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것은 모두 멀리 있다. 』, 장석남, 마음의 숲, 2021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1 문학나눔’ 선정 도서이다.
시인의 에세이는 가끔 이렇게 어렵다. 그래도 읽고 나서 뭘 읽었지 하는 책보다는 훨씬 좋다.
내가 쉽게 읽히는 책을 좋아하는데도 말이다.
본문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제4표지에도 있다.)
‘세상에 답이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다시 한 번 물을 손으로 떠서 던진ㄷ. 겨울이 되면 여지없이 물은 얼어붙어 버릴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어리둥절해진다. 나도 이 자리에 앉아 있지 않을 것을 생각한다. 그것을 생각해도 어리둥절해진다. 하여튼 평반 정도의 연못가에 앉아서 물을 움켜 건너편 소나무 아래의 돌멩이에 뿌려보는 것이다. 돌멩이는 젖어서 이번엔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늘 멀리 있었다.’
이렇듯 쉽지가 않다. 그래도 좋다.
저자 소개
장석남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집으로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뺨에 서쪽을 빛내다》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독서 메모‘
사랑은 어느 날 문득 생겨난 것이 아니라 아득한 저쪽에서부터 있었고, 있을 것이고, 있는 듯 없는 존재로 나아간다. 그건 소멸이 아니라 합일의 과정이다.
이 세계가 사랑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눈치 챈다. 나는 그 사랑의 방외인이라는 것도 눈치 챈다. 모든 사람이 사랑에 관한 한 방외인일지 모른다는 짐작도 어렵지 않다. 문학은, 시는 천상 그 방외인의 기록이라는 것도 눈치 챈다. 힘겹게 자란 소나무를 사람들은 아름답게 여긴다. 그러나 힘겹게 자란 인간이 아름다운 건지는 아직 의문이다. 역시 힘겹다고 느끼는 사랑이 아름다운 건지도 의문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좋은 건 그저 좋은 것이지 까닭이 있지 않다. 늘 명확한 그 사실 앞에 엉뚱한 까닭들을 늘어놓는다. 좋은 시가 왜 좋으냐고 하면 어떠한 답이 나와도 그 시가 가지고 있는 함량에 미달인 채로 구차하다.
여름 저녁 마당에 자리를 편다. 새우젓에 호박국을 끓여놓고 잠시 밥상에 없는 식구들을 생각할 때 조용히 젖어드는 저녁별을 보게 될 것이다. 여름 한철 무성한 자연의 질서 속에도 이미 이별이 있고 울음이 있다. 꽃이 피고 지는 속도도 있다. 인간은 그것을 너무 일찌감치 깨닫는 짐승이라 서글픈 거다. 그래서 한 숟가락의 밥을 떠먹고 한 번 겸손해지고, 한 숟가락의 국을 떠먹고 또 한 번 겸손해지는 거다.
연못 앞에는 한아정(寒鴉亭)이 있다. 어느 노스님의 작명이다. ‘한아(寒鴉)’란 겨울 까마귀란 말이다 춥고 배고픈 까마귀란 말이다. 스산하다. 그러나 나는 그 이름을 받고 좋아서 발을 구를 지경이었다. 노스님일면 일생 적적을 벗으로 살아온 분이다. 속되지 않은 글을 쓰며 오래 건강하게 살라는 뜻을 함께 일러주셨다.
내가 사랑하는 장소가 한 군데 있다. 사랑하는 장소라고 하면 유명한 장소일 수는 없다. 남들도 다 아는, 가령 어느 다정스럽게 생긴 조그마한 공원 광장 같은 데를 좋아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데를 사랑하는 장소라고 말하기에는 좀 저어되는 바 없지 않다. 사랑이란 것은 어느 만 큼 비밀스러운 무엇 없이는 싱거운 물건인 듯하다. 나만이 아껴서 간직한 무엇이 있어야 비로소 사랑할 수 있을 듯싶다.
나는 빨리 노경에 들고 싶다. 노(老)의 경지란 완성된 인생의 경지다. 익숙해진 경지다. 미숙하고 서툰 법에서 이제는 거칠 것 없는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노경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죽음을 곁에 두고 그와 노닐 수 있는 경지란 얼마나 완만하고 넉넉하고 편안하며 자연스러운 일인가. (…) 노경은 완숙의 경지를 의미하므로 인생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황금기임에 틀림없다. 나는 빨리 늙고 싶다.
조금씩 성에가 짙어가는 대합실의 북쪽 유리창에 희미하게 반달이 걸렸다. 저 달은 여물어서 대보름이 된다. 헌데 나는 누구도 맞이한 사람이 없었으니 사람의 일생이란 참 이상한 국면도 있는 것이라고 뒤늦게 나는 중얼 거린다.
여름은 이제 아주 간 모양이다. 금방이라도 찬 물속을 뛰어들고 싶게 하던 뙤약볕도 다 식어서 홑겹으로 지내기도 여간 쓸쓸한 게 아니다. 들에 나갔더니 보랏빛 구절초가 어디서 왔는지 호젓하고도 찬란한 태를 빛내고 있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다가도 다가서 꽃 앞에 바투 앉아 들여다보면 그것이 곧 신비다. 이 빛은 어디서 왔는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동그라미는 컴퍼스로 그린 것보다 손으로 그린 것이 아름답다. 왜 그런가? 거기엔 호흡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호흡이 생명이다. 생명이 느껴져야 아름다운 것이다. 삶의 움직임이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의 움직임이라니! 숨죽여 그린 저 동그라미! 우리의 옛 도자기에서도 저러한 둥긂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기에 그토록 애지중지 항아리를 모았다는 화가 김환기의 글을 전에 읽었다.
한 사람의 삶을 사회적 맥락이나 역사적 비중에 견주어 비춰보면 사적인 삶의 크기는 그만큼 희미해져갈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 차원에서 행복의 가치체계가 세워지지 않아서야 어디 생각하고 산 삶이라고 할 수 있겠나. 생각하며 산 삶이 아닌 이상 그게 올바로 여문 삶이라고 할 수 있겠나. 남들이 좋다니 그저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출세나 해보자고 덤벼드는 자가 수두룩하다. 또 세속은 그들의 야욕을 외면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배움’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없을 것이다.
방안이 향기롭다. 탁자에 모과가 하나 놓여 있다. 아무렇게나 있다. 모과라는 열매는 아주 매혹적이다. 저 빛깔을 보라, 저 빛깔이야말로 늦은 가을 저녁을 닮은 빛이 아닐 수 없다. 한 쪽에 상처가 나 있다. 상처는 짙은 자주색이다. 길가에 뒹굴던 것을 주워왔던 것이다. 상처 때문에 버림받은 몸일 게 뻔하다. 그런데 온 방을 물들이는 이 향기는 상처에서부터 쏟아져 나온 것이리라. 상처가 향기를 짙게 만들어 낸다. 인간의 정신이 저 모과 정도를 맺게 할 수 있는 대지라면 되겠다.
나의 집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문을 열고 들어설 수 없다. 아직 벽과 벽의 자리로, 문과 문의 자리로, 심지어 기둥의 자리로 들락거리거나 들락거리지 못한다. 현재 내 시의 운명이다.
어느 저녁,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무엇인가를 찾느라고 재봉틀의 서랍을 연다. 거기에 한 영혼이 있었다. 작고 흰 나방 하나가 누추한 고치 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서랍 속 귀퉁이를 찾아가 집을 지은, 버림받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영혼이 이제 육신을 벗고 개어나 날아가려 하고 있다. 내게 그보다 더 극적인 체험은 달리 없다. 그것은 차마 예상치 못한 하나의 경이였다. 그리고 내 생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 몇 가지 풍경 중 하나였다
비유比喩는 위대하다. 비유를 통하지 않고는 ‘저쪽’ 너머에 가라앉아 있는 것을 들어 올려볼 방법이 없다. 이쪽 편에 무엇을 올려놓느냐에 따라 저쪽은 떠오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태양이 떠오르는 것은 그것의 반대편에 무엇인가가 올려져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대개 ‘나’라고 하는 숨덩어리 아닐까?
실제로 스스로를 밝히기 위한 빛은 별로 없을 것이다. 밖에다 무슨 말인가. 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를.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는 빛들이다. 스스로를 밝혀보려는 빛은 아닐 것이다. 컴컴한 칠흑의 밤이 그립다. 그때 나의 불빛을 가지고 싶다.
반듯하고 격정적인 므라빈스키의 비창을 크게 틀어놓고 한 점씩 내리기 시작하는 눈발을 맞이하겠다. 비창이 끝날 때 눈은 마당을 모두 흰빛으로 만들어놓을 것이다. 음악을 다 듣고 나서 창을 열고 나아가 흰 눈길 위를 몇 걸음 걸어본다면 황동규의 언어대로 ‘사는 것의 홀로움’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듯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어쩌면 다 듣고 난 후를 즐기기 위한 건지도 모른다.
골짜기 아래에 내려와서 임시로 가설한 방 하나 얻었다. 시간을 만들어 종종 가서 책을 볼까하고 주인에게 부탁한 것이 의외로 쉽게 성사되었다. 조그만 방을 둘러보며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이 자리에 음악을 자져와 들어야 할 텐데 뭐가 좋을까.…….’였다. 책을 뭘 읽을까 보다. 먼저 뭘 많이 들을까 고민 했다니!
사실 문인이라고 하는 것은 노천에, 들판에 있을 때에야 문인이긴 하다. 정신적 야전 상태여야만 실로 그렇지 못한 인간들을 두드릴 만한 돌멩이를 찾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올 이른 봄에 심은 사철나무 울타리에 새잎들이 돋아났다. 사철나무의 새잎을 아는지. 그 위에 반짝이는 봄빛을 아는지. 그 위에 튕기는 봄비를 아는지. 그만한 눈높이로 키를 맞추고 사철나무 울타리의 높이에 어깨를 맞추면, 절로 그 울타리가 춤이 되는 듯하고 내 어깨도 덩달아 춤이 되는 듯하다. 그리고 반짝이는 내 어깨선을 포함한 그 선들은 멘델스존의 멜로디 선이라고 해도 큰 이의가 없을 듯하다.
사랑하는 것은 모두 멀리 있다.
내 방 지붕에는 감나무가 한 그루 있다. 다시 감꽃이 지고 풋감들 떨어지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다가올 가을, 겨울을 건너다본다. 맨 나중까지 견디다가 끝내 여물어 과감하게
뛰어 내리는 존재가 있을 것이다. ‘사랑’과 ‘사랑함’은 얼마나 다른가!
어린 시절의 자연학습 시간에 본, 말굽자석에 뿌려진 쇳가루들의 양태를 나는 아직 눈곱만큼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그것의 근본적인 이유가 생생하게 궁금하다. 그 문양은 지금까지도 내 일기문의 밑그림이다. 이해라는 것이 사랑마저도 해결하려고 할 때 모든 것은 헝클어진다. 인간의 입장을 벗어날 수 없으니 ‘사랑함’은 멀리 있다. 그런데도 인간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것을 향하여 고투해 나아간다. 그저 끝내 나아갈 뿐이다. 멀리 있는 것을 향하기에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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