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 우리말은 없다. 』, 방민, 에세이아카데미, 2021,
이 책을 읽고 나서 독서평을 쓰기가 살짝 두렵다. 사실 난 이과출신이라 국문법에 대한 것은 고등학교 까지 배운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간단한 글을 쓰더라도 잘못 표현된 부분이 많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먼저 우리가 잘못 사용하고 있는 말들을 자세하게 설명한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던 ‘유증상’, ‘좋은날 되세요’ ‘우리들’ ‘휴식을 취하다.’ ‘아들래미’ 등 많은 언어 습관에 대한 지적이 글을 쓰는 저에게도 꼭 필요한 내용이었다. 꼭 글을 쓸 때가 아니더라도 일상생활에서의 언어 습관을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내용들이 지금도 잘 고쳐지지 않지만 하나라도 고쳐 쓸 수 있으면 책을 읽을 보람이 있다고 하겠다. 아니 아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 이다.
내가 싫어하는 책 1순위인 정치적인 성향의 이야기가 좀 있었다. 그런 글은 몇 줄 읽다가 그냥 넘어가 버린다. 그게 진보의 이야기든 보수의 이야기든 나에게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물론 사회적인 현상에 대한 문제 제기겠지만 산문이라는 (혹은 에세이, 수필 등 모두 해당된다.) 장르를 빌려 이야기 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런 이야기는 신문의 칼럼이나 완전히 독자적인 책으로 이야기 하면 골라서 읽을 수 있지만 책을 읽다가 슬그머니 나타나면 기분을 잡친다. 다행히 전반부에 몇 꼭지에서만 보이고 나머지 부분은 대부분 순우리말 사용에 대한 내용들이라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잊어버릴 정도였다.
저자 소개
방민
방민(方旻)은 본명이 방인태(方仁泰)로, 1990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유치환 시의 인간주의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 《동양문학》에서 평론부문 신인상을 받고 평론가로 등단하였으며, 2013년 《에세이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하였다. 1995년부터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고 2017년 퇴직하여, 현 명예교수이다.
《우리시문학연구》, 《국어교육과 국문학》, 《한국어교육론》 외 여러 권의 학술서, 평론집 《중용, 혹은 삼류 문학의 길》, 《수필 숲을 더듬다》, 수필 창작론 《수필, 제대로 쓰려면》, 수필 워크북 《수필, 이렇게 써보자》, 수필집 《방교수 스님이 되다》, 《미녀는 하이힐을》, 《용서의 언덕 너머-카미노 데 산티아고》, 《삶을 길에서 묻다》, 《글이 무서워》 등을 냈다.
수필가와 평론가로서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수필 동호인 모임인 《종로통수필로》를 이끌고 ‘에세이아카데미’ 출판사를 운영한다. 《수필 숲을 더듬다》, 《글이 무서워》, 《종로통수필로》, 《60대 청춘의 못다 한 이야기》, 《생의 바다를 건너다》 등을 출판하였다. 2022년에 제6수필집(가제, ‘우이천 송가’)을 펴내기 위해 꾸준히 글 쓰며, 네이버블로그 《방교수의 수필 강의》도 꾸려가고 있다.
독서 메모
수필은 주장하지 않는다. 이것이 옳다거나 저것이 잘못이라거나 하는 필자 주장이 없다. 의견은 있지만 반드시 옳다고 내세우지 않는다. 수필도 글이니 주제가 없을 순 없다. 이 주제를 논설문이나 신문칼럼처럼 드러내 주장하지 않는다. 어떤 생각을 가진다해도 수필에선 간접화시키거나 여러 의견 중 하나일 뿐이란 관점에 선다. 오직 내세우는 의견도 체험에 의존하고 때론 객관 근거나 지식 논리로 보강하기도 하지만 주요 방식은 아니다. 그 의견에 동의 하길 강하게 요구하거나 설득하지도 않는다.
산문은 직설 표현을 쓴다. 객관 사실과 논리를 바탕으로 서술한다. 추상 개념어와 학술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반면 수필은 구체 사물과 감각언어를 즐겨쓴다. 산문은 직역하여 쓴다면 수필은 의역하여 쓴다. 산문이 직설로 설명문을 앞세운다면 수필은 비유로 정서문을 바탕에 깐다. 물론 둘 다 이것이 명확하게 구별되거나 갈라지지 않는다.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나부터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은 좋은 사람이 될 생각이나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그런 사람을 찾는다면 이것은 헐값에 물건을 구하려는 횡재를 노린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언론 방송과 글에서 자주 쓰고 있는 순우리말은 대부분 한자어 우리말인‘계란’을 ‘달걀’로 고집스레 자막으로 바꾸면서 그게 순우리말이라 강변하는 수준에 머무른다. 볼 때마다 화면에 보이는 화자는 분명 계란이라 발음하는데 여지없이 티브이 화면 아래 자막에는 자동변환기처럼 달걀로 바뀌는 신기함은 언제 보아도 못마땅하고 불쾌하다. 실제 발언을 왜곡하면서까지 다르게 표기해야 할 당위성이 정말 있는지 방송관계자에게 따지고 싶을 만큼 견딜 수 없이 궁금하다. 아울러 일상 쓰는 말에서도 과학적 순도의 가치를 맹신하는 것은 진정 바른 일인지 묻고 또 묻는다.p73
인류가 오늘날처럼 원시인과 비교해 엄청난 차이의 문명 생활을 할 수 있는 바탕은 말로부터 시작한 것이라 보아도 지나친 생각은 아니다. 그러므로 말 한마디라도 바르고 좋게 하려는 노력과 시도는 우리 삶에서 언제라도 가치 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p95
한글은 우리말을 표기하는 가장 좋은 표기 체계의 하나일 뿐이지 유일한 것은 아니다. 한국을 ‘Hankook', 한글을 ’Hanceul'이라 쓴다면 이건 한국어인가? 영어인가? 또 ‘코리아’, ‘코리안 알파벳’은 영어인가 한국어인가?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이 한글로 표기하는 말은 한국어인가? 여권에 영문 이름을 표기했다고 미국인이 아니듯, 한국어를 한자로 쓰든 로마자로 쓰든 우리가 알아듣고 말한다면 그건 당연히 한국어다. 우리말과 한글 문자는 상관성이 깊지만 필연 관계는 아니다. p134
우리말 어휘가 풍부하고 품격 있는 언어가 되어 반듯한 문자 생활을 하기 위해선 더 이상 순우리말만을 강조하거나 편향된 인식으로 한자어 우리말을 홀대해선 안 된다. ‘아버지’, ‘아빠’, ‘부친’, ‘춘부장’, ‘선고’란 말 용도가 서로 다르다. 이중 어느 말만의 편파 사용은 스스로 표현과 인식을 축소하여 삶의 지평을 협소하게 할 따름이다. p135
설운도의 히트곡인 ‘잃어버린 30년’에서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란 노랫말을 1,2절에 반복하는데 듣기가 거북하다. 이산가족 아픔을 공감하게 한 노래 절정부에서 창자 감정을 드러내는 가사인데 그것이 귀에 덜컥 달라붙어 꺼림직하다. 이것은 제대로 부르자면 ‘어머니, 아버지, 어디에 계십니까’가 더욱 바른 표현이다. 하도 귀에 익어서 이런 지적이 오히려 어색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 마찬가지로 자기 현과 누이를 ‘형님, 누님’으로 부르는 것은 역시 옳지 않는 호칭이다. p153
편의상 몇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살피면, 첫째 각 편 글의 주제 설정, 둘째 글의 제재 선정, 셋째 문장과 문체 . 넷째, 구성, 다섯째 문학적 특성이다. 위 다서 항목으로 글을 살피면 수필가 산문과 소설가 산문의 정체가 어느 정도 문학 수면에 모습을 드러낼거라 기대한다. 다섯 가지 항목은 수필이란 글이 성립하기 위한 중요한 골격이자 혈맥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갖추어 쓰는 것이 수필 쓰기 요체라는 걸 수필가는 모두 인식할 것이다. p188
수필문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작가 자신이 체험 이야기이므로 언제나 화자는 1인칭이다. 그러므로 1인칭 화자를 뜻하는 ‘나, 내’를 쓸 필요도 없고 쓰면 걸리적거려서 문장이 군시럽다. p196
간혹 수필은 의견을 강조하거나 주장하는 논설이 아니어서 막연하게 추정하며 독자에게 공감을 얻기 위해 더러 ‘것이다’를 쓰지만 작가 의견을 제시하고 강조하는 수필이 아닌 산문에서 위처럼 막연한 ‘것이다’를 남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p206
수필이 문학이 되려면 꼰대 짓을 자제해야 한다. 꼰대 말씀이 없어야 한다. 즉 다른 말로 한다면 글에서 힘을 빼야 한다는 말이다. 간혹 독서로 간접 체험하여 얻은 이해 지식과 정보를 나열하거나 설명하고 아는 체 하는 지식의 힘자랑을 하거나, 나아가서 자신은 우월성을 가진 듯 도덕을 내세우는 인격의 힘자랑에서 도덕과 지식 힘을 빼고 진솔한 작가 나상을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글에서 힘 빼는 일이다.
수필은 개인 자아에 국한한다면 산문은 타인과 공유하는 세계에 속한다. 동네 사람이 인정하지 못해도 서울을 구경한 나에게 의미 있는 세계가 수필인 데 반해, 산문은 동네 사람이 도의하지 못하면 가치도 없고 의미도 증발한다. 나만의 세계로 갇히느냐, 열린 세계로 통 하느냐에서 둘이 차이 난다. 수필이 개인 자족동굴 지평이라면 산문은 타인 개방 광장을 지향한다. 수필에선 타인에겐 가치 없는 체험이라도 나에겐 의미 있는 삶이 되어 존재 의의가 있다. 하지만 산문은 타인에게도 가치 있는 것이 되어야 하므로 타당성을 갖춘 논리와 증거가 필요하며 필자는 독자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거나 그러한 것을 이해하여 행동화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따라서 수필은 대자성이지만 산문은 대타성이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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