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다정한 매일매일(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작가정신, 2020

그루 터기 2022. 2. 28. 20:47

다정한 매일매일(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작가정신, 2020

 

나의 말이 타인을 함부로 오곡하거나 재단하지 않기를. 내가 타인의 삶에 대해 말하는 무시무시함에 압도되지 않기를. 나의 글에 아름다움이 깃들기를. 나의 글이 조금 더 가볍고 자유로워지기를. 그리하여 내가 마침내 나의 좁은 세계를 벗어나서 당신에게 가 닿을 수 있기를.’

4표지에 있는 글이다. 내 마음을 꼭 그대로 나타낸 문장 같아 읽고 또 읽어 본다. 책을 펴기 전부터 가슴이 설렌다.

 

나는 책을 빌릴 때 먼저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분류번호를 확인하고, 현재 대출이 가능한가를 먼저 확인한다. 이 책은 몇 번째 확인할 때마다 대출중이어서 궁금증이 더 했다. ‘빵과 책을 굽는 마음이라는 소제목을 보고 작가가 빵을 굽는 사람인가보다 생각했고, 아마도 빵을 구우면서 일어난 일들을 산문 형식으로 쓴 책이 아닐까. 생각했다. 급기야 예약을 하게 되었고,(제가 예약을 많이 하다 보니 예약 한도 3권이 항상 꽉 차 있는 편입니다.) 한 달여의 기간을 기다린 끝에 이제야 빌려 올 수 있었다. 여러 권의 책을 빌려오다보니 나는 다른 책을 먼저 읽고 이 책은 아내가 먼저 읽게 되었다. “빵굽는 이야기가 아닌데요?” “그래요?”.

빵 굽는 이야기나 에피소드가 아니라 책을 소개하는 글이었다. 빵 이야기는 가끔 나오고, 책이야기는 매 꼭지마다 나오는 책 이야기. 아니 빵과 책을 연결한 이야기들이다. 나는 빵마다 많은 이야기가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커피의 종류를 잘 몰라 아메리카노만 좋아하듯이 빵의 종류도 잘 몰라 전통적인 빵만 먹어 왔었는데 이젠 빵 이름을 들으면 바로 검색하게 되는 버릇이 하나 생길 것 같다. 종류도 다양하고 의미도 다양한 빵들이 참 많다.

 

요즈음 내가 책을 읽고 블로그에 올리는 이 글처럼 서평이라고 하기에도, 감상문이라고 하기에도 약간은 성격이 다른 글들이다. 나도 서평을 잘 쓸 줄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내 생각을 간단하게 쓴다. 오늘 알았다. 이렇게 쓰는 것도 서평일 수 있고, 이렇게 쓰는 것도 에세이가 될 수 있구나.

그런데 나는 핵심에서 돌아가 있는 것을 느낀다. 일기처럼 서술처럼 그냥 그렇게 쓰는 것을 이 책에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한 편 한 편 쓰다보면 나도 멋진 서평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이 한 신문에 책을 소개하기 위해 쓴 칼럼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칼럼과 에세이의 중간 정도 느낌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책을 소개한다는 목적에 맞는 짧은 산문이다. 그래서 더 편하고 좋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소개한 책 여러 권을 메모하여 놓았다. 꼭 읽어야 할 책으로. 나도 작가님처럼 이런 글도 써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함께 하며...

 

 

저자 소개

백수린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거짓말 연습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폴링 인 폴』 『참담한 빛』 『여름의 빌라, 중편소설 친애하고, 친애하는, 짧은소설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번역서 문맹』 『여름비가 있다. 젊은작가상, 문지문학상, 이해조소설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독서 메모

 

이상하고 힘든 일투성이인 세상이지만 당신의 매일매일이 조금은 다정해졌으면. 그래서 당신이 다른 이의 매일매일 또한 다정해지길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는 여유를 지녔으면. 세상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것만 같더라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안녕을 빌어줄 힘만큼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을 것이므로. 그런 마음으로 당신에게 이 책을 건넨다.

 

나에게 베이킹이란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 과정이 즐거운 일이다. 내가 베이킹을 전문가에게 배워볼 생각이나 자격증 같은 걸 딸 생각을 결코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는지 그 방법을 제대로 배운 적 없이 그저 사랑과 동경만으로 시작한 일. 나의 한계를 알지 못한 채 하고 싶은 마음이 흘러넘쳐 시작했으나 남들이 능숙해지도록 혼자 여전히 서툴고 쩔쩔매는 일. 남들 앞에 선보여야 할 때면 늘 자신감이 없지만 결과물이 어떻든 그만둘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게 소설 쓰기와 베이킹은 어쩌면 똑 닮은 작업.

 

나는 삶이 고통스럽거나 누군가의 불행 앞에서 무기력한 마음이 들 때 이 소설 속 빵집 주인이 건넨 한 덩이의 빵을 떠올리곤 한다. 어떤 의미에서 내게 소설 쓰는 일은 누군가에게 건넬 투박하지만 향기로운 빵의 반죽을 빚은 후 그것이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리는 일과 닮은 것도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오늘 아들을 잃은 부부에게 빵을 건네는 이의 마음으로 허공에 작은 빵집을 짓는다. 젊은 부부에게 온기를 전하는 빵집 주인의 마음으로. 어딘가 있을 당신에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책들을 건네기 위해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일부를 가리고 산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창피해서, 상처를 줄까 봐, 원망을 들을까 봐 매끄럽고 평온해 보이는 가면 뒤에 숨기고 있던 누군가의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되더라도 지나치게 상처받거나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안에 숨어 있던 추악함 시기심과 죄의식, 두려움과 조바심 같은 감정들을 맞닥뜨려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사람의 마음이란 한지를 여러 번 접어 만든 지화처럼, 켜켜이 쌓은 페이스트리의 결처럼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빛과 어둠이 술렁이며 그려놓는 그림, 그것이 마음의 풍격이다.

 

대립적인 특징들이 함께 어울려 있을 때에만 좋은 울림을 낼 수 있는 바이올린. 슐레스케는 바이올린의 음색을 들으며 '모순'이 있는 인간의 삶과 영혼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해서 사유하고, 저마다 다른 공명을 갖는 악기들을 보면서 사람들 역시 각자의 공명을 발견해내고 자기 자신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깨닫는다.

 

때로는 반복되는 좌절과 두려움이 우리를 지치게 하지만, 우리는 결국 어둡고 추운 숲에서도 조용히 빛을 향해 위로 뻗고 아래로 가지들을 스스로 떨 굴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깊고 아름다운 울림을 만들어갈 소명을 지닌 채 태어난 가문비나무들이기 때문이다.

마음만 앞선 채 아무것도 모르고 씨를 심었던 그해, 나는 당황스러운 일들을 많이 겪었다. 옥상은 햇볕이 강해 식물들이 화상을 입기 쉽다는 사실이나. 물을 너무 많이 주면 세균에 감열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니까

 

행복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상을 괄호 안에 넣어두는 휴가가 삶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때로 진실을 괄호 안에 넣어두는 거짓말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 계절은 바뀌고, 괄호 안에 넣어두었던 것들과 대면해야 하는 시간은 우리를 어김없이 찾아오니까.

 

올해는 존재의 가치를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처럼 억지로 거창한 목표를 세우지 않으면 어떨까? 마치 내일이면 세상이 끝장날 것처럼 모든 일을 당장의 손해와 이익으로 계산하지도 말고. 싫어하는 노래를 다른 사람들이 부른다고 해서 억지로 따라 부르지 않는다면, 고통을 쉽게 외면하거나 누군가의 상처에 대해 가볍게 말하지 않는다면, 새해에 당신과 내가 들여다보았으면 하는 것은 오직 마음. () 따뜻해지는 마음, 마음, 마음들.

 

그 빵집을 발견했던 때는 그런 한낮의 산책을 하던 날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곳은 제빵사의 이름 석 자를 걸고 오로지 식빵만을 파는 작은 가게였다. 요란한 간판이나 진열장도 없이, 나중에는 소보로빵을 팔기도 했던 것 같지만, 처음엔 제빵사 한 분이 우유식빵 딱 한 종류만을 만들어 팔던 그 빵집을 나는 퍽 좋아했다. 하루치 만들어둔 빵을 다 소진하면 더 이상 만들어 팔지 않는 가게라 때로는 빈손으로 돌아와야 할 때도 있었지만, 운이 좋게 갓 구운 통 식빵 한 덩이를 사서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에는 귀한 것을 품고 걷는 사람처럼 마음이 기쁨으로 찰랑이기도 했다.

 

소설이 삶을 닮은 것이라면, 한길로 꼿꼿이 가지 못하고 휘청휘청 비틀댄다 해도 뭐 어떤가.내가 걷는 모든 걸음걸음이 결국엔 소설 쓰기의 일부가 될 텐데. 길 잃고 접어든 더러운 골목에서 맞닥뜨리는, 누군가 허물처럼 벗어놓고 간 쓰레기들과 죽은 쥐마저도 내 빵에 필요한 이스트나 밀가루가 될 텐데. 그러므로 그림자처럼, 한낮의 시간에는 더욱 짙어지는 익숙한 열등감과 수치심이 찾아오면, 이제 나는 그것들을 양지바른 곳에 펼쳐놓고 마르길 기다리며 찬찬히 들여다본다.오븐의 열기는 하오의 볕처럼 공평하니까 어쩌면 내가 소설을 쓰는 사람인 한, 나에게도 언젠가는 따뜻한 식빵 한 덩이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믿어보면서.

 

다른 소설가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소설을 쓸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구상과 퇴고의 단계이다. 가장 싫어하는 것은 아무래도 초고를 만드는 단계. 초고를 쓸 때 나는 바람의 압력을 이겨내고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사람이다.

 

소설을 쓰고 싶다.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 헤엄치는 사람처럼, 그렇게. 어딘가에 가 닿을지는 알지 못하지만, 필사적으로, 한동안은 더 그렇게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 (나도 그렇게 글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

 

소설 속의 인물들이 모두 그러하듯 사람들은 뜻하지 않은 상처를 타인에게 입히고 후회할 일을 만들지만, 또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며 하루하루 살아간다.그 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겠지만, 어둠을 밝히는 다정한 불빛들이 있는 한 길을 잃었던 어린 소녀가 무탈하게 집을 찾아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 삶인 것이다.

 

일본 사람들의 추억 속에 존재하는, 일상적이고 흔한 빵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까닭은 그런 빵을 나눠 먹고 싶은 일본인 친구가 최근 생겼기 때문이다.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의 저자인 기시 마사히코가 바로 그 친구다. 친구라고 말해봤자 사실 그는 나의 존재를 전혀 모르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말을 섞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나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을 몇 장 읽자마자 우리가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깨달았다.

 

때로는 우리를 압도하고, 송두리째 다른 사람으로 변모시키기까지 하는데도 타인에게는 결코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 감정에 대해서. 그런 감정은 밤의 들판에 버려진 아이처럼 인간을 서럽게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우리에게 한밤 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가르쳐주는 소설들이 있는 한, 우리 는 밤이 아무리 깊어도 앞으로 걸어갈 수 있다.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을 품은 이상 우리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시간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은 단지 기록하는 일뿐이라는 설터의 말을 이미 진실이라 믿고 있는 사람들일 테니까.

 

작업 전, 차를 우리는 시간은 나에겐 기도의 시간이다. 그저 하얀 사각 종이를 사랑했던, 쓰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황홀했던 청순한 마음을 다시금 불러오는 시간.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소설을 쓰기 전에 책상을 치우고, 차를 우리고, 마들렌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접시를 골라 책상 위에 올려둔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의 말이 타인을 함부로 왜곡하거나 재단하지 않기를. 내가 타인의 삶에 대해 말하는 무시무시함에 압도되지 않기를. 나의 글에 아름다움이 깃들기를. 나의 글이 조금 더 가볍고 자유로워지기를. 그리하여 내가 마침내 나의 좁은 세계를 벗어나서 당신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나는 언젠가 우리에게도 작별을 해야만 하는 날이 올 거라는 걸 안다. 우리에겐 함께할 계절이 함께해온 계절보다 틀림없이 더 적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나는 내 무릎 위로 올라오는 나의 강아지의 부드러운 등을 쓰다듬을 때마다 그 아래 있을, 여전히 경탄과 호기심으로 팔딱거리는 따뜻한 심장을 상상하면서 기도한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나의 곁에 그대로 머물러달라고. 그러면 나의 새하얗고 상냥한 빵은 알았다는 듯, 내 품 안으로 조금 더 파고든다.

 

루시의 어린 딸이 엄마에게 말한 것처럼 삶은 소설과 달리 다시 쓸 수 없고, 그래서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거나 받기도 한다. 하지만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은 그럼에도 눈먼 박쥐처럼 그렇게 계속 나아가야하는 것이 삶이라고, 다양한 색으로 물드는 해 질 녘의 하늘처럼 불완전하지만 아름다운 변신을거듭하는 것이 삶이라고 알려준다. 모든 생이 감동을 준다는 루시 바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끝끝내 그토록 서툰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서툴고 서툴렀던 당신들. 경이로운 생의 주인인 당신들의 이름을 나는 오늘 나직이 불러본다.

 

트레버가 연민 어린 시선으로 응시하는 인물들은, 물러버린 바나나를 가지고 케이크를 구워내듯이 각자의 상처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그들의 인생을 만들어나가기 때문이다. 거센 비가 퍼부으면 연약한 표면에는 상처가 파이고 때로 그것은 곪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비 온 뒤를 상상하며 그런 시간을 살아낸다. 지금은 폭우 속에 있지만 비는 반드시 멈출 것이고, 삶은 또 그렇게 이어질 것을 알고 있기에.

 

'시간이 과거를 망각의 어둠 속으로 침몰시키더라도 감각의 형태로 각인된 기억들은 살아남아, 현재의 우리가 과거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였다. 어둠에 매혹된 사람처럼, 망각된 과거를 향해 더듬더듬 나아가는 기 롤랑이 조금씩이라도 존재로서의 두께를 얻게 된다면 그것은 빈곤한 증거들이나 불확실한 타인의 말들 때문만이 아니라, 어디선가 풍겨오는 향수 냄새가 갑자기 들려오는 음 악 소리 같은 것들이 순간적으로 타올랐다 꺼져버리는 조명탄처럼 어둠 속에 파묻힌 기억들을 잠시 비추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는 걸 안다. 어떤 관계가 잘 유지된다면 그것은 각자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한 생명의 탄생에 대한 기대가, 자꾸만 고개를 들려 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던 밤. 그리고 그런 밤을 떠올릴 때면, 나는 나의 동생에게 이런 말을 귓가에 속삭여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동생아, 잊지 말렴. 아기가 있든 없든,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앞으로도 여전히, 그리고 온전히 너의 것이야.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기 위해선 무엇보다 스스로를 충만히 사랑해야만 해, 그러면 스물 두 살의 그 아이는 틀림없이 웃으면 이렇게 말하겠지. 걱정 마, 나도 이제 막, 그걸 어렴풋이 깨닫고 있는 중이니까.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열정이나 도취를 쉽게 떠올리지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청춘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게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본다. 넘치는 건 젊음뿐, 상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릴 여유는 조금도 갖지 못해 서로를 오독하는 시기를 지나야 우리는 사랑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고도. 공고한 의 성을 허물고 타인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 마침내 사랑은 그 눈부신 폐허에서 시작할 테니까.

 

이 소설이 내 마음을 유난히 건드린 것은 조심스럽게 벗겨내어 보관해둔 포장지로 종이 인형을 만들어 주는 잭의 어머니처럼, 사용했던 포장지를 소중하게 모아 떤 어떤 한 사람을 내가 알기 때문이었다. 나의 할머니는 남들의 눈에는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을 모은 후 잭의 어머니처럼 새로운 숨결을 불어 넣어 주는 마법 같은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흔히들 사랑은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표현하는 행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사랑에 가닿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알맞은 때에, 상대방이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의 표현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거라고,

 

10여 년을 함께한 애인과의 결별 후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지 모른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두려워. 그렇지만 난 원했던 삶을 살아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더 두려워.”

 

아무런 조짐이 없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날벼락처럼 선배를 읽은 이후, 한동안 나는 누군가와 헤어지거나 연락을 주고받을 때 죽지 말고 다음에 꼭 살아서 다시 만나자고 인사를 해야만 했다. 삶과 죽음이란 것이 실바람에도 허망하게 뒤집히는 얇디얇은 습자지의 앞뒤 면에 쓰인 글자라는 걸 아프게 깨닫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그 사람이 없이도 잘 살아간다면, 그건 우리가 그 사람을, 자기가 믿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까? - 애도일기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타인의 눈에 비치는 와 내가 실제라고 믿는 사이에는 꽤 큰 간극이 있는 편이다. 그건 아마도 내가 누군가와 아주 친밀해지기 전까지는 나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윤리적인 이유에서 채식주의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지녀왔으나. 육식을 끊을 엄두를 좀처럼 내지 못하는 이유는 모두 다 나의 식탐 때문이다. 기름기를 뿜으며 반들반들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차돌박이와 곱창, 탱탱한 육질의 생선회와 주홍빛 알이 꽉 찬 간장게장 같은 걸 포기하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갈 자신이 나에게는 좀처럼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너도밤나무의 경우, 그들이 생산하는 당의 양은 거의 비슷하다. 같은 숲의 너도밤나무들끼리 뿌리를 통해 영양소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나무들은 서로가 비슷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많이 가진 나무가 허약한 나무에 양분을 공급해준다. 허약한 구성원을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 결국 모두에게 이롭다는 삶의 지혜를 너도밤나무는 알고 있는 것이다. () 좋은 책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읽고 난 후에 세상을 보는 시선을 바꿔주는 책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수업은 나에게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을 이후 두 번 다시 나무를 그 전과 같은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길을 걷다가 만나는 가로수, 창밖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뒷산의 나무를 보며 그들의 삶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나무들 역시 우리처럼 아픔을 느끼고, 감정과 기억을 간직하고, 자식을 돌보며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이제는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한의사인 지인은 나의 맥박을 짚어보더니 내가 항상 지나친 긴장 속에 경계하듯 살고 있고, 그 탓에 잠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온몸에 열꽃이 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몸이 쉬라는 신호를 보내는데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도 덧붙이면서.

 

사람들은 쉽게 타인의 인생을 실패나 성공으로 요약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좋은 문학 작품은 언제나, 어떤 인생에 대해서도 실패나 성공으로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세상은 불확실한 일들로 가득하지만 단 하나 분명한 것은, 당신과 나는 반드시 실패와 실수를 거듭하고 고독과 외로움 앞에 수없이 굴복하는 삶을 살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괜찮다, 그렇더라도. 당신이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채 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기만 한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요청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뿐이다.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시는 빵은 예나 지금이나 단팥빵이니까 우리는 아마도 단팥빵을 사서 나눠 먹었을 것이다. 어느 제과점에나 있는 흔하디흔한 빵. 지극히 평범한 외양을 지녔지만 속을 가만히 열어보면 까만 앙금을 가장 깊은 곳에 비밀처럼 품고 있는 단팥빵은 그래서 나에게 유년 시절의 행복을 떠올리게 하는 빵이다.

 

사는 것이 힘들고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는 어느 날, 온기가 남은 오븐 곁에 둘러앉아 누군가와 단팥빵을 나누어 먹는 상상을 해본다. 긴 시간 정성껏 졸여 만든 달콤하고 따뜻한 앙금이 들어 있는 단팥빵을. 그것은 틀림없이 행복한 장면이겠지만 그런 순간에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고독할 것이라는 걸 나는 이제는 안다.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에게 쉽게 발설할 수 없는 상처와 자기모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욕망과 충동을 감당하며 사는 존재들이니까.

 

나이를 먹고 나니 새로 하고 싶은 일들은 줄어들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만 집중하게 된다고 친구들은 말하곤 하던데 내 마음속에는 왜 이제야 하고 싶은 일들이 싱싱한 나뭇잎처럼 매일매일 돋아나는 걸까? (작가님과 나는 왜 이제야 하고 싶은 일들이 이렇게 많을까? 요즈음 시간이 너무너무 부족하고 건강을 위해 운동할 시간은 더더욱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