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책의 말들』(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공감하기 위하여), 김겨울, 유유, 2021

그루 터기 2022. 2. 26. 17:04

책의 말들(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공감하기 위하여), 김겨울, 유유, 2021

 

100개의 책에서 가져온 100개의 문장이라고 소개한 책이다. 100개의 문장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그 문장을 소개하고 작가의 에세이를 실었다. 이런 류의 에세이는 두 번째인데 책의 소개는 처음이다. 신선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런 것도 에세이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말끔하게 털어버렸다. “전차를 타면 늘 책을 읽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언더그라운드에 나오는 문장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자주 볼 수 있다. 자주가 아니라 전차(우리나라의 전철이나 기차 정도)에는 책을 보는 사람들이 많다. 한 동안 일본 출장이 많아 몇 년 동안 한 달에 한 두 번씩 일본을 다녔었다. 그 때 부러웠던 것 중에 하나가 전차에서의 독서 풍경이었다. 작가의 버스에서의 독서 풍경을 그렸다. 나도 차를 타면 책을 많이 보는 편인데 버스에서는 도저히 자신없다. 흔들리는 버스에서는 몇 분을 넘기지 못하고 바로 멀 리가 나고 어지럽기 때문이다. 눈도 많이 아프다. 그런데 작가는 반대편으로 종점가지 가고, 다시 돌아오면서 목적지를 놓칠 정도로 집중할 수 있었다는데 놀랍다.

놀라운 일은 그거 외에도 어릴 때부터 우리가 보통 말하는 어렵고 난해한 책들을 많이 있었다고 소개한다. 어렵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책 제목에서 아우라를 느낄 정도의 책들을 주위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랄 정도의 책을 읽었단다. 부럽다고 해야 하나 경이롭다고 해야 할까. 어릴 때부터 책을좋아하고 책과 함께 성장해 온 작가님의 글. 실망하지 않을 정도의 멋진 글들이다. 크기가 작은 글씨와 간간히 어려운 내용도 술술 읽히는 글. 내가 쓰고 싶은 글이 이렇다.

 

 

저자 소개

김겨울

글과 음악 사이, 과학과 인문학 사이, 유튜브와 책 사이에 서서 세계의 넓음을 기뻐하는 사람. 유튜브 채널 겨울서점을 운영하고 MBC FM 라디오 북클럽 김겨울입니다DJ로 활동 중이다. 음반을 몇 장 냈고 종종 시를 짓는다. 독서의 기쁨, 활자 안에서 유영하기, 유튜브로 책 권하는 법등의 책을 썼다.

 

 

 

독서 메모

 

미문을 잘 쓰는 것과 글을 잘 쓰는 것은 다른 일이다. 하지만 문장에는 분명한 힘이 있다. 문장은 종합적인 독해 과정 없이 곧바로 독자에게 전달된다.

 

그러므로 책읽기란 얼마나 비효율적인 행위인가. 어떤 이들은 문학을 읽지 않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한다. 허구의 세계가 쓸모없다 믿고, 당장 써먹을 만한 지식을 알려주는 책만이 가치 있다 여긴다. 그러나 비효율이 곧 우리가 삶을 버틸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임을, 더 나아가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힘임을 경청하는 이들은 안다.

 

책에서 책으로, 또 책에서 책으로 통과하는 날에는 내가 책이 되어 사는 것만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정신을 입고 벗는다. 그나마 입을 정신이 있는 게 어디냐고 자위하기도 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정신을 갈아입는 일이 내 맨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고.

 

이걸 읽으면 100퍼센트 잠들리라는 사실을 수정구슬 나 없이도 예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마 그걸 안다고 읽지 않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어쨌든 책을 펼친다. 읽다 보면 어떤 환각 상태에 접어드는데, 그건 눈이 반쯤 감겼지만 눈동자는 문단을 훑어 내리고 페이지는 계속 넘어가는 동시에 어지러운 와중에도 드문드문 내용을 기억하는 그런 상태다. 나에게는 이 상태로 책을 완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사람이 먹고살기 위해 발달시키는 능력의 종류는 다종다양한 법이니까.

 

알파벳이나 음절문자, 표의문자로 쓴 책과 달리 알레시아의 책은 말뿐 아니라 글쓴이의 어조와 음성, 억양, 강세, 성조, 리듬까지 담아낸다.

 

나는 귀하고 조용한 말을 들으러 간다. 삶의 벌어진 틈을 유영하는 이야기를 읽는다. 비유와 상징과 추상의 글을 읽는다. 140자로 쓸 수 없어 14만 자가 된 노래를 읽는다. 알알이 작은 폐포를 모두 펼친 스무 평짜리 글의 숨소리를 듣는다. 그곳에도 이따금 온갖 말들, 기행, 말다툼, 자랑, 음해, 유행이 있지만 그것들은 왜인지 숨차게 동분서주하고 않고 가만히 실려 간다.

 

내 마음의 발은 아치가 모두 무너졌다. 책은 내가 간신히 얻은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안정, , 집 같은 단어다.

 

어떤 날에는 그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나의 책무를 하고 있다고 느낀다. 서로 싸우고 상처 입을지언정 한 명의 여성이라도 더 살아서 서로가 서로의 등대가 되는 일만으로도. 그것은 때로 매우 지치는 일이지만, "나는 그녀처럼 강해지는 법을 터득해야만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것이다. 죽음으로 달려가는 생각을 잡아 세우는 법을 배우고, 우리가 곁에 있을 것이고 인생은 수습될 수 있으며 반드시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빵과 포도주처럼 나눠 마셔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 믿음이 무한정의 현실이 되어 우리를 살게 할지도 모른다.

 

마음에 와 닿는 책을 읽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가 된다. 그게 슬픈 책이든 웃긴 책이든 담담한 책이든 신나는 책이든, 나아 주파수가 맞기만 하면 그리고 작가가 충분히 고민했다면 어떤 책이든 위로가 된다. 삶의 의미와 인간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해 주고 일상의 작은 조각을 빛나게 해 주고, 나의 내면을 직면하게 만드는 책들, 삶에 깊이 잠수해 본 사람이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는, 정말로 무엇이든 위로가 된다. 누군가에겐 소설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에세이, 누군가에게는 시가 되겠지, 그렇게 한 사람에게 위로가 된 책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

 

여성들은 페미니즘의 언어를 통해 자신의 몸을 자신의 지위를, 자신의 얼굴을, 자신의 말을 찾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지금, 이제는 페미니즘에 관한 책이 아니더라도 여성 작가들의 책 전반에 페미니즘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글을 쓴 사람이 지니고 있는 내면의 일부를 보여 준다. 그것은 전부가 아니며 또한 외면이 아니다. 책은 저자가 아니라 저자가 가진 일부를 뽑아내 차근차근 꿰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모두가 허구인 것도 아니다. 그러한 내용은 분명히 그의 안에 존재한다. 혹은 그 내용이 그의 핵심적인 부분일 수도 있다.

 

부모님께 들키지 않으려고 그는 손전등을 들고 이불 속에서 책을 읽곤 하였다. 역시 나마 그런 건 아니었던 것이다.

 

살아가는 일은 몸에 갇히는 일과 다름없다. 몸이 썩어 없어지리라는 확신, 무슨 짓을 해도 늙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 더럽게도 말을 들어 먹지 않는 장기와 근육과 온갖 액체를 무사히 먹이고 재우고 이끌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움직인다. 그것이 그토록 지난한 일인데도 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몸이 곧 인간이며, 몸을 지겨워하는 것이 인간이고, 몸을 뛰어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므로. , , 이 지겨운 몸.

 

여성 신부를 인정하지 않는 가톨릭교나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는 이슬람교, 여성 목사 안수 비율이 터무니없이 낮은 개신교, 공공연히 비구니를 차별하는 불교의 태도 모두 답답하게 느껴진다. 신의 진리, 참된 진리가 사람을 차별하라 가르치던가. 신의 구원이, 혹은 인연법이 여성에게는 다르게 적용되던가.

 

나는 가끔 눈을 감고 지금 이 순간에 소비되고 있을 커피나 휴지나 비닐의 양을 상상해 본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은 온당한 일인지 의심한다. 내가 살아 있는 것, 살아서 뭘 자꾸 먹고 쓰고 버리는 것 자체가 해악인 건 아닐까. 이미 늦었다는데. 돌이킬 수 있는 시점은 20년 전에 지나 버렸다는데, 모두가 연결된 세계에서 모든 것의 폭주는 멈추지 않고

 

학교도 가지 않고 가만히 누워 나 혼자만 시간의 다른 흐름을 발견할 때 그는 문득 알게 된다. 시간이 꼭 일정하게 흐르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일정하게 흐를 필요도 없다는 것을. 그걸 미리 알았다면 살면서도 조금 덜 헤맸을지도.

 

201456일에 공책에 이렇게 썼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나에게는 엇다.” 그것은 선언이자 다짐이기도 했는데. 내가 하는 일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건 사회가 규정한 낭비이면서 내가 규정한 낭비였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 뭘 하질 못했다. 온종일 컴퓨터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한숨을, 한숨을, 그 한숨을 다 모았으면 거기 든 수증기의 양만으로도 잠수가 가능했을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 나와 나의 다정한 사람들, 미워하면서도 사실은 깊이 사랑했던 세상에 대해서 나만이 쓸 수 있는 한 권의 책을 써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누구나 죽을 때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자신만이 읽을 수 있는 외로운 책을 갖게 된다. 자신만이 읽었고 읽을 수 있으며 단 한 번 낭독되었고 앞으로 결코 완독될 일이 없는 책이다. 누구도 읽을 일 없는 이 책을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쓰는 태도를 우리는 품위라고 부른다.

 

도서관에서 발견하는 책은 희한하게도 다 재밌어 보였다. 약간 내 취향을 벗어나는 책일지라도 도서관에 꽂혀 있다는 이유 하나로 손이 갔다. 서가를 한 칸 한 칸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심혈을 기울여 여섯 권을 고르고 있자면 이것도 읽고 싶고 저것도 읽고 싶어 결국 이걸 꽂고 저걸 뽑았다가 저걸 꽂고 다시 이걸 뽑기가 일쑤였다.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이 사람이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집중해서 읽고, 밑줄도 치고, 질문도 하는 것이 그 책을 최대한으로 읽어 내는 방법이다. 반대로 글을 쓰는 일 역시 나에게 집중하고, 질문하고, 답하고, 다시 질문하는 일이다. 책은 저자의 경청과 독자의 경청으로 완성된다.

 

끔찍하지, 삶이란 게. 삶은 너무 끔찍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해야만 하는 일을 말할 수 없게 만들고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일만 말할 수 있게 허락한다. 말해야만 하는 일을 말하고 나서 제 삶을 침범당하는 기막힌 사태에 슬퍼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 세상과 투쟁해야 하는 사람들. 에세이가 투쟁이 되는 사람들. 자서전이 비명이 되는 사람들.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소설을 쓰고 누군가는 시를 쓰고 누군가는 음악을 만들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린다. 쓰지 않을 수 없는 삶의 증언을 새로운 형태로 창조해 낸다. 나만 보고 들을 수 있는 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있는 형식으로. 모든 예술이 아픔에서 시작되지는 않지만 어떤 아픔은 예술로 승화된다. 자서전이지만 더는 자서전이 아닌 것들이 그렇게 탄생한다.

 

치지도 않을 악보를 써 읽는다. 그는 무엇이 그렇게 슬펐길래 음표를 물처럼 쏟아 놓고 우는 것일까? 저기 다른 이는 왜 엉엉 울지 않고 이렇게 자꾸만 가슴을 치며 누르는 것일까? 그림이며 글이며 소리가 종이에서 왕왕 울리다. 가만히 종이에 귀를 기울인다. 한 번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몇 번이고 다시 재생 하면서 읽는다. 충분히 읽고 나면 악보는 새로운 차원을 내어 놓는다.

 

그게 어떤 소설이 되었든,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그것이 모두 허튼소리라는 것을 숙지해야만 하며, 그러면서도 읽는 동안에는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

 

책을 여러 권 쓰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게 있다면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읽기만 하는 독자였을 때는 그저 작가만 번쩍 번쩍 눈에 보였지만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의 수고로 책이 만들어지는지 이제는 안다. 책은 저자, 편집자, 디자이너, 인쇄소 직원들의 손을 거쳐 비로소 형태를 갖춘다. 저자의 권능은 원고까지다. 원고조차도 편집자아의 상의를 통해, 또 편집자의 수정을 통해 완성된다. 제목과 표지, 편집디자인의 영역은 말할 것도 없다.

 

한 번도 열리지 않은 뚜껑에 대해 생각한다. 그래서 속에 든 내용물이 오랜 시간 천천히 부패해 가는 모양을 생각한다. 혹은 공기조차 드나들지 못해 부패하지도 못하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누구에게도 열리지 않는 완제품. 인간이 다 죽은 세상에 혼자 남아 있는 통조림이 되는 일. 그러니까 맛보고 뱉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열리는 편이 낫다. 완성을 기다리지 말고, 나도 너도 다 죽기 전에. 어차피 우리는 조금 있으면 다 죽으니까, 다 죽기를 기다리거나, 다 죽기 전에 하나라도 더 미완성의 작품을 내놓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