 꽃 정원을 살 것이다. / 그러나 나는, 오늘, 혼자다. / , 빗방울처럼 흔들리는 나의 연인이여 <비엔나에서 온 까시다들> 압둘 와합 알바야티

 

어린 시절 왜 그렇게 어른이 되고 싶었을까요. 콩깍지 속의 콘처럼 나란히 누워 이불을 펴놓고 자던 우리 형제들이 하나씩 제 방을 찾아 떠나고 겹겹이 접어 넣은 바짓단을 더 이상 내리지 않게 됐을 대, 형제들과 함께 쓰는 기다란 서랍장에서 내가 무슨 옷을 꺼내 입든 엄마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대학에 입학한 첫 해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를 볼 수 있었을 때, 더 이상 누구도 나에게 반말을 하지 않았을 때, 아마도 나는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나는 너무 좋아서 이제 나는 자유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지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늙어서 할 수 있는 일, 죽음을 선고받으면 할 수 있는 일, 그걸 지금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끔 죽음을 생각하는 것. 가끔이 나날들의 마지막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을 오히려 풍요롭게 해주는 이 역설의 아름다움을 분명 알고 있으면서 지금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요.

 

자유는 삶의 호흡이다. 우리는 곰팡내 나는 지하실과 비좁은 감옥에 앉아서 금 가고 파괴적인 운명의 기습을 받아 신음한다. 우리는 결국 사물에 그릇된 광채와 잘못된 존엄성을 더 이상 부여하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구제받지 못한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해야 한다.

 

식물은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적당히 결핍되어 있는 환경에서라고 합니다. 너무 결핍되면 말라버리지만 적당히 결핍되면 아름다운 꽃도 피우고 열매도 잘 맺는다는 것입니다. 결핍이 하나도 없는 식물은 아파리만 무성해질 뿐 어떤 꽃도 잘 피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가 체험한 진실이라는 것이지요.

 

이제 아이들의 엄마로서 사회의 중년으로서 내 아이들 뻘 되는 젊은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괜찮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어떻게든 살아 있으면 감정은 마치 절망처럼 우리를 속이던 시간들을 다시 걷어가고, 기어이 그러고야 만다고. 그러면 다시 눈부신 햇살이 비치기도 한다고, 그 후 다시 먹구름이 끼고, 소낙비 난데없이 쏟아지고 그러고는 결국 또 해 비친다고, 그러니 부디 소중한 생을, 이 우주를 다 준대도 대신 해줄 수 없는 지금 이 시간을, 그 시간의 주인인 그대를 제발 주이지는 말아달라고,

 

비가 그치고 해가 나고 있습니다. 언젠가 저 하늘에 먹구름 다시 끼겠지요.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살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