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이별의 방식』, 전미란, 수필과 비평사, 2020

그루 터기 2022. 2. 28. 22:25

이별의 방식, 전미란, 수필과 비평사, 2020

 

   어제에 이어 오늘도 또 한 번 행복에 빠져든다. 이렇듯 갑자기 연이어 두 권의 책이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마음이 바빠진다. 어제의 윤혜주 작가의 못갖춘마디의 충격이 채가시기도 전에 또 다시 이별의 방식에 푹 빠져 버렸다. 이 책도 내가 좋아하는 비슷한 세대의 등단작가의 수필이다. ‘못 갖춘마디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학나눔 지원을 받았다면 이 책은 부천시 문화예술 발전기금을 지원 받았다. 지원의 선정기준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두 책 모두 작품성이 인정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사실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어제와 오늘은 정말 행복한 날이다. 아쉽게도 어제 너무나 충격적으로 다가온 못 갖춘마디때문에 오늘 이 책은 조금 침착해진다. 그래도 좋다.

   이런 책들만 매일 매일 보고 싶다. 어쩌다 한 번 읽는 책이라면 몇 번 검토하고 확인하고 책을 선택하겠지만 한 번 가면 7권씩 짧은 시간에 책을 선책 하다 보니 내 마음에 쏙 드는 책만 찾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래도 이렇게 가끔 맘에 꼭 드는 책을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하고 좋다. 필사 목록에는 순서를 올려놓았다. 하지만 밀린 필사 때문에 바로 필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읽기만 하는 책보다 필사하기로 한 책이 많아지면 독서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지만 그래도 좋다. 이런 책을 만나는 날은 모처럼 들른 구내식당에서 특식을 만난 것처럼 기분이 좋다.

 

 

저자 소개

전미란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2002<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후 작품활동을 해 왔다. 지역사회에서 문학공모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 이별의 방식이 있다.

 

 

독서 메모

 

당신과의 사랑은 미치지 않고서는 안 되는 일인 것 같아요. 사랑을 글로만 표현할 줄 아는 당신과 멀쩡한 정신으로 사랑하기란 속 터지는 일입니다. () 실컷 함께 있다가도 돌아서면 또다시 그리워지는 내 사랑 문 씨. 당신과의 사랑이 영원히 정답이 없다 해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쓰는 것이 모든 것의 끝이라는 릴케의 말을 저는 믿으니까요. 열정적으로 씀으로써 그리움도 고요해져 우리의 사랑이 단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될 수 있다면 행복하겠습니다. 영원히 나의 사랑, 당신의 이름은 '문학'입니다.

 

Con sentimento : 감정을 갖고 - 돌부리에 자꾸 걸려 넘어지는 기분

Capriccioso : 마음 내키는 대로 - 산다는 것이 벙어리장갑을 끼고 건반을 치는 것

Tranquillo : 조용하게 쉬! - 빠르되 거칠어지지 않게, 느리되 처지지 않게

Lacrimoso : 애처롭게 - 살면서 모든 것을 보여주고 털어놓아도 좋을 한 사람

Affetuoso : 애정을 담아 - 같이 산다고 다 사랑은 아니야

 

누군가를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말은 거짓말일 것이다. 가끔 공연장 무대에 놓여 있는 피아노를 먼발치에서 바라볼 때면 왜 그를 버렸는지, 굳이 그럴 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밀어내버린 사람 같았다. 그렇지만 사람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일까. 공연장 가득 환호와 박수가 터질 때 나는 수백 명에게 기쁨을 주는 무대 피아노가 아닌 단 한 사람, 나를 위로해 주었던 피아노를 떠올리며 힘껏 박수를 쳤다.

 

뜨거워도 김이 나지 않는 매생이국은 사랑하는 이의 입김처럼 뜨겁다. 뜨거움을 품고도 겉으로 태연한 여인이다. 만만하게 보고 성급하게 한 술 뜨다가는 입천장이 데고 만다. 맨지름하니 보여도 들추면 들출수록 전신을 화들짝 놀래는 뜨거운 여자다. 결이 곱고 보드라운 것일수록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 그러면 바다와 갯벌을 방심하듯 놓아버린 농염한 맛이 혀에 감긴다. 뜨거운 바다를 삼키는 미끈한 쾌감! 그럴 때면 슬며시 수저를 놓고 그릇째 들고 먹어도 좋다.

 

언제나 다음엔 더 잘하고 싶었다. 다음이라는 정류장에는 늘 희망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이다음이 있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다음들이 쌓여 가는 사이 이마와 눈가엔 주름살이 늘고 흰머리도 생겼다. 사는 일이 수많은 정거장을 거치는 것과 같다면 난 지금 생의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 것인지. 다음 정류장을 향해 막 출발하려던 버스가 끼익, 브레이크 소음과 함께 급정거를 한다. 승객을 태우기 위해 문이 열리자, 뒤늦게 뛰어온 한 중년여자가 외치듯 묻는다. 아저씨, 이 차 어디로 가요? 그 많은 노선을 다 말해 달라는 거요? 지금?

 

집으로 돌아갈 시간, 나는 그녀의 드레스 룸에서 외투를 받아 걸쳤다. 눈동자가 빠져나간 퀭한 단춧구멍이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지금 어디선가 사람들의 발길에 차이고 있을 잃어버린 욕망의 눈동자. 두껍고 꽉 조인 인습이라는 외투에서 얼마나 조바심치다 지쳐 떨어져 나간 것일까. 미미한 것의 사라짐. 너무 사소한 것이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길수록 오히려 마음에 자국으로 남는다. 작은 고리 속에 끼워진 단추 같은 부속품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세 여자의 자화상이기 때문은 아닐까.

 

숨이 막힐 때까지 길게 뽑아내야 하는 인생 무장단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보면 바다와 같은 숨통이 있다. 삶의 마디 그 어드메쯤, 소리 소문 없이 제 알아서 꺾어 넘어가야 하는 대목에서 출렁이는 바다의 리듬 같은 도둑숨으로 풀어낸다. 다다앙~다앙.

 

유품들은 방안 살림보다 바깥 물건이 더 많았다. 허드레 창고에 할머니의 말벗이었고 일벗이었던 호미가 노동의 소임을 다하고 쉬고 있다. 쓰디쓴 세월을 받아낸 무쇠 빛 호맹이들, 어쩌면 할머니의 세월은 저 쇳 도막이 연마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몸 공과 첩첩이 싸인 시간이 느껴지는 창고는 할머니 내력을 편편이 간직한 박물관 같다. () 할머니는 팔순 구순을 넘어 백 번째 봄날, 비문에 마침표를 찍으셨다. 진달래꽃 지천인 제암산 어드메쯤, 고무신 벗어놓고 저승 밭고랑을 타고 계실까.

 

해질녘, 하얗게 뻗은 길가에는 봄보리가 파랗게 자라나 들녘은 푸른 어스름에 물들고 있었다. 산 아래 방죽에서 흘러든 물이 수로를 따라 재잘거리는 소리에 그녀의 신발 끌리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나는 무엇엔가 들려있는 여자와 묶이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멀찌감치 간격을 두며 걸었다.

 

가까이 오면 어떡하지? 뒤돌아 보다 힐끗 맞받은 눈길이 심상치 않다고 느끼던 순간, 그녀는 내게 바짝 따라붙는가 싶더니 품에 안고 있던 보퉁이를 보라는 듯 흙바닥에다 펼쳤다. 펄럭, 펼쳐진 보자기 속에서 누런 감꽃 목걸이와 무명 헝겊으로 겹겹이 감싼 아기베개가 드러났다. 쪼그려 앉은 그녀는 땟국이 흐르는 베개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녀는 웃음기 걷힌 얼굴로 내 입에서 무슨 말이라도 흘러나오길 바라며 쳐다봤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무르춤히 서 있었다. 발개진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했는데 그 때 난 눈물도 말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 유월, 다닥다닥 피어난 감꽃이 떨어진다. 발에 밟히며 지익- 지익- 소리를 낸다. 실없고 종잡을 수 없는 감꽃 같은 정애 언니의 헤픈 웃음이 눈에 밟힌다.

 

다시 열차가 출발하자 뒤로 밀려가는 플랫폼 사람들의 얼굴이 급류에 휩쓸리듯 뭉개지고 흐려진다. 도시의 혈관을 달리는 열차에 실려 가는 사람들. 피로와 한숨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전철 안은 꿈틀거리는 혈류 같다.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 속에서 나 또한 타인에게 무례를 범하는 것도 같고 해를 입는 것도 같은 두 가닥의 마음이 레일처럼 교차한다.

 

얼마 전, 친척 결혼식장에서 삼촌을 뵈었다. 점잖고 위엄 있는 풍채는 그대로였다. 대화보다는 침묵과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삼촌이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조카들아, 내가 느그들 어릴 때 엄하게 해서 미안하다."며 마음안의 무엇인가를 밀어내듯 말씀하셨다. 순간, 삼촌과 주고받은 눈빛에서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서로 오랜만에 마주하며 그동안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그리고 지나온 옛날은 또 얼마나 멀어졌는지 가늠하는 귀한 자리였다.

 

형형색색 불 밝히고 거리를 점령한 채 누구를 범하려는지 들숨으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마셔라, 취하라 부추긴다. 초저녁을 지나 절정으로 치닫는 시간대에 북적이는 행인들 속에서 솟았다. 아침이면 고무통에 쪼그라져 있는 풍선 간판들은 간밤에 자신들이 꼬드겨서 벌어진 온갖 일들을 모른 체하며 잠들어 있다. 금지된 것은 저렇게 벌거벗고 오는 것인가. 저 욕망은 무슨 생각으로 혁대를 풀고 나와 가출한 것인지. 발기된 남근 모형은 금방이라도 짜릿함을 즐길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벌건 대낮에 노골적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숨겨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자연현상으로 보였다.

 

아파트 외벽 도색작업이 한창이다. () 그의 얼굴은 땀방울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유리창이 되쏘는 빛 때문에 눈이 따갑고 날씨마저 더워 힘들다고 했다. 숨을 쉬는데도 아미와 목에 맺힌 땀이 흘러내렸다. “무섭지 않으세요?” 뭐가 무섭다요, 먹고사는 것이 무섭지요.” 우문에 현답이 되돌아왔다. 허공에 몸을 매달고 벼랑 같은 벽을 마주하며 흔들리는 외줄이 그의 밥줄이다.

 

지갑을 열고 지폐를 꺼내는 사이, 서로 놓치지 말아야 할 순간을 눈 맞춤으로 주고받는다. 봉지에 담긴 시간은 무릇 얼마일까. 품삯 셈할 줄 모르는 등 굽은 노인의 질긴 시간을 덤으로 받았다. 한 줌 더 쥐어주려는 마음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인정의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가 붙은 오징어는 일반 오징어보다 몸값이 비싸다. 귀한 몸을 자랑하듯 성격이 까탈스럽고 급해서 조금만 건드려도 먹물을 쏜다. 먹물 공격은 자신의 몸뚱이도 시커멓게 뒤범벅이 될뿐더러 길마저도 잃어버린다. 무리한 요구를 부려도 나무랄 수 없는 세계에 사는 그녀와 오징어가 자꾸 겹쳐 보였다.

 

매일 자는 일이 두려웠어. 저녁나절부터 입안의 침을 모아 마실지언정 절대로 물을 마시지 않았지. 엄마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육남매 자식에 시누이 시동생 돌보랴, 고된 농사일하랴, 객지에 있는 아버지 살림하랴, 엄마는 늘 쫓기는 사람처럼 바빴어. 숨 돌릴 틈 없는 엄마에게 오줌싸개 딸년은 애물단지일수 밖에 없었어. 엄마를 성가시게 하지 않는 아이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지. 엄마는 자주 집을 비웠어. 아버지가 근무하는 섬에 가셨거든. 엄마는 동생만 데리고 갔어. 얼마나 따라가고 싶었는지 몰라. 할머니한테 나를 맡기고 섬으로 들어간 어머니는 오래도록 오지 않았어.

 

무엇에 홀리어 정신줄은 놓았던 것일까. 한줄기 바람에 걸려 넘어진 걸까. 살기 품은 햇빛이라도 달려든 걸까. 아니면 민속촌 울타리 바깥세상이 보고 싶었던 것일까. 어떤 마음이 엉키어 떨어진 걸까. 나는 차라리 그가 한 마리 새였으면 했다. 앉아 있던 나뭇가지 따위는 가볍게 차버리고 포르르 날아가는 자유로운 새,

 

눈물로 태어난다는 줄꾼에게 외줄은 잘하면 살판이여, 못하면 죽을 판이라 한다. 얼마나 많은 실수를 쌓아올린 후, 줄에 올랐을까. 하늘이 알고 줄이 알고 그의 몸이 아는 줄꾼을 신의 세계에 갔다 온 사람이라는 뜻의 사니라고 부른다. 보통 사람들에겐 감히 땅띔도 할 수 없는 세계다.

 

헐렁해진 나목들이 두껍게 걸친 소나무에서 커다란 말씀 하나가 철퍼덕, 떨어진다.

“아부지는 괜찮하다.”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것도 돈이고, 사람을 돌아버리게 만드는 것도 돈이었다. 나는 다음날 뭉글뭉글한 속으로 남편의 뜻에 따라 형님 댁에 돈을 보냈다. 그날 저녁, 아주버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돈을 다시 되돌려 보내겠다며 오히려 우리의 형편을 헤아리셨다. 그 순간, 나는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치료비에 쓰시라면 간곡히 만류했다. 결국 보내드렸던 돈은 고스란히 돌아왔다. 그런데 반가움도 잠시, 희비가 갈마들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 나인지 돈의 속성인지 돌아온 돈이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예닐곱 살 적, 여름날이었다. 뙤약볕에 장독 뚜껑이 포개어지고 검은 장독 위로 먹장구름이 지나가고 나면 소나기가 툭툭 함석지붕 처마를 친다. 잠잠하던 집안 식구 모두 뜀박질로 달려들어 항아리마다 뚜껑 덮고, 덕석 걷고, 빨래를 걷고, 소리를 지르며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때였다. 마루 밑에서 잠들어 있던 강아지가 낮잠을 설치며 기어 나오다 누군가의 몽니 궂은 발길에 차였는지 사정없이 나가떨어졌다. 꼬리를 감추고 앵그리듯 앓는 소리를 내며 어긋난 몸짓으로 걸음을 옮기던 누렁이가 애처로웠다. 뭐 하나 거들 수 없는 여자애도 거치적거리다 어디에서 지청구가 날아올지 모른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 잽싸게 뒤란으로 피한다. 마당에서 식구들의 어지러운 발소리를 들으며 최대한 몸을 작게 만들어 웅크린다. 잠시 소나기가 지나가고 마당에 소름처럼 돋아난 흙 보풀 냄새가 뒤꼍으로 밀려오면 그때서야 할머니의 자비로운 부름을 기다렸다. 그렇게 삼대가 한집에 사는 대가족 속에 홀로 적막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나간 일을 자기식대로 편집해서 기억한다. 외할머니는 비바람에 긁힌 호두 청피처럼 푸른 나이에 청상이 된 굴곡진 삶 속에서 정작 당신은 달콤한 것을 마음 놓고 자시지 못했다. 나는 뒤늦게 할머니의 생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해한다는 것이 외할머니가 살아 냈을 삶의 무게까지 알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어릴 적 육친에게서 받고 싶었던 사랑이 내게 미치지 못했다면 부족했을 뿐, 아예 없는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깨를 너무 써서 연골이 많이 닳은 상태라고 한다. 여름에도 눈발이 들이치는 것처럼 시리고 밤에는 통증이 심해 잠을 설친다고 한다. 밀려드는 일감도 반갑지 않다고 했다. 수그렸던 고개를 가끔 들어 보이는 그녀의 눈에 남모르는 눈물아 차 있어 보였다. 드르륵, 들들들, 미싱대에 바늘질감을 앞으로 밀어내듯 통증을 밀어내고 있는 걸까. 모서리가 닳은 널빤지에서 바쁘게 돌아가는 검은 재봉틀이 말 머리로 보이며 그녀가 미싱을 타고 짐수레를 힘겹게 끌고 가는 것처럼 보인다.

 

생의 솔기가 비틀어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노루발처럼 제자리에서 또박또박 걸어가는 그녀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호의를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픈 팔을 써서 살아가는 그녀로부터 내가 정작 수선해야 할 것은 옷가지가 아니라 내 식으로 재단하고 바라보는 시선이 수선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꽃 발치에 떨어진 얽은 씨앗. 그 가만 먹빛 씨앗이 세상 보는 까막눈을 틔어주듯 먼눈을 트이게 한다. 수선집에서 수선르 피우다 나오는데 드르륵, 드르륵, 노루발 소리가 뒤 따라왔다.

 

아파트가 밀집해 있는 신도시는 군데군데 공원이 있지만 마치 하나의 풍경을 드래그해서 복사한 뒤 계속 붙여넣기를 해놓은 것 같은 단지들이 이어져 있다. 소음을 의식하면 그 순간부터 내가 차바퀴로 변해버리는 것 같아 파도 소리라 여기기로 했다. 상활을 바꿀 수 없다면 마음이라도 바꾸어야 했다. 하지만 살면서 쉽지 않는 일이었다.

 

사람의 본성은 아이를 사랑하고 사람의 교양은 부모를 사랑한다는 말처럼 부모 자식 간의 그리움 사이에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당산나무는 목숨을 이어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운명의 강을 건너왔을까. 덧씌워져만 가는 포장도로에서 까치집 머리에 이고 사람들을 기다린다. 산업단지 오리공장 악취를 묵묵히 막아내고 서 있는 고목은 늘고 지쳐 보인다. 흔들리는 잎들이 어서 돌아가라는 손사래 같고 바람으로 등허리를 쓸어 잘 가시라, 인사하는 것 같다. 뿌리가 휘고 검버섯이 피고 옹이가 멍울져 있지만, 여전히 큰 그늘을 짓고 있는 당산나무는 고향에서 노구의 몸으로 자식을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를 닮았다.

 

그런 그가 언제부터인지 상쇠잡이를 할 때 신명의 불길이 솟아야 할 순간 사그라들었다. 꽹과리를 치며 풍물패를 잘 이끌고 가다가 무엇에 홀렸는지 장구 깨진 무당같이 뻣뻣이 멈춰서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것이었다. 구경꾼들이 바람난 소문을 듣고 자신을 향해 빈정대고 조롱하는 것 같아 앞을 뚫고 나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으레 앞장서야 할 상쇠가 발을 떼지 못하니 풍물패들은 우왕좌왕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무리 애써도 허깨비 같은 것이 발목을 놔주지 않더란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소 궁둥이에다 꼴망태를 던지듯 상쇠에게 한 소리씩 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내 글을 찾아 새삼 눈을 비비고 읽어본다. 떠듬떠듬 풀어쓴 나. 이게 정말 나일까 싶다. 겉치레로 멋을 부려놓은 감상의 나열이 부끄럽다. 하지 않아도 되는 말과 해봐야 좋을 게 없는 대목들이 눈에 띌 대면 책 속에 문장들이 수정 불가피한 문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입고 있는 옷이 드러내고 싶은 욕구이듯이 글쓰기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여러 편의 글을 자꾸 쓰고 싶은 마음은 여러 이미지의 옷을 입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일 것이다. , 소설과 달리 수필은 사실의 경험을 직접 작품의 제재로 삼는 양식의 문학이다. 태생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는 눈길을 끌기 어렵다. 그렇다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는 없다. 나도 모르게 내뱉는 말이 드러낼 수 있는 그 이상을 드러내고 말이 볼썽사나워지기도 한다. () 오늘도 나는 모니터 앞에서 그 손길 같은 드러내기와 감추기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내 사랑 문 씨! 이제 당신과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란 바로 지금 이 한 대뿐이라는 절박한 심정. 어느 영화대서처럼,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우주 속에서 이렇게 확실한 감정은 일생에 단 한 번 오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