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초 마음』, 고진하, 디플롯, 2021
시골출신이지만 야생초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다. 등산을 다니고 사진을 찍으면서 야생화 사진도 많이 찍다보니 이름은 어느 정도 알고 있는데도 처음 보는 야생초도 있었다. 더군다나 소개한 야생초 중에 쇠비름, 왕고들빼기, 씀바귀 정도를 빼고 나면 직접 먹어본 것이 없거나 먹은 기억에 없다. 질경이 같은 경우 독성이 있다고 들었는데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아직도 귀촌을 꿈꾸고 있는 나에게는 정말 유용한 책이다. 이정도의 지식만 알고 있어도 반찬 걱정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아니 암기는 하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먹을 것이 많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중요하다. 또 필요하면 이 책을 한 권 구매하고, 작가가 쓴 또 다른 책인 『잡초 레시피』,『잡초 치유 밥상』같은 책도 유용하리라.
저자 소개
고진하
강원도 원주 명봉산 기슭에 귀농 귀촌한 그는 불편도 불행도 즐기자는 뜻으로 ‘불편당(不便堂)’이라는 당호를 붙인 낡은 한옥에서 살고 있다. ‘흔한 것이 귀하다’는 삶의 화두를 말로만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야생초의 소중함에 눈떠 새로운 요리 실험을 즐기는 아내와 함께 잡초를 뜯어 먹고 살아간다. 야생에서 먹을 수 있는 풀을 찾아내는 기쁨을 누리며, 거친 야생의 풀들과의 깊은 사귐을 통해 겸허와 공생의 지혜를 배운다. 낮에는 낡은 한옥을 수리하고 텃밭을 가꾸며, 밤에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주경야독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하여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거룩한 낭비》 《명랑의 둘레》 《야생의 위로》 등의 시집과 《시 읽어주는 예수》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 《잡초 치유 밥상》 등의 산문집을 냈다. 숭실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영랑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박인환상 등을 수상했다
독서 메모
무량한 우주의 에너지를 받아, 개망초는 개망초대로, 별꽃은 별꽃대로, 엉겅퀴는 엉겅퀴대로, 지구의 다른 생명체들을 위해 자기 존재를 아낌없이 선물로 내어주는 그 성스럽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사뭇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면서 나는 이 책을 써 내려갔다.
시골 농부들은 쇠비름을 아주 싫어한다. 뿌리까지 뽑아 밭둑에 내던져도 비만 조금 내리면 다시 살아나 뿌리를 내리니까. 쨍쨍한 폭염에도 타 죽지 않고, 제초제를 뿌려대도 잘 죽지 않는다. 바랭이, 달개비와 함께 농부들이 매우 싫어하는 풀인 이 쇠비름은 유난히 여름철의 뜨거운 햇볕을 좋아하는 식물. 햇볕이 강할수록 오히려 더 생기가 나며, 잎과 줄기에 수분을 많이 저장하고 있어서 아무리 가물어도 말라죽지 않는다.
지상에서 자라는 식물 가운데 오메가-3가 가장 많은 식물이 바로 쇠비름이다. (…) 친구의 얘기를 듣고 나서 자료를 찾아보니, 쇠비름에는 사람의 몸에 유익한 기름 성분이 많이 들어 있었다. 쇠비름의 잎이나 줄기가 매끄럽고 윤이 반짝반짝 나는 것은 그 속에 들어 있는 기름성분 때문인데, 이 성분이 곧 오메가 -3다. 이 지방산은 혈액 순환을 돕고, 콜레스테롤이나 중성 지방질 같은 몸 안에 있는 노폐물을 몸 밖으로 내보내며, 혈압을 낮추어 주는 작용을 한다.
질경이 씨는 기능을 활발하게 하는 작용이 있어 얼굴이 누렇게 변하는 황달에도 효과가 있으며, 최근에는 질경이가 암세포의 진행을 80%까지 억제한다는 연구보고서도 나와 있다.
식물도 여행을 한다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식물을 움직일 줄 모르는 '지구의 붙박이 가구 정도로 여기는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이다. 물론 식물이 개체로 있는 동안에는 서식하는 공간을 떠 나 이동할 수 없는 것이 맞다. 그러나 식물도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는 가장 먼 땅, 가장 접근하기 어려 운 지역, 극도로 열악한 지역까지 이동할 수 있다.
개망초 꽃 만발한 농로를 산책하다가 꿀 채집을 나온 벌들의 붕붕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홀로 걸어도 적적하지 않아서 좋다. 개망초의 꽃말이 ‘화해’라는데, 이 꽃말처럼 논밭가에 핀 수수한 개망초 꽃들을 보면 흰 수건을 쓰고 밭둑을 거닐던 어머니를 만난 듯 기쁨과 위안을 얻곤 한다. 바람이라도 불면 흔들리는 흰 꽃들은 들판을 온통 환하게 밝히는데, 내 마음도 덩달아 환해진다.
꽃다지, 이름이 얼마나 예쁜지! 우리 들꽃들의 이름들은 참 예쁘다. 꽃마리, 괭이눈, 별꽃, 노루귀, 바람꽃. 패랭이 등등. 꽃다지 역시 아주 고운 이름이다. 원래 꽃다지의 잡미사인 다지는 맨 처음 열린 열매를 가리키는 말인데, 꽃다지라는 이름 속에는 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운다는 뜻도 들어있는 것일까.
식탁에 차려놓은 요리를 보니 ‘꽃다지비빔국수’. 요리 실험을 즐기는 셰프 덕분에 오늘도 새로운 요리를 맛보았다. 양념에 고추장과 땅콩을 집어넣어 매콤하면서도 고소한 맛을 즐길 수 있었다. 봄 요리를 먹고 난 후 문득 든 생각. 봄에 나는 것들을 먹으면 비로소 몸에 봄이 온다. 겨우내 애타게 기다린 봄, 오늘 내 몸에 깃든 연두가 입을 열어 ‘당신 몸에도 봄이 왔다’고 일러준다.
오죽하면 꼬딱지나물이라는 폄하딘 이름으로 불리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여도 그것이 지구별에 사는 존재들에게 필요하니 조물주께서 창조하지 않으셨겠는가. 나는 들길을 걷다가 밭두렁에 핀 그 앙증맞은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고마워!" 하고 감사의 인사를 건네곤 한다. 이처럼 작고 귀여운 녀석들과 눈을 맞추면 그 생명의 광휘가 내 안에도 빛나고 있음을 깨닫게 되더라!
새벽에 소나기가 내린 뒤 한낮이 되자 볕이 쨍쨍 났다. 나는 점심때 요리해 먹을 풀을 뜯으러 뒤란으로 돌아갔다. 뒤란이 넓지는 않지만 우리 식구들이 먹을 풀들은 넉넉한 편. 오죽하면 아내가 뒤란을 장터라 불렀을 까, 돈 한 푼 안들이고 먹거리를 구할 수 있는 장터. 풀들이 널려 있는 뒤란의 텃밭에서 민들레와 질경이, 개 망초, 왕고들빼기 같은 풀들을 뜯어 잡초비빔밥을 해 먹을 요량이었다.
엄니는 몇 년 전 9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렇게 무병장수하실 수 있던 건 평생 쓴맛 나는 음식을 즐기신 까닭이 아닐까. 요즈음은 사람들이 너무 단맛 나는 음식만 좋아한다. 쓰고 떫은 것은 거의 먹지 않고 달콤한 것만 즐겨 먹는 다. 마약만 중독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단맛도 중독성이 있다. 달콤한 것을 많이 먹을수록 맛에 대한 감수성이 무디어져서 달콤한 것을 더 찾게 된다. 단맛 나는 음식만 먹으면 다른 맛을 느끼는 감각도 퇴화한 다. 즉 쓴맛이나 신맛, 짠맛, 떫은맛을 느끼는 기능은 퇴화하고 오직 단맛만 잘 느끼도록 미각이 발달한다는 것. 요즘 사람들이 단맛에 열광하는 건 TV의 숱한 요리 프로그램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도 단맛 나는 음식보다 쓴맛을 좋아한다. 그럼 나도 99세까지 장수 할 수 있는 건가? 바보 같은 생각을 해 본다.)
씀바귀는 생명력과 면역력이 매우 강력한 식물이다. 겨울철에도 죽지 않고 푸른 잎이 살아 있다. 아무 곳에 서나 잘 자라고 벌레도 먹지 않으며 강한 생명력으로 오래 산다이처럼 수명이 긴 식물을 먹으면 사람도 장수한다. 추운 겨울에도 들길을 걷다 보면 씀바귀는 푸른 잎을 뽐내며 혹한의 추위를 잘 견디고 있다. 이렇게 씀바귀처럼 섭씨 영하 20도 이하의 매서운 추위에도 얼어 죽지 않은 식물은 민들레, 보리, 밀, 인동 등이 있는데 모두 성질이 따뜻하다. 우리 몸의 이로운 약초를 알아내는 원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몸이 차가워져서 생긴 병을고치려면 성질이 따뜻한 약초를 먹으면 된다.
오랜 세월 농약과 비료로 산성화된 박토를 옥토로 만들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애를 썼던가. 들판의 풀들을 베어다 넣고, 먹고 남은 음식물을 모아 넣고, 아침마다 요강의 오줌을 단지에 모아 썩혀서 넣기를 15년, 마침내 지렁이들이 우글우글 붐비는 옥토가 된 것. 나는 풀을 뽑아낸 후 흙 한 줌을 손으로 움켜잡았다가 손가락을 벌려본다. 흙이 가루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산의 부엽토가 그렇듯 영양분이 많은 밭의 흙은 부드럽다. 건강한 흙에서는 매혹적이고 싱그러운 향기도 난다. 이처럼 흙에서 생명이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은 다 지렁이 덕분이다.
이런 고대인들의 삶의 지혜를 오늘날 자기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일본 자연농법의 대가인 후쿠오카 마사노부는 다르다. 그는 고대인들의 지혜가 깃든 삶을 알뜰살뜰 보듬고 사는 진정한 농부처럼 보인다. “농사는 자연이 짓고 농부는 그 시중을 든다.” 후쿠오카의 멋진 농사 철학이 담겨 있는 말이다. 어설픈 농사꾼이지만 나도 자연이 짓는 농사에 시중드는 농부로 남은 생을 살고 싶다. 그것이 참 존재인 흙을 닮아 참 사람이 되는 길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이처럼 토종민들레가 점차 사라지고 서양민들레의 세력이 넓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두 종이 서로 다퉈서 그런 것 일까. 아니다. 식물은 다투지 않는다. 그런 현상의 중심에는 인간의 욕심과 그로 인한 환경 파괴가 있다. 인간이 도시를 만들기 위해 산을 깎고 땅을 메워 공터를 만드는데, 그 공터가 자연스레 번식력이 좋은 서양민들레의 차지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마을에도 근년에 건축업자들이 수십억 년 된 야산을 허물어 집터를 만들어놓았는데, 아직 집이 들어서지 않은 공터에 가보면 어김없이 서양민들레가 돋아나 서식지를 넓히며 황금빛 얼굴을 선보인다. 외래종인 서양민들레 가 그렇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미워해야 할까. 아니다. 오히려 파괴된 지구를 푸른빛으로, 찬란한 황금빛으로 덮어주니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닌가.
"농부들이 그러잖아요. 나락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농부들의 이런 얘기를 하는 까닭은, 논밭에서 자라는 곡식은 주인의 부지런함과 정성에 따라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 중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 농부들은 자신들의 발걸음이 최고의 거름이라는 자부심으로 부지런히 논밭을 드나들면 나락을 돌본다. “그래요 논밭의 나락만이 아니라 저 돌콩도 우리 발소리를 분명히 들었을 거요.”
식물이 축각을 가지고 있다고? 그렇다. 스테파노는 식물도 인간처럼 오감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촉각 역시 대부분의 식물들이 보유하고 있는 감각이라고, 특히 돌콩 같은 덩굴성 식물은 자발적으로 외부의 물체를 더듬어 그로부터 정보를 입수해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 이 여리디여린 식물은 자기 몸이 무언가에 닿는 순간 민감한 덩굴손을 많이 만들어 몇 초 만에 자신과 접촉한 물체를 휘감고 올라간다.
우리 인간이 식물의 자손이라 생각하면, 자연과의 가족적인 유대감이 생겨나지 않겠는가. 그러면 식물을 이용 가치가 있는 자원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우리의 연장자나 한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관계의 초점이 바뀌는 것이다. 진정 힘을 가진 쪽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식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더욱이 흰 눈밭에 푸른빛의 위엄을 간직한 채 생생히 살아 있는 곰보배추 같은 풀들을 보면, 그들이 내 조상이기나 한 듯 엎드려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곤 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수영을 약초로 이용해왔다. 『약용식물사전』을 보면 “신선한 뿌리와 줄기는 짓찧어 즙을 내어 옴이 올라왔을 때 바르면 효과가 있고, 꽃을 따서 말린 뒤 달여 마시면 위장이 튼튼해지고 열을 내리며, 생즙을 내어 바르면 상처 난 곳의 피를 멎게 하는 데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고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이 풍이 위궤야, 위하수, 소화불량 등을 치료하고 위장을 강화하는 놀라운 약효가 있다는 것이 한 민간 의학자에의해 밝혀진 바 있다.
이 노래 말처럼 별꽃이야말로 땅 위의 별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풀꽃이다. 흔하디흔해서 더욱 귀한 풀꽃이다. 사람이든 잡초든 진정으로 위대한 별은 홀로 우뚝 솟아 있지 않다. 멀리 있지도 않다. 우리와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
먼저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시금치 밭을 보여주고, 다음 화면에 포항 바닷가 노지에서 자라는 시금치 밭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다른 환경에서 각각 자란 시금치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두 명의 전문 세프에게 어떤 것이 비닐하우스 시금치고 어떤 것이 노지 시금치인지 알아 맞혀보라고 했다. 두 셰프는 시금치를 손에 들고 냄새부터 맡더니 정확하게 비닐하우스 시금치와 노지 시금치를 구분해 냈다.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시금치는 향이 약하고 노지시금치는 향이 강하다고.
토종 씨앗으로 키운 작물들은 맛, 색깔, 향이 진하다. 향이 진한 실물일수록 요리를 해도 재료 본연의 맛을 더 잘 살릴 수 있다. 모름지기 건강한 음식은 좋은 재료에서 나온다. 오늘날 현대인의 미각은 인공 향미료나 조미료에 길들어 있다. 자연의 순수한 맛을 즐길 줄 모른다. 하지만 야생초 요리를 해 먹으며 우리 가족은 이제 자연의 맛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자연의 맛과 향은 우리의 뱃속을 편하게 할 뿐 아니라 머리도 맑게 해준다. 야생의 먹거리가 우리 몸속에 들어오면 몸이 가벼워지고 하루하루 사는 게 기쁘다. 그러니까 우리의 몸과 영혼을 살아 있게 하는 진정한 섭생은 건강한 먹거리의 선택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
사람이 사는 곳엔 어디든지 괭이밥이 있다. 지난여름 서울에 사는 친구의 아파트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주변을 산책했는데, 아파트 주변에도 괭이밥이 돋아 노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후 나는 괭이밥을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는 풀’이라고 명명했다. 사람 곁에 머물며 아픈 이들을 치유하는 괭이밥.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며 치유 에너지를 한껏 분출하는 그 ‘창조적 자발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는 우리 가족은 사람들이 요리재료로 여기지 않는 풀로 요리를 해 먹으면서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무엇보다 들풀로 만드는 레시피를 이웃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한다. 기후 변화로 요즘처럼 채소를 구하기 어려운 시절에 텃밭에만 나가면 풋풋한 먹거리가 잔뜩 널려 있으니!
얼마 전 마을의 아름다운 둘레길을 걷다가 인접한 야산 밑의 인동 군락이 굴삭기의 주걱손에 찍혀 사라지는 걸 보았다. 아내는 자기가 그토록 아끼는 인동 군락이 사라진 것을 보고 가슴이 아프다며 눈물까지 흘렸다. 인동, 매혹적인 향기와 뛰어난 약성 때문에 많은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식물이 아니던가. 그런 광경을 보면 혈연의 죽음을 보듯 한없이 마음이 아프다. 어떤 생태학자의 보고에 따르면, 지구의 식물 종이 하루 한 가지씩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식물들이 사라져버리면, 지구 위에 살아가는 생명체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약을 구한단 말인가.
어떤 나무에 나쁜 벌레가 있으며 ㄴ그 나무가 주위의 나무들에게 소식을 전해서 그 벌레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쓴 물질을 내뿜어 나쁜 벌레의 침입을 막도록 도와준다고, 꿀벌들도 먹을 만한 양식을 발견하면 꿀통으로 돌아와서 특별한 춤을 추어 동료 벌들이 양식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다고 한다. 인동 역시 꽃향기로 다른 생명체들을 불러들여 소통하며 그 생명체들에 필요한 화학물질을 제공하고 있는 것. 산행을 마치고 내여오며 나는 인동 꽃 몇 송이를 뜯어 봉지에 담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단풀의 줄기에서 나오는 흰 즙이 젖 같다는 아내의 말에 나는 문득 평생을 애기땅 빈대처럼 삶의 바닥을 치며 살았던 해월 선생이 말한 그 유명한 젖 이야기가 떠올랐다. (…) 우리는 젓 같은 생명의 즙을 지니 비단풀을, ‘조선의 위대한 혼’ 해월에 대한 아픔의 기억이 서린 마을 앞에서 채취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약으로 쓸 만큼만 비단풀을 뜯어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이 빈자리를 채우지 않으면 반쪽짜리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비단풀을 뜯으면서도 연실 ‘고마워’ ‘미안해’라고 중얼거렸지만, 우리는 다 먹고 난 빈 죽그릇을 앞에 두고도 감사의 비나리를 바쳤다.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는 인도의 속담처럼 땅별의 동반자인 그대가 없으면 인간이 치유될 수도, 부족한 부분을 채워 온전해질 수도,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도 없으므로!
토종 씨앗들은 이렇게 수수만년 대물림 되어 왔다. 어머니의 어머니, 할머니의 할머니들의 생명을 보듬는 극진한 손길을 통해서. 지상의 음식은 어디서 오는가. 농부들이 자기 목숨처럼 소중히 지켜온 씨앗에서 온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우리 현대인들은 살아 있는 생명을 가지고 온갖 장난질을 치고 있지만, 그렇다고 씨앗 한 톨 만들 수 있던가. 농부들의 미운털이 박힌 쇠비름이나 바랭이, 나팔꽃 씨앗이라도 한 톨 만들지 못하지 않는가.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한 박경리 작가는 씨앗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문장을 남겼다. ‘어떤 작가는 소설가란 하느님을 닮으려는 사람이라 했다. 그러나 나는 씨앗을 닮으려는 사람이다. 씨앗이 함축하고 있는 신비는 하느님의 신비이기 때문이다.’이 문장을 읽은 탓일까. 텃밭에서 거둔 작디작은 씨앗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거룩한 창조의 영의 수런거림이 들리는 듯싶다.
엉겅퀴는 맛이 쓰고 달고 떫으며, 성질은 따뜻하고 독이 없다. 간과 신장, 심장, 폐, 대장에 들어가서 약효를 발휘한다. 간을 해독하고 피를 맑게 하며 어혈을 풀어주고 종기를 삭이며 혈액을 생성하는 등의 작용을 한다. 엉겅퀴는 순우리말 이름인데, 피를 엉기게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따라서 엉겅퀴는 지혈작용도 뛰어나다.
우리 조상들은 이처럼 메꽃을 약으로 사용했지만,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엔 구황식물로도 썼다고 한다. 구황식물이란 흉년 따위로 기근이 심할 때 주식 대신 먹을 수 있는 식물은 가리킨다. 『조선의 구황식물과 식용법』이라는 고서에서는 메꽃의 구황적 식용법을 아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 우리집에서는 이러한 식용법의 도움을 받아 주로 메꽃뿌리를 캐다가 씻어 쌀을 넣고 밥을 지어 먹는다. 그리고 뿌리를 씻어 그늘에 잘 말려두었다가 갈아서 경단을 만들기도 하고 쌀가루를 섞어 떡을 빚어 먹기도 한다.
기후 위기의 상황을 맞아 설상 가상으로 식량 위기마저 도래할 거란 예감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즈음, 우리 가족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잡초에 깊은 관심을 두는 까닭은 이런 불길한 예감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물가에 자라는 흔하디흔한 식물들은 우리를 살리려는 만물의 어머니 지구 여신 가이아의 자비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가 아껴야 할 소중한 행복의 자원이라고.
네잎클로버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장점이 상처를 입기 때문이라고 한다. 네잎클로버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에 많이 난다. 그러니까 패트릭 주교가 말한 행복의 심벌, 네잎클로버는 평온한 꽃밭 속에는 없다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진정한 행복은 길가나 운동장의 토끼풀처럼 짓밟히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 자란다는 것이 아닐까.
아버지의 특별한 행보를 몇 년째 곁에서 지켜보며 그 꾸준함에, 관찰력과 창조력에 존경을 표한다. 아버지의 발걸음은 야생초와 점점 닮아간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아마도 지금이 단단한 흙에 뿌리를 박은 채 예쁜 꽃과 열매를 맺고 있는 시기인 것 같다. 수수하지만 멋들어진 야생초 꽃과 열매처럼 말이다. 매일 동네를 산책하시며 손에 그날 먹을 식재료인 야생초를 뜯어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그것으로 먹음직스럽고 푸짐한 잡초비빔밥을 내놓을 것이다. 눈을 열어 깨어 있는 삶을 실천하시는 부모님이 있기에 늘 마음 한편이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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