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그루터기의 일상사

[필사] 『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 한순, 나무생각, 2021

그루 터기 2022. 2. 22. 15:38

[필사] 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 한순, 나무생각, 2021

 

 

오래간만에 필사를 했다. 벌써 몇 달이 된 것 같다.

가끔 책을 보다보면 필사하기 좋은 책이라고 소개를 받아 읽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읽은 책은 한 번도 필사를 한 적이 없다. 아마 책을 소개한 작가와 내가 좋아하는 책이 다른 때문일 것이다.

이번엔 마음에 드는 것 같은 책 3권을 빌려왔다. 보통 제목만 보고 빌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작가 소개도 열심히 보고, 제목에 딸린 소제목, 그리고 목차, 프롤로그까지 보고 골라왔다.

 

내가 책을 빌려올 때 기준이 첫 번째는 에세이나 산문, 수필로 표시된 것을 좋아하고, 다른 책을 읽다가 소개한 책들을 선택하거나. 신간 책꽂이에 있는 800번대 중에 쭉 둘러보다가 고르게 된다.

이번에도 신간에 있는 책들을 고르고, 서고에 있는 814.7이나 818번 쪽을 기웃거렸다. 한 번에 빌릴 수 있는 최대인 7권을 빌렸다.

 

책을 가지고 집으로 오면 표지도 자세히 보고 작가 이력도 한 번 보고 프롤로그를 찬찬히 읽어본다

 

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도시에서 사일, 시골에서 삼일)

눈에 들어온 부제가 마음을 이끈다. 작가의 이력도 독특하다. 출판사 대표이사, 그리고 출판공로상.

작가로서의 상이 아니라 출판관련 상이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책머리에> 쓰인 글을 읽었다. 다른 책에선 서문을 읽으면 ! 이거구나생각이 드는데, 이 책은 선 듯 흐름이 잡히지 않아 두세 번 다시 읽었다. ‘아무튼 시골살이

 

첫 꼭지의 글을 읽었다.

해마다 봄이면 입맛을 싹 잃어버린다. 대신 더욱 예민해진 감각으로 산이며 들판을 훑게 된다. 침묵하던 나뭇가지들이 열에 들뜬 붉은 빛을 내보낼 즈음 산수유가 노란 봄의 환영을 내비친다. 이때 회갈색 나무숲에도 분홍 점이 하나둘 찍히기 시작한다.’

눈이 번쩍 떠졌다.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글이었다.

나는 감성에세이를 좋아하는 편이다. 문학적 표현이 풍부한 살아있는 감성에세이, 나의 가슴을 울려주는 수필이나 산문이면 최고의 책이다. 바로 이 책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살짝 마음이 흐름을 느꼈다.

솔직히 처음에는 머릿속에 정리가 쉽게 되지 않았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넘나드는 이야기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번번이 헷갈렸다. 몇 꼭지의 글이 넘어갈 즈음 조금 숙달이 되었다.

 

내가 닮고 싶고, 쓰고 싶은 글이 바로 이런 글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좋아만 하고, 쓰고 싶어만하지 비슷하게도 못쓰고 있다. 이런 책을 읽다 알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작가님들은 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10여년 혹은 20년 이상을 꾸준히 준비하고, 쓰신 분들이었다. 그러니 이제 막 시작한 내가 잘 써지지 않는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리라. 필사를 해야겠다는 마음먹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좋은 글을 많이 읽고 따라 써 보는 것이라 들었다.

 

그렇게 시작한 필사가 책상에 엉덩이를 붙인지 10시간 정도에 끝이 났다. 필사를 하는 내내 힘들다는 것보다 표현 하나하나에 자꾸만 마음이 갔다. 글의 구성도 마음에 쏙 들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밥 먹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필사한 내용을 두 꼭지 정도 올립니다.

(저는 필사를 노트에 손글씨로 하지 않고 컴퓨터로 합니다. 제가 글을 쓸때 노트북으로 쓰기 때문입니다. )

 

 

 

 

 

 

<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 p 28

 

 

  시골 아틀리에에 들어와 주말을 보내느라 직원들과 주고 받은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가 끊이지 않는다. 데크에 나가 보면 잔 나뭇가지들이 떨어져 있다. 산수유 씨가 굴러다니기도 하고 산수유 붉은 빛이 창문에 죽 흘러 있을 때도 있다.

  나는 데크의 반 가지와 산수유 열매를 주우며 사무실로 문자와 이메일을 보내기도 한다. 아마 나와 가장 맣은 문자를 주고 받는 사람들은 우리 편집부원일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가열차게 일을 하다가도 주말에는 애틋한 인사말을 나누기도 한다. “그래, 수고 많았어. 잘 쉬어.” “이제 좀 쉿겠네요 저도 고기 먹으러 갈 거예요등으로.

 

  책 동네에서 30년 넘게 살아온 나에게 건축 현장은 참으로 낯설었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치 만큼 세상을 이해한다고 한다. 차를 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녀도 공사 현장에 오래 눈길을 주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찌어찌 집 두 채를 지어보는 경험을 하게 된 후, 이제는 공사 현장만 봐도 눈길이 자꾸 머물게 된다. 작업 과정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나, 얼마나 더 걸릴 것인가. 이쯤에선 어떤 문제들이 발생할까를 유추해보기도 한다.

  건축 공사 현장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한번은 건물이 너무 올라가지 않는다고 느껴져 참고 참다 현장으로 쫓아간 적도 있다. 하지만 차가운 시멘트벽 못에 걸려 있는 인부의 겉옷이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 나오기도 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텅 빈 공사 현자에 드나드는 바람 소리가 현장 소장의 한숨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건축가와 현장 소장은 내가 알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끼리 처리하고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얼핏 옆에서 보아도 알지 않는 편이 훨씬 건강에 좋으리란 것을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렇듯 크고 작은 일들이 매일 벌어지는 곳이 공사 현장이었다. 때로 어굴 한번도 본 적 없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집 짓는 일을 하러 왔다가는 인사도 없이 떠나고, 때로는 양전한 청년들이 굵은 쇳덩이를 아기 다루듯 조심스럽게 용접해놓고는 묵묵히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중략)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 상을 받은 페터춤토르는 그의 저서에서 공사장에서 들리는 못 박는 소리, 공구 돌아가는 소리,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쇨에 미소를 짓는다.”라고 표현했다. 그의 말 속에서는 합리와 불합리가 뒤섞이고, 사람들의 의견이 조율되고, 농담이 오가고, 하루의 노동이 거래되는 현장이 연상되기도 한다.

  ‘집을 세 번 지어야 세상을 좀 안다.’는 세속의 말이 있다. 각자의 욕망 조절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해와 도모, 낯선 사람들의 하루 밥벌이가 어우러져 현장은 이어진다. 집이 다 지어졌을 때 나는 아주 조그마해져 있었다. 그동안 내가 알았던 세계는 참으로 좁았다. 이 집을 스쳐간 수많은 손길과 마음에 절로 감사의 마음이 솟았다. 그것은 집이 완벽하게 지어져서 생긴 마음이 아니었다. 수많은 공정 안에서 사람들의 열정, 밥벌이의 현실, 이루고자 하는 꿈이 합쳐져야 한 채의 집이 완성되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집을 짓는 과정에서 이것저것 공부하다 만난 반가운 책이 있다. 아파트와 바꾼 집 (박철수 박인석 지음)이 그것이다. 이 책은 참으로 친절하게 사람의 향기를 담아내고 있다. 아파트 전문가 교수 둘이 살구나무집을 지은 이야기다. 건축과정에서 미리 준비해야 할 것들, 설계자와 설계 단계에서 고민해야 할 것들, 집에서 펼쳐질 미래의 삶에 대한 예측에서부터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얻어낸 실용적인 여러 대안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그중에서도 나의 눈을 가장 사로잡은 페이지가 있었다. 232페이지, 거기에서 나는 그동안 다른 건축 관련책이나 인터넷 정보를 뒤지며 내내 목말라 있던 감성을 발견했.

  이 책의 저자 두 분은 그들 집의 공사에 차여해 정서을 보탠 사람들의 이름을 한 명도 빼지 않고 현판에 기록했던 것이다. 건축 설계 사무소 조남호 양원모 이상목 건축시공 ()ㅇㅇ 김봉섭 서현석 직영공사 송영원 심만섭 RC공사 목조공사 전기공사 금속공사 설비공사 부대공사 임병두 박정남 김범룡 최명홍 김지환 노봉녀 김점숙 김은호 조영국, 그리고 공사 기간 내내 밥을 주문해 먹은 식당까지, 한 페이지 안에 작은 글씨로 빼곡이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이 책의 백미는 바로 232페이지라고 생각했다. 공사의 시작과 함께 사람들 간의 욕망과 이기심을 절충해가면서, 공사의 말미에 현장을 떠난 그들과 마음의 손을 잡고 이름을 기억할 즈음 집은 완성되는 것이었다. 물질로 보이는 모든 재료들 외에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들의 손과 마음이 포개져 지어지는 것이 집이었다.

  우리 집터를 닦고 기초공사를 할 때, 얌전하신 중년 남자분이 이곳이 볕이 잘 듭니다. 동남향으로 아주 터가 좋습니다. 이곳에서 사시면 더 건강해지겠습니다.” 하고 덕담을 건넸다. 겨울 공사를 한 터라 공사 현장에 계신 분들을 보면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는데, 갈 때마다 덕담을 더해주시니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현장 컨테이너 하우스도 멀리 떨어져 있고 전기도 들어오기 전이라 그 흔한 믹스커피 한잔 대접하지 못하고, 그분과는 다시 뵐 수가 없었다. 물로 그분의 성함도 모른다. 다만, 이 집에 살면서 기도가 점점 늘고 있다. ‘그날 뵈었던 그분들 잘되게 해주세요 그분들 아이들도 잘 자라고, 하는 일이 꼭 성공하게 해주세요.“

  우리도 우리 부부는 집을 찾은 분들을 길게 배웅했다. 손을 흔들며 차가 눈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대문 앞에서 떠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시선 속에는 이 집을 스쳐 지나간 많은 손들과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뒷모습이 겹친다. 그래서 더 오래오래 손을 흔들고 있게된다. 가난한 이들의 소박한 마음 앞에서 나는 많이 정제되었다. 그들 앞에서 나는 맥없이 무너진다. 그리고 그분들의 마음으로 다시 일어서게 된다. 참 신기하다. 자주 됩던 분들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들이만나 이렇게 신비한 마음을 만들어 내다니. 토닥토닥 투닥투닥 우당탕쿵광 하는 공사 현장에서 말이다.

 

 

  초가집이었다. 뒤꼍에는 원추리 동산이, 앞마당에는 수레국화가 어우려져 있었다. 우리 개 짜크는 마루 밑에 들어가 자기도 하고 꼬리를 흔들며 짖어대기도 한다. 그리고 장독대에서 늘 손을 모으고 있던 엄마, 엄마는 그 집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람이었다.

다시 페이지는 넘어 간다.

 

 

  생초보 편집자로 시작해서 편집 주간이 되기까지 거의 13년이 걸렸다. 처음에는 엄청난 양의 지식을 소화해내야 하고 완벽에 완벽을 기해야 하는 출판 과정이 몹시 힘들었다.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이고 출근하는 나에게 사장님은아니, 왜 저러고 다녀?” 뒷소리를 하셨다. 그제야 나는 풀이 죽어 코를 빠트리고 다니는 나를 인식했다.

  그렇게 초보 딱지를 떼는 동안 편집부의 노선생님은 교과서를 만드시는 깐깐한 실력으로 우리들을 단련시키셨다. 마지막 오케이를 받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없는 애교까지 동원하여 노선생님께 한 번만 봐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노선생님의 손길이 간 원고에는 어김없이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때마다 선생님의 눈썰미에 감탄을 했고, 그 원고가 그냥 책으로 나왔을 장면을 생각하면 머리가 쭈뼛 서곤 했다.

  처음 편집 일을 배울 때는 손가락 교정을 적으면 세 번. 많으면 다섯 번까지 거쳐야 했다. 그리고 새 책이 나오면 우선 페이지부터 확인했는데, 목차와 페이지를 맞춰보고 나면 한숨이 절로 나오곤 했다.

  그런데도 책은 잘 팔려나가지를 않았다. 서점을 돌아보다. 우리 책을 손에 들고 있는 독자를 만나기라도 하면, 나는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가 우리 책을 사는지, 안 사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냥 그 자리에 놓고 가면 다시한번 절망해야 했고, 사려고 챙기는 독자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쫓아가서 어색함을 무릅쓰고 물어 보았다.

 

 

(중략)

 

 

  사실 아버지의 급하고 불같은 성격을 우리 형제들은 모두 싫어했다. 그러나 그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끈이 다할 때까지 좌절하지 않고 움직이시던 말년의 모습에 우리 자식들은 존경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품위는 말년의 모습에서 그 실체를 드러냈다. 그 향기, 아마도 그 향기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맴돌고 있었던 것 같다.

실버 시장이란 말이 이미 나와 있었지만, 실제로 실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이즈음이었다. 실버 책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기존 출판사들과 차별화도 되고, 우선현재 내 삶에서 가슴 뭉클거리는 것을 꺼내는 것이 가장 진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시작을 하고 보니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했다. 실패했던 책을 분석하고 구매연령층을 조사하니 타깃이 불분명했다. 일반적으로 실버라고 하면 중년층일지라도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모습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좀 더 앞서 미래를 대비하는 소수의 중장년 독자층이 있을 뿐이었다. 실버를 인생의 특정 기간으로 단정하는 한 독자의 수는 극소수였고, 책의 콘셉트도 역시 한정 되었다.

  여러 가지 실패 원인을 분석한 결과 삶의 커다란 전환점인 중년에서부터 노년에 대한 인식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실버 시리즈는 실버 연령층의 특을 벗어나자 크게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노년의 지혜를 빌려오는 방법, 중년부터 노년을 준비한 방법, 또 노년을 대하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 등 여러 가지로 가지를 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 발간된 부모님 살아 계실 때 꼭 해드려야 할 45가지는 엮은이의 이야기이면서, 나의 이야기, 편집부 직원들, 그리고 독자들 모두의 이야기가 되었다. 45가지 중에는 가능하면 하루에 한 번 부모님께 전화 걸기가 있었다. 눈물을 찍어내며 교정을 보던 편집부 직원은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가 보기 싫은 선을 보게 되기도 했다. 나도 어버이날 그동안 전하지 못했던 사랑을 용감하게 고백했다. “엄마 이 세상에 날 낳아줘서 정말 고맙고, ,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젤 사랑하는 사람은 엄마야.” 어머니는 감격하셨는지 말을 하지 못하고 아휴!” 한숨만 내쉬셨다. 어색한 마음을 대충 마무리 지으며 전화를 끊었는데, 며칠 후 어머니께서 다시 전화를 해오셨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물을 받아서 너무 행복하다.”라는 말씀이셨다.

  편집부 직원들의 마음부터 움직이게 만든 이 책은 한 달 반 만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OECD 국가 중 노인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 기록을 가지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책,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인정사정없이 사랑을 쏟아 부어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해주신 우리 아버지께 바치는 기획의 성과물이기도 했다.

  결혼과 함께 책을 사이에 두고 이인삼각을 해온 남편에게 물었다. “나는 어떤 기획자야? 훌륭한 기획자인가(비꼬는 투로)아니, , 내가 생각해도 그리 훌륭하지는 않아. 200타석에 타율 1할대나 되나?” 라는 질문에 남편은 꼭 잘 팔려야 좋은 책인가. 뭐 그러나 당신의 장점이라면 아이디어를 바로 실천하는 것이지. 그건 기획자로서 아주 좋은 자질이야.”라고 대답해주었다.

  어느 사이 열정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가슴에서 물컹물컹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지쳤다는 마음도 잊어버리고 나는 다시 책의 한복판에 섰다.

 

 

 

 

 

 

<산 부추꽃>

 

  주말마다. 짐을 꾸리던 파란색 체크무늬 가방 손잡이에 때가 꼬질꼬질하다. 내용물이 다 빠진 가방은 지퍼가 열린 채 널 부러져 편안하게 쉬고 있다. 이틀 뒤면 저 가방은 도 세탁된 수건을 넣고, 속옷을 넣고, 커피 설탕을 넣고, 발뒤꿈치에 바르는 약을 넣고, 와구 와구 무엇들을 넣은 다음 차에 실릴 것이다. 그리고 쫓기듯 차는 시골집으로 달린 것이다.

  시골집에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 서울엣 우리를 나가라고 쫓아내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허둥지둥 시골집을 향해 밥도 거르며 달리게 된다. 시골 어느 귀퉁이에 있는 보리밥집에 앉아 때늦은 점심을 먹을 때도 있다. 시골집이 우리를 부르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시골집을 찾는 것인가?

  시골 집 마다에 들어서면 수돗가에 옮겨 심은 산부추꽃이 나를 반긴다. 지난해 초가을쯤 참나무 숲에 서 있다가 나무들 사이에는 어떤 식물들이 사는지 궁금해진 적이 있다 나무가 너무 커서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곳에도 키 작은 식물들이 자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경사가 꽤 심한 곳에 발을 눌러 딛고 고개를 숙이다 그 꽃을 보았다. 보라색 원형의 꽃이 기품 있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늘에 낮게 피는 다른 꽃들보다 키가 훨씬 컸다. 가늘고 곧게 뻗은 꽃대와, 기품 있게 옆으로 늘어뜨린 이파리는 숲속 공간을 평정하고도 남을 만큼 아름다웠다. 산부추 꽃의 아름다움에 넋을 뺏긴 채 고개를 들어보니, 조금 더 떨어진 뒤쪽에 또 한 촉, 그 뒤쪽에 또 한 촉이 피어 있었다.

  산부추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는 내가 본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나만 몰래 올라와서 살짝 보고 가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꽃을 보는 순간, 숲에 상쾌한 공기가 한 번 더 지나가는 듯한 기분은 참 신비한 경험이었다. 산부추꽃이 피어 있는 숲의 아름다움에 경도되어 내려온 나는 이틀이 되지 못하여 남편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말았다. 그리고 남편을 데리고 다시 꽃이 있던 곳으로 갔다. 남편 역시 그 아름다움에 경이로워했다.

  남편이 내려가고 나는 그곳에 서서 이 꽃이 왜 이렇게 사람을 감동시키는지 느껴보려 했다. 산부추꽃은 세거나 강하거나 뽐내지 않았다. 키 큰 나무들이 햇빛을 가리고 있는 가파른 언덕일지라도 뿌리를 내렸다. 꽃이 피는 와중에도 꽃 사이에도 공간을 만들어 숲이 공기를 받아들였다 산부추꽃의 모야새와 역할이 꽃의 의도인지 신의 의도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저 신성한 꽃은 내 안의 선을 자극하였다. 기품 있는 아름다움으로 놀라게 하고,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느끼게 하고, 뭔가 착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고요하고 상쾌한 숲에서 나는 혼자서 기도 같은 말을 웅얼거렸다.

 

  “저는 살면서 사람의 속의 악을 자극하지 않고, 선을 자극하는 산부추꽃처럼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결국 산부추꽃에 대한 사랑을 이기지 못하고 한 촉을 파내어, 반그늘이 지는 우리 집 수돗가로 모셔왔다. 숲속에서 한 언약을 집 가까이에서 늘 상기하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이파리는 축 늘어지고, 아침저녁 나는 산부추꽃의 눈치를 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청소를 하다가도 들여다보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창밖의 꽃의 상태를 살폈다. 나의 애타는 마음을 알았는지, 여러 날이 지나자 산부추꽃은 이파리를 몇 개 떨어뜨리고 나서 간신히 기운을 차렸다. 그리고 또 여러 날이 지나자 내 삶의 화두처럼 보랏빛 촛불 한 자루가 켜졌다.

 

  보랏빛 촛불 앞으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게 되었다. 웃기도 하고,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 음식을 먹기도 했다. 사람들은 무심히 산부추꽃 근방을 지나다녔다.

  시골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한 것은 밥이다. 서울에서 보다 시골에서 쌀이 줄어드는 속도가 몇 배는 빠른 듯 했다. 나에게 집이란 숲이 있고, 나무가 있고, 상추가 있고, 홀로 햇빛을 마주하기도 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밥을 먹는 장소다. 나는 이곳 시골집에서 유년 시절의 집 풍경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다.

  쫓기듯 도시를 떠나고, 쫓기듯 자연을 떠나는 생활의 반복이 벌써 2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다. 저토록 예쁜 보랏빛 촛불도 겨울로 접어들면 고개를 꺾는다. 화무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운다. 내가 도시에 있어도 저 꽃은 피고 또 기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속도에 떠밀려 꽃을 바라볼 시간을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꽃을 보아도 시간은 흐르고, 꽃을 보지 않아도 시간은 흐른다.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며 꽃이 진다. 진실만큼 허무한 것이 없고, 또 허무한 것만큼 진실한 것이 없다. 나는 매주 주말이면 파란색 체크무늬 가방을 들고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나는 도피처로 가고 있는가, 안식처로 가고 있는가?”

 

  “나는 타인에게 도피처인가, 안식처인가?”

 

  “나는 나 자신에게 도피처인가, 안식처인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색깔이 다른 교과서가 시간에 따라 펼쳐지는 곳이 자연이다. 매년 친절하게 말없이 많을 것을 가르쳐준다. 우리의 나이만큼 반복해서 가르쳐 준다.

  식물이 떨어뜨린 씨앗 하나가 생명의 움을 틔우기까지, 두더지는 포슬포슬하게 땅을 일궈놓고, 빗방울은 대지의 목마름을 적셔놓고, 또 낙엽은 이불을 덮어 온기를 지켜준다. 무심한 듯 자신의 일을 하지만 이런 무심들이 모여 하나의 생명을 빚어낸다.

 

  배움이란 끝이 없는 먼 길이라는 것을 조금 알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안식처와 도피처는 도시에도 있고, 시골에도 있다. 친구에게도 있고, 내 속에도 잇다. 그러나 꼭 권하고 싶다. 자연에 머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자주 자연을 찾아갈 것을. 우주홍황이 자연 속에서, 내 안에서, 산부추꽃 안에서 돌고 있다는 사실을 그곳에서 거울처럼 마주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제 산붓추꽃은 사라지고 나무에 하얗게 덮여 있다. 흰눈이. 모든 생명을 무심하고 평등하게 덮어주는 흰 눈이.

 

 

 

<열정과 사랑>

 

 

  결혼을 세 번 하고 이혼을 세 번 한 팔심이 된 여배우에게 앵커의 질문이 날아왔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사랑과 열정을 구분하는 데 팔십 년이 걸렸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사랑에 대한 정의도 열정에 대한 정의도 아니었다.

  열정의 탈을 쓴 사랑과 사라의 탈을 쓴 열정 사이에서 뒤엉켜 있던 삶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열정이 자기중심적 에너지라면 사랑은 상대 중심적 에너지일까?

  많은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면서 타인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애달픈 혼돈이다.

  연인의 사랑이드, 부부의 사랑이든,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든 이 혼돈은 늘 존재한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들어주는 마음이 충만하다면 아마도 그것은 사랑일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의지대로 말하지 않고 상대의 마음에 구를 기울이거나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볼 것이다.

  밤에도 홀로 피는 저 역정, 내가 나 자신을 혼돈하게 만드는 저 열정과 사랑을 좀 더 깊이 바라볼 걸 그랬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나면 다른 사람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늦었지만, 이제라도 알게 되어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