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있어 따뜻했던 날들』, 최명숙, 푸른사상, 2021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재를 메꿔준 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었다. 어려웠던 유년 시절 아버지처럼 기둥이 되어준 삼촌에 대한 그리움. 그 그리움을 잊지 못하는 작가의 마음이 책을 읽는 내내 가슴에 자리 했다. 그 시절 어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을까. 그래도 그 어려운 과정을 이겨내고 지금의 자리에 오른 작가가 기댈 수 있었던 마음의 기둥이 삼촌이었다. 더 오랜 기간 함께 하지 못하고 떠나간 삼촌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절절이 느껴진다. 어렵지 않은 문장이 술술 읽혀지면서도 명치끝이 찡하도록 하는 이야기들이 책을 덮은 다음에도 여운으로 남는다. 난 이런 글이 참 좋다.
저자 소개
최명숙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으며, 가천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 및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화작가 및 소설가로 활동 중이며, 가천대학교 한국어문학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21세기에 만난 한국 노년소설 연구』 『문학콘텐츠 읽기와 쓰기』, 산문집으로 『오늘도, 나는 꿈을 꾼다』, 공저로 『대중매체와 글쓰기』 『꽃 진 자리에 어버이 사랑』 『문득, 로그인』 『여자들의 여행 수다』 등이 있다.
독서 메모
문학은 사람의 삶을 탐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문학을 향유하거나 생산해내는 모두에게 필요한 자세일 것이다. 본인이든 타인이든 한 사람의 삶에 생각의 추를 깊이 드리우고 헤집다 보면, 어느새 인생의 전반으로 이해하게 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예술과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이 본질적으로 사람의 삶에 관심을 두지만 문학만큼 심층적일 수 있을까.
어려운 살림을 일으켜보려고 삼촌은 무던히 애를 썼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렇다. 남의 땅을 소작하는 것만으로 우리 식구 식량이 부족했다. 그래서 가을걷이가 끝나면 삼촌은 서울로 올라가곤 했다. 설을 쇠러 집으로 내려왔다가 설 지나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봄이 되면 내려와 농사를 지을 때가 있었고, 아예 그대로 집에 있다가 농사철이 되면 담배농사에 전념할 때도 있었다.
설 전날 집으로 온 삼촌이 개선장군처럼 서울 이야기를 하면, 나는 자꾸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우리 때문에 장가를 못 가는 것 같아 어린 소견에도 미안했다. 삼촌이 서울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막노동이나 아는 사람이 하는 가게에서 일을 좀 하지 않았을까. 그 또한 신통치 않아서 어느 때는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다가 설 전날에야 돈 몇 푼 구해 우리들의 설빔을 사 들고 내려왔을 것 같다. 그러니 자연 막차를 탈 수밖에. 삼촌에게 들었던 몇 가지 이야기를 조합하여 짐작해보면 그렇다. 온 식구의 입과 마음이 자신에게 매여 있다는 그 책임감이 삶을 얼마나 지난하게 했을까.
삼촌 말대로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배우기를 좋아하고 배우는 것을 겁내지 않게 된 것도 삼촌 덕분이다. 잘할 수 있다고, 잘한다고 믿어준 덕분이다.
손가락이 길면 피아노를 잘 친다는 게 맞는 말일까. 아니다. 손가락이 길면 게으르다는 말은 들어 보았다. 긍정적인 삼촌의 그 말 한마디를 듣고 나는 꿈을 키웠다. 언젠가 꼭 피아노를 배우고 말겠다는 꿈을.
다 익은 감자 껍질을 벗긴다. 고소한 냄새는 그때나 이때나 비슷하다. 한 입 베어 문다. 코가 시큰 거리고 목이 멘다. 이제 다시 올 수 없는 날들, 그렇게 짧은 시간이 되리라고, 순간에 지나가 버리는 것이라고, 그때는 짐작이나 했을까.
삼촌이 집에 있을 때는 언제나 우리들의 연필을 깎아주었다. 하루 종일 일하느라 피곤할 텐데. 그게 조카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런 식으로 사랑을 표현한 것일까. 그때의 사람들은 사랑 표현을 잘 안했던 것 같다. 예뻐도 빙긋 웃으며 머리 쓰다듬어주는 게 다였고. 그래서 삼촌과 특별히 나눈 이야기가 많지 않다. 툭툭 한마디씩 던졌던 말은 있지만. (…) 삼촌은 가지런하게 깎은 연필을 필통에 넣어주면서, 우리들이 연필처럼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자라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어느 한 사람의 인생에 관심을 갖는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그 바탕에 사랑이, 그리움이, 없다면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에서 사라오가 그리움처럼 아름다운 게 또 있을까. 사랑과 그리움은 같은 맥락에서 발현되는 것이므로 굳이 나눌 필요도 없을 테지만 아무튼 삼촌, 그 한 사람의 인생에 관심을 드리우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렸을 때는 미성숙해서 그랬고 성인 되어서는 삼촌의 부재를 의식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따지고 보면 모두 성숙하지 못한 태도였다.
아저씨의 고함 소리와 함께 온 동네를 울리는 폭음이 났다. 한동안 뿌연 연기에 그 주변은 휩싸이게 된다. 한참 후, 커다란 대소쿠리에 허연 뻥튀기를 쏟아낸다. 그것의 임자인 아이의 입이 소쿠리보다 더 크게 벌어진다. 아저씨는 솥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다시 싹 싹 긁어, 둘러서 있는 아이들에게 한 움큼씩 손에 쥐어 주었다. 감질이 났다.
내 어린 시절은 사랑받고 산 날들로 채워져 있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게 많았지만 영혼은 따뜻한 날들이었으니까. 내가 세상에서 크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그런대로 사람 노릇하며 살고 있는 건, 그때 받았던 따뜻한 사랑 덕분이다. 그 사랑이 끝까지 본래의 나를 잃지 안 도록 붙잡아주었다. 세파에 흔들릴 때 도리어 합당하지 않은 것들과 싸워 이기고자 했던 것도, 벼랑 끝에 내 몰린 듯 암담할 때 용기를 냈던 것도, 어둡고 긴 터널에 갇혀 출구를 찾지 못하는 순간에도 한 줄기 빛을 찾으려 눈을 비볐던 것도 모두 그 사랑 덕분이다.
삼촌은 윗방 문지방 옆에서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그날 밤의 풍경은 꿈속인 듯 상상인 듯 아슴아슴하다.
지금까지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두려움보다 용기를 갖고 도전한 것ㄱ 같다. 그러다 보니 내 꿈을 하나씩 이루어 나갈 수 있었다. 망설이거나 안주하려 했다면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도전 정신과 용기를 삼촌에게 배웠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인정의 욕구가 나는 그 시기에 충족되었다. 그래서 피해의식이나 열등감 없이, 자존감이 있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던 것 같다. 참으로 지난한 삶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내 것이 아닌 것은 탐하지도 않고, 그런대로 정직하게 분수껏 살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던 것 같다. 자신감이 결여되지 않은 것 또한 지지와 기대를 듣고 받으면 자란 덕분일 거다. 허세일지 배짱일지 모르는 삼촌의 행동 덕분에 나의 유년 시절은 유복했다. 참으로 따뜻했다.
내가 선생 노릇하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한 가지가 있다. 훈계를 하고 나면 꼭 마음을 풀어주는 거다. 그게 말 한마디일 수 있고 따뜻한 눈빛일 수도 있다. 그래도 부족한 것 같으면 문자나 메일을 보내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그날 밤 삼촌의 미소를 떠올리며.
지금도 내가 힘들어 하는 게 이별이다. 잠시든 오래든 어떤 식의 이별도 필요 이상으로 힘들어한다. 삼촌과 한 이별을 아직도 수용하지 못 하는 것 아닐까. 성숙하지 못한 채 나이만 먹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말이다. 그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기억이 생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삼촌이 없는 현실을 생각하면 담장에 찍힌 삼촌의 손자국이 더욱 선명해졌다. 손가락 자국에 내 손가락을 갖다 대고 맞추며 울었다. 삼촌의 온기를 전혀 느낄 수 없는 담벼락. 그래도 너무 삼촌이 보고 싶으면 그 손가락 자국에 내 손을 갖다 대곤 했다. 그랬다가 갑자기 무섬증이 일어 손을 떼기도 했다. 그 무섬증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어른들 말댈 정을 떼느라 그랬을까.
아직도 내 휴대폰에서 작은 엄마 전화번호가 검색된다. 한참 쳐다보며 얼굴을 떠올린다. 50년 동안 한 번도 못 만난 젊고 고운 얼굴. 작은엄마가 나를 단발머리 여학생으로 기억하듯 나도 그렇다. 가만히 불러본다 하늘에 계실까. 어릴 적에 작은 엄마의 연락을 막연히 기다렸던 것처럼, 지금도 막연히 기다리고 있다. 불쑥 전화해서 작은 엄마야, 하는 다정한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고추잠자리 두어 마리가 할머니 머리 위를 맴돌았다. 할머니는 다 피운 담배를 비벼 끄며 논바닥을 쳐다보았다. 묶어서 세운 토실하고 노란 볏단에 메뚜기가 뛰어다녔다. “네 삼촌이 니들 안 굶기려고 …….” 독백처럼 읊조리는 할머니 눈에 눈물이 어렸다. 갑자기 삼촌이 그리워 훌쩍거렸다. 할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물이 자꾸자꾸 흘러내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할머니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부엉산의 산비둘기 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논둑에 들국화가 노랗게 피어 가을바람에 흔들렸다.
누구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다. 삼촌과 같은 희생을. 그래서도 물론 안 된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확실하다. 삼촌은 숙명처럼 지고 간 삶이었겠지만 얼마든지 우리를 팽개치고 다른 삶을 선택했을 수도 있었다. 그 삶을 선택하지 않은 삼촌 덕분에 우리가 살 수 있었다. 마음이 풍요롭고 사랑 듬뿍 받으며 결핍이 많았을지라도. 자연스럽게 깨달은 게 바로 그것이었다. 정신적으로 충족되면 물질적ㅇ로 결핍되는 것도 넘어설 수 있다는 것.
일자 형 초가집에 방 두 칸, 나중에 직접 벽돌을 찍어 지은 행랑채, 신식 화장실, 자그마한 안마당, 한쪽에 비스듬히 누운 사립문, 나지막한 토담, 뒤란의 싸리나무 울타리, 울타리를 타고 올라가던 황매화, 앵두나무 두 그루, 골담초, 건조실 두 개, 장독대, 옆에 피던 달리아와 백합, 작은 화단. 우리 삼촌과 여섯 식구가 오순도순 살던 옛날 우리 집이다. 이제는 내 기억 속에만 있는.
그 기억의 문을 열면, 삼촌이 감자를 구워 들고 건조실 아궁이 앞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검게 그을린 얼굴로 흐흣 웃으며. 동생들은 정신없이 뛰고 내달리며 시시덕거리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부엌과 뒤란에서 달그락거리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고. 달리아와 채송화가 분꽃과 함께 우리 식구들 웃음처럼 피어나고. 옆집 감나무에 매미 소리 시원스럽고……. 삼촌, 당신이 있어 따뜻했던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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