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황정은 에세이)』, 황정은, 창비, 2021
작년 말에 예약을 하고 기다린 인기있는 책 중 또 한권이다. 일기라는 제목의 에세이집. 책을 받아 들고서야 읽기라는 제목이 기억이 날 정도였다. 황정은 에세이가 더 쉽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미 유명한 소설가인 작가님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역시 이력이 말해주는 글 솜씨에 흠뻑 빠져들었다. 동거인이라고 표현한 단어의 깊을 뜻을 책을 다 읽고 나서까지 알지 못했다. 법적인 문제일까? 주관적인 문제일까? 작가가 말하는 정치적인 문제일까?(동거인이 정치적이라는 표현이 아니고 세월호가 정치적인 표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썼다.) 어쨌든 책을 읽는 내내 편하진 않았다. 요즈음 진보성향의 작가의 책을 정말 많이 읽는 것 같다. 대략 80% 정도? 꼭 진보 성향의 글을 찾아서 읽어서라기 보다, 관심사항이나 소개한 책들을 찾아 읽다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내일 모래면 70인 내가 진보라니... 진보라기 보다 그냥 젊은 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표현하고 싶다. 동거인이라고 표현해야만 하던지 아니면 동거인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건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듯이 말이다.
책을 덮으며, 작가님의 아픔에 화가 나기도 하고, 내가 남자라는 이유로 미안하기도 하다. 책에서처럼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작가님의 좋은 글과 자주 만나고 싶다. 그리고 인사를 드리고 싶다. 건강하시기를.
저자 소개
황정은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올해의 문제소설’에 선정되고, 한국일보 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문단의 큰 주목을 받아온 작가다.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마더」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 『아무도 아닌』,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 『야만적인 앨리스씨』, 『계속해보겠습니다』, 연작 소설 『디디의 우산』 등을 썼다. 만해문학상, 신동엽문학상, 대산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젊은작가상 대상 등을 수상했다. 『양의 미래』로 제59회 현대문학사을 수상했으나 현대문학 사태로 상을 반납한 바 있다.
독서 메모
건강하시기를.
오랫동안 이 말을 마지막 인사로 써왔다. 불완전하고 모호하고 순진한 데다 공평하지 않은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늘 마음을 담아 썼다. 당신이 내내 건강하기를 바랐다. 지금도 당신의 건강, 그걸 바라고 있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우리가 각자 건강해서, 또 봅시다. 언제고 어디에서든 다시.
요즘은 거의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 일기를 쓰면서, 문장을 쓰는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 소설 문장을 쓰느라고 긴장한 뇌를 이리저리 풀어준다는 느낌으로, 아무렇게나 쓴다. 하지만 어느 날엔 문득 용기가 사라지고 그런 날엔 소설도 일기도 쓸 수 없다. 그럴 땐 음악의 도움을 받는다. 다른 사람이 애써 만들어낸 것으로 내 삶을 구한다.
미래를 생각하고 사람을 생각하는 일에 지쳐 다 그만두고 싶을 무렵인 다섯 시 이십분, 지평행 첫차가 지나간다. 다섯 시 이십팔 분엔 서울역행 두 번째 열차가 지나간다. 그 열차를 타고 새벽부터 어딘가를 가려는 사람들을 태우려고 기관사며 역무원이, 내가 얼굴을 모르는 누군가가 더 이른 새벽에 일을 시작했을 것이다.(…)사람이 애쓴다. 저 바깥에 애쓰는 사람이 있다. (…) 각자의 자리에서 그런 일을 해온 사람들.
사람들이 전염을 두려워하는 마음에는 내가 병에 걸리는 경우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겠지만 내가 매개가 되어 남을 병에 걸리게 할 수 있다는 걱정도 있다고 믿는다. 이 걱정의 바탕은 자기가 남에게 병을 옮긴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일 수도 있고 우애일 수도 있다. 나는 후자를 조금 더 믿고 있다. 남이 고통을 겪을 까 염려하는 마음. 그게 이미 있다고 믿는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각자의 외부에서 발생한 거대한 고통과 이미 접촉한 적이 있다. 서로 가 서로의 삶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고통스럽고도 경이로운 공동의 경험을 통해 이미 배운 적이 있다.
1986년에 관심사는 앤이었지만 2020년 관심사는 그래서 마릴라와 매튜였다. 그들은 이네 내게 어떤 사람들일까. 커스버트 남매를 향한 내 사랑엔 별다른 변화가 없다. 마릴라와 매튜는 앤의 수다에 당혹스러워하며넛도 그의 말을 다 듣는다. 여전히 그들은 앤의 이야기에 매료될 수 있는 어른들이고 그건 그들의 특별한 능력이자 매력이기도 하며, 앤의 삶을 생각할 때 그들은 한 생태계를 생각하는 것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1986년에도 2020년에도 그들은 앤의 어른들이고 나는 그들이 좋다.
잘못을 저지르면 매우 엄하게 혼났기 때문에 어릴 적 나는 내 부모를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잘못’의 영역에 제한이나 기준이 딱히 없었으며 체벌의 강도나 형태가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는 점은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다.(…)그렇게 열렬히 부모를 바라보느라고 나는 어린 동생들을 살피지 못했다. 시간을 돌려 바꿔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면 일단 그 시기로 돌아가 동생들을 돌보고 싶다.
어른들은 자식을 왜 벗겨서 내쫓곤 했을까. 멀리 가지 말라고, 라는 것이 동거인의 의견이었고 나느 그게 전권의 확인이라고 생각했다. 멀리 가지도 못하도록 멋긴 몸을 바깥에 전시하는 체벌 행위는 그 몸이 자기 것이라는 주장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부모의 매질엔 늘 그런 근거가 있다. 자식(의 몸)에 대한 권리, 지금까지 겪은 한국 사회는 이 권리를 관습적으로도 제도 적으로도 인정하고 있다. 민법에서 자녀징계권을 삭제하는 개정안이 2021년 1월에야 국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허겁지겁 통과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오래전에 내가 경험한 사업장에서는 여성 직원이 넷 일했는데 그중 세 사람이 가족 특히 부모의 폭력을 피해 거주지를 숨기느라고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로 사는 성인 여성이었다. (…) 그들은 거기가 수차례 거절을 경험한 끝에 간신히 구한 직장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나를 채용해주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구직에이용할 수 있도록 주민등록을 살리면 주소가 노출되어 ‘그’가 찾아올 것이다.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으니 주어진 것을 감지덕지, 라며 받아들인다. 감지덕지. 사장과 그가 고용한 여성들이 그 말을 공유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고 나는 그때부터 그 말을 세상 더러운 말로 여기고 있다.
내게는 공포와 혐오가 가장 유용하고 쉬웠을 것이다. 파도라는 낯선 것이 내게 다가올까봐 무섭고 그것이 내게 달라붙을까봐 싫고. 공포와 혐오는 애쓰는 상태가 아니다. 그중에 혐오는 특히 그래서, 그건 지금 내게도 쉽다. 그런 감정이 내게 문득 쉬울 때, 뭔가가 누군가가 즉시 싫고 밉고 무서울 때 나는 그서이 어느 정도로 상상된 것인지, 혐오는 아닌지를 생각한다.
사람들은 온갖 것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억은 망각과 연결되어 있지만 누군가가 잊은 기억은 차마 그것을 잊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화석이다. 뼈들은 역사라는 지층에 사로잡혀 드러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퇴적되는 것들의 무게에 눌려 삭아버릴 테지만 기억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기억은 그 자리에 돌아온다. 기록으로 질문으로.
나는 책을 빌려주지 않는다. 자주 만나는 사람들 중엔 책을 ㅇ릭는 이가 많지 않아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어떤 책을 빌려달라고 말하면 아예 주거나 새로 사서 건넨다. 이유가 있다. 내 집에 들렀다가 책을 빌려간 사람이 책을 접고 구겨 내게 돌려준 적이 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책 가운데를 꾹꾹 눌러가면 읽었는지 표지부터 절반 넘는 분량의 책장이 돌이킬 수 없도록 왼쪽으로 접힌 채 돌아왔다. 그 책은 페이스트리처럼 부풀어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런 일을 나는 참을 수 없다.
연필을 쥐고 돌아다니던 조카가 해둔 낙서를 조카가 다녀간 지 한 달 만에 발견했다. 작년 이맘때 일이다. 소나무 책꽂이에 민요상이라는 이름을 적어두었다. 민요상. 민요상이 누구지? 갓 네 살 된 조카가 완성된 형태로 글자를 쓸 수 있으며 그것이 자기 것도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이름이라는 게 놀랍고 신기했다. 민요상, 그가 누구냐며 어른들끼리 궁금해 했다. 지울 수 없어 그 이름을 그대로 두고 먼지만 닦으며 지내다보니 흑연이 목재에 배어들어 글자가 번졌다.
전자책의 지면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기본 크기 글자로 보는 책과 내가 크기를 조절한 글자로 보는 책은 페이지 수가 다르다. 스마트폰에서 보는 13면은 태블릿 컴퓨터에서 보는 13면의 내용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유동성은 내가 독서에서 경험하고 싶은 바가 아니었다. 이미 넘긴 책장과 남은 책장의 분량을 손으로 가늠하는 것도 독서의 과정인데 전자책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내게는 아무래도 매력적인 매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종이책은 각각 다른 두께와 촉감으로 손에 잡히는데 전자책은 단일한 단말기나 전자기기의 ‘그립감’으로만 남아 내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읽고 있는지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글 쓰는 사람에게 필요한 자세란, 하는 질문을 이따금 받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열렬하게 대답하다. 정좌. 그것이 가장 오래 읽고 쓸 수 있는 자세이니까. 글을 읽고 쓰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일단 원고료와 인세 수입이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정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근력, 근력입니다.
매일 걷는 길에 매력을 느끼지 못해 이렇게 남의 산보에 욕심을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요즘 산보하는 도시엔 과거를 알 수 있는 흔적이랄 게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굴착기로 껍질을 벗기고 평평하게 다진 땅에 솟은 신도시, 현재만 있다. 나는 어딘가에 당도하면 전에 거기 머물던 사람들과 그들이 겪은 일이 늘 궁금한데 남은 게 거의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정치적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데 나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굳이‘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하면 그저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건 너무 정치적, 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대개 이런 고백으로 듣는다. 나는 그 일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습니까.
천지영이 창을 열었을 때 풍령에 달린 실이 끊어졌다. 라는 문장을 쓰고 좋아서 며칠 온화한 기분으로 살았다.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을 잘 마무리해 마감하고 싶다.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쓰는 단편이 될 것이다. 1년 전에 쓰겠다고 약속을 해두고 쓸 수 있을까, 망설이며 시간을 보내다가 쓸 수 없다고 말할 타이밍을 놓쳐 쓰고 있다. 웃는 얼굴로 이 소설을 마무리하고 싶고 그런 장면으로 소설을 마무리할 생각에 행복하다.
집으로 돌아와 산책로에서 겪을 일을 말하자 동거인은 가물치가 이미 죽은 상태였을 거라고 말했다. 아이들 손으로 가물치를 그렇게 쉽게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며, 민물고기 포식자. 하고 동거인은 말한다. (…) 그러면 소년들이 가물치를 해코지 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해코지를 한다고 내가 판단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런 경우는 생각하지도 않고 새새끼 개새끼를 찾으며 집까지 걸어왔는데. 조금만 경계심이 풀려도 누군가를 즉시 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다. 마음이 복잡해 한참 앉아 있었다.
먹어본 버섯 중에서 가장 맛있는 버섯은 포르토벨로 버섯이었다. 서너해 전에 영국 셰필드를 방문했을 때 처음 먹어보았다. 당시 머물던 숙소의 아침 식사 메뉴에 버섯이 있어 버섯을 선택하자 주문을 받으러 온 여성이 버섯을 몇 개 먹겠느냐고 물었다 그런 걸 왜 물을까, 조금 어리둥절한 채로 두 개를 먹겠다고 대답했다. 잠시 뒤 앞치마를 두른 열성이 버터에 납작하게 지진 버섯 두 개를 접시에 담아 가져왔다. 무척 커서, 두 개만으로도 접시를 꽉 채웠다. 그걸 먹은 뒤로는 메뉴에 포르토벨로 버섯이 있으면 그걸 먹었다.
"십년이 넘도록 이 업계에서 살아남은 비결"이 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무례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감, 이라고 대답했다. 가장 최근엔 비슷한 질문에 비위라고 대답했다. 계속 쓰고자하는 나를 견디기가 어려워 그렇게 대답했다. 지금은 용기, 라고 대답할 것 같다. 미래엔 늘 그렇게 대답할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실은 과거의 그것도 다 용기였다는 걸 알겠다.
그래도 나는 자주 바란다고 말하고 믿는다고 말한다. 예컨대 당신의 건강을 바라고 사람의 선의를 믿고 굳이 희망하는 마음을 나는 믿는다. 믿어 의심치 않겠다는 믿음 말고, 희구하며 그쪽으로 움직이려는 믿음이 아직 내게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내게 있으니, 사는 동안엔 내가 그것을 잃지 않기를.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언가에 과정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도 늘어간다. 용서하지 못한 사람과 차마 용서를 청하지 못할 사람이 늘어가는 일이기도 한데 그건 내가 살아 있어서, 그리고 나는 그게 괜찮다.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 뒤에 그 일을 말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문득 말하기 시작했고 말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그 일을 말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일을 얼마나 말하고 싶어 했는가도.
문학을 주어로 두지 않고 목적으로 두고 살아온 지난 시간 동안 문학을 나는 늘 좋아했고 그것이 내겐 늘 최선이었습니다.
'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 > 독서 메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와 바람의 기억(雨風)』, 최인호, 마인드 규브, 2018 (0) | 2022.03.01 |
---|---|
『야생초 마음』, 고진하, 디플롯, 2021 (0) | 2022.03.01 |
『이별의 방식』, 전미란, 수필과 비평사, 2020 (0) | 2022.02.28 |
『다정한 매일매일(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작가정신, 2020 (0) | 2022.02.28 |
『땅콩일기』, 쩡찌, 아침달, 2021 (0) | 2022.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