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들』, 류성훈, 시인의 일요일, 2021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1 문학나눔’ 선정 도서이다.
저자 소개
류성훈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고 시집 『보이저1호에게』가 있다. 현재 한양여대, 숭의여대, 가천대 등에 출강 중이다.
독서 메모
시를 쓰는 마음으로 쓴 책인 만큼 저는 이글들을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시로 읽히든 산문으로 읽히든 이 책은 ‘사물’에 대한 제 고백이자 찬가이며 관점이자 관점에 대한 자성입니다. 동시에 대상에 대한 저의 사물이건 타자이건 모든 대상에 대한 새로운 바라봄은 우리 생의 진정한 긍정임을 저는 믿습니다.
비가 온다. 일흔이 넘으신 아버지가 허리 통증을 호소하시던 날, 무리하다 엉치뼈에 통증이 생긴 어머니가 누워 계시던 날, 발을 헛디딘 할머니가 병원에 가신 날, 언젠가 비가 오면 홀연히 나도 이유 모를 무릎 통증이 찾아오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문득 내가 처음으로 나이를 먹었다고 느꼈을 때가 언제였는지 생각해 본다. 아무래도 그것은 우천과 관계하고 있는 것 같다. "엄마, 할머니는 왜 맨날 비만 오면 무릎이 아프대?" 하고 물었을 때 엄마는 "나이가 들면 비가 무릎에 내리나보다."하고 대꾸해 주었고, 이제 할머니가 된 엄마는 본인의 말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이마에 비가 올 때는 우비를 입고 비를 맞으러 나가 그 속에서 뛰어놀곤 했고, 눈에 비가 올 때는 애인과 카페에 앉아 비가 오는 것을 구경하곤 했고, 가슴에 내릴 때는 방구석에 눕거나 앉아 빗소리만 듣곤 했다. 엄마, 그 이후의 비는 내 무릎에도 내리게 되겠지?
누가 뭐래도 등불을 밝히는 건 인간과 문명의 상징 그 자체에 가까운 것, 불을 밝힌다는 것은 밤에 대한 우리의 오랜 극복이며 낮의 일부를 남겨두고 또한 방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것, 또한 그것을 꺼뜨리지 않고 대대손손 밝혀온 우리의 어떤 ‘바라봄’이다. 빛이 있어야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행할 수 있으니까. 우리가 행복해지려고 일을 멈추지 않듯이, 내 영혼을 누군가에게 인상 깊게 읽히고 싶어 글을 쓰듯이, 그럴 수 없는 것을 최대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삶이 가진 불가역적 특징이라고 해본다면, 등불은 참 인간적인 낮일 것이다.
민관군이 북한의 야간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통합 훈련을 하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웠던 시절, 당시 부산에 살았던 어린 내가 처음으로 겪었던 등화관제훈련의 기억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시간이 되자, 온 아파트 단지가 암흑 속으로 들어갔다. "야 이백십호, 천삼호, 불 꺼라!" 같은 소리를 지르는, 자경단 역할을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 끊임없이 울려 퍼지며 종종 알아듣기 힘든 관공서 안내방송 소리와 뒤엉켜 기묘한 진풍경을 연출했다. 그 와중에도 꼭 끝까지 불을 끄지 않는 집도 있었는데, 그런 집 때문인지 여기저기서 터지는 고함은 그칠 줄을 몰랐고, 그런 장난스러우면서도 삼엄한 분위기 속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마치 진짜 폭격을 할 것 같은 음산한 느낌을 몰고 왔다.
우리 가족이 살았던 그 아파트는 지금도 그곳에 있겠지만, 이제 그 기묘한 어둠을 기억하는 이는 별로 남지 않았겠지. "죽은 꽃과 죽은 바람을 차마 볼 수 없어 등(燈)을 켜지 않았다"던 조연호 시인의 문장을 떠올리며, 지금의 나는 불을 켜는 것과 불을 끄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무서운지를 자문해 보았고, 나는 둘 다 무섭다고 자답하고 싶었다.
매미 허물을 일어로 말하면 꽤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우츠세미는 직역하면 ‘텅 빈 매미’가 되고, 이 단어는 그 번역의 의미뿐 아니라. ‘이승에 살아 있는 보통의 모든 사람’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온전한 모습 자체로 빈껍데기라는 의미가 될 텐데, 당연한 얘기지만 이는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불교적 세계관에서 나온 성찰의 결과이며 모든 욕심과 번외 같은 것 헛된 것이라 보는 사상적 바탕이 있었음을 쉬게 알 수 있다.
선풍기 바람 곁에서 묵은 각질을 잔뜩 붙이고 있던 할머니의 리넨을 떠올리기도 하고 교통사고를 당해 몇 달을 누운 채 뜨거운 죽을 흘렸던 누더기 같은 내 대학병원 수술바지를 생각하기도 한다. 당신의 옷이 내게 말해주는 것, 내 옷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이 있는 방식으로, 세상엔 잊어야 버릴 수 있는 것과 잊지 말아야 더해질 수 있는 것이 있다. 사람에게 가장 오래, 가장 많이 밀착된 사물은 옷일 테고 그 옷이 의미와 언어의 일부라면,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것들은 나를 말하고 있고 내가 허물을 벗은 한참 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도구로서 칼은 사물을 베고, 무기로서의 칼은 사람을 베고, 상징으로서의 칼은 마음을 베는 것이니, 우리를 닮은 칼은 늘 우리 속에 있다.
예전의 집은 태생부터 주거형 설계가 아니었기에 구조가 이상해서 겨울 내내 외풍에 시달렸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보일러를 땔 수도, 레인지에 조리를 할 수도 없었다. 한겨울엔 전기 포트로 물을 끓여 변기 물을 녹인 다음 볼일을 보는 일도 많았고 하나밖에 없는 노트북 컴퓨터로 작업을 할 때는 너무 추워서 배터리에 이상이 생겨 전원이 들어오지 않기도 했다. 친구나 지인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집 안에서 사용하는데 아무리 추워도 그 정도일 리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집에서 졸업 작품을 썼고, 석사논문을 썼고, 등단을 했고, 박사논문을 썼고, 늘 감사히 거기 있었고 역시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러기를 약 십여 년, 아무도 모르게 혼자 버텨온 시간들이었다.
새로 지어진 집에서 이제 나는 철저히 혼자지만 거기엔 유난히 의자가 많다. 작업실 책상 의자는 말할 것도 없고, 신혼집을 정리하고 이사를 한 누나의 살림에서 얻어온 식탁의자 네 개와 아일랜드 식탁용 스탠딩 의자 둘, 마루에는 다목적 안락의자가 또 두 개 있다. 다리 네 개짜리 원목으로 된 등받이 없는 다목적 소형 의자 하나에 너무 낡아 녹이 다 난 허리보호용 독서 의자도 하나 더 있다. 즉 나 혼자 지내는 좁은 집에 의자만 총 열한 개가 있는 셈이다. 이중 내가 하루에 이용하는 의자는 책상 의자와 밥 먹는 의자 두 개뿐이다. 나머지는 하루 종일 아무도 앉지 않는다. 그저 늘 그 자리에 있을 뿐, 이들은 아무런 역할도 없이 가끔 청소기를 돌릴 때 번거롭게 슬금슬금 자리를 비켰다 제자리에 되돌아가 있는 게 역할의 전부이다.
의자에 욕심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더 좋은 의자를 자주 사서 집에 들이는 것도 아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내 책상 의자도 원래 누가 길에 폐기물 딱지를 붙이지 않고 불법으로 버린 물건이었다. 머리 닿는 쿠션의 금속 지지대가 살짝 휘었을 분 다른 부분은 모두 멀쩡하기에 주워온 것이고 그 이전부터 쓰던 독서 의자는 누나에게 물려받은 건데 너무 오래 쓰던 거라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고 옥상에 올려두었다. 지금은 비바람을 맞고 팔걸이 파이프에 녹이 잔뜩 올라와 있는데다 등받이 합판은 다 터져 있다. 하지만 나는 왠지 의자를 버리는 것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꼭 필요한 물건만 필수적으로 남겨두고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성향의 내가 이 경우에만 왜 그런지 사실 나도 궁금했다.
실제 쓸 일은 거의 없이 자리만 많이 차지하는 사물을 왜 나는 쉽게 처분하지 못하고 있을까. 아무래도 내겐 그것들이 나 대신 사람을 불러주거나 기다려준다고 믿었기 때문인 것 같다. 다시 말해 의자가 있으면 결국 거기 앉을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라고 할까. 외로워서, 어쩌면 언제까지고 외로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사람이든 사물이든, 상대를 외롭게 하는 존재는 더욱 외롭다. 즉 대상이란 ‘고독의 형상’이다. 의자는 외롭게 기다리는 사람을 오래 그 자리에 있게 한다. 즉, 인칭을 사물화시킨다. 설령 어떤 기다림이 끝나도 의자는 사람을 외로운 객체 그대로 있게 돕는다. 그런 면에서 의자는 사물과 사람 사이에 있고 어떤 사물과 사람보다 외로움에 더 가까운 사물이다. 사람의 외로움이 실체화된다면 의자의 형상에 가장 가까울지도 모른다. 많은 의자를 놓은 집에서, 그 수만큼 연약한 나는 얼마나 고독했고, 또한 많은 사람을 외롭게 했을까 생각한다. 나는 의자 앞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의자는 내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새롭게 고독하기 위해 앉아 있고, 의자는 오늘도 그것을 기록하고 있다.
모든 문학은 근본적으로 인위이고 허구이다. 그러나 너무 지극히 현실적이고 극적인 사건과 시각, 설정과 세계관 등을 통해 지리멸렬한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좀 더 신선하거나 덜 따분하고 확장적인 사유로 우리를 초대하고자 한다는 고귀한 특성이 있다.
연말, 모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에서 쌓은 포인트로 신년 다이어리를 받았다. 글을 쓰기 위해 카페를 일부러 자주 가는 기벽 때문인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커피를 참 많이도 마셨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고객들이 적립한 포인트로 매년 새 다이어리를 주는 그 마케팅이 나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생각건대 언제든 메모를 할 수 있는 노트를 아예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만일 많은 사람에게 필요하고 유용한 것이라면 이 물건을 정말 예쁘고 실용적인 것으로 선물 받는 일은 대개의 모두에게 즐거운 일 아닐까?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노트를 자주 선물했었고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할 때는 나에게 노트를 가끔 선물했었다. 아직 새 물건이 얼마든지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새것이 손에 들어오면 변함없이 흥분되고 행복한 선물이 있게 마련인데, 나에겐 노트가 그랬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그곳에 나의 무지하고 어리석은 예비 과거사의 너저분한 활자 비율을 늘려갈 때마다 내겐 아직도 조금씩 자라고 있다는 만족감의 흔적이 함께 자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수첩이나 노트를 선물할 때는 '딱히 비싸지 않아서'라는 솔직하고 무감각한 이유보단 그렇게 함께 완성되어 가는 행복의 경험을 공유하고픈 소망이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있어왔다. 그런 면에서 나는 노트는 채워도 좋고 채우기 전 역시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노트에 뭔가를 적어놓은 것은 그것을 알아두거나 좀 더 확실히 인지하기 위해서이고 그것은 당연하게도 갓 새롭게 배운 정보를 잊지 않기 위해서임이 자명해 보인다. 그런데 반대로 해석하면 이렇다 우리는 새로운 무언가를 접했을 대 그것을 절대 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메모의 힘을 빌려 그 대의 정보를 노트에 의탁해 놓고 나중에 다시 극성을 떠 올릴 수 있게 하기 위해 적는다. 즉, 더 잘 잊어버리기 위해 적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70년대의 부산 남부민동의 어느 연탄 방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사십여 년 후의 내가 보고 있었다. 노트 속, 아무것도 모른 채 전후의 세상과 정면으로 부딪치던 그 젊은 부부에게 말을 걸어도 그저 그들은 조용한 필체들로 답할 뿐. 안경을 끼고 책을 보다 잠든 아버지에게 꿈이 더 잘 보이긴 하겠다며 책장 주름처럼 웃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태어나기 전과 자라기 전의 예 부산을 떠 올렸다.
지인이 얘기 중에 어떤 물건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것은 본인 아버지의 유품이자 생전 그의 인감도장이었다. 도장 손잡이 윗부분에는 다 닳은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가 물려받은 약간의 토지재산을 노리고 형제들이 기회를 엿보아 왔던 데다 그것 때문에 자기들끼리 싸우는 모습까지 보아왔기에 항상 열쇠고리에 끼워 소지하고 다니신 흔적이라고 했다. 주인이 세상을 떠난 이후엔 아무 쓸모도 없어진 그 작은 사물 하나가 온 집안과 혈연의 관계를 흔들어 왔던 셈이다. 그는 세상의 마지막 모습 앞에서 어떤 생각이 먼저 들었을까.
그는 무엇을 위해 살았을까. 그 이전에 우리는 무엇 때문에만 사는 걸까. '무엇'은 과연 의미가 있을까. '무엇'은 무엇인가. 이런 꼬리를 무는 의문들 속에서 그가 살아 있던 세상의 구멍 난 인감도장은 물성보다는 의미 쪽에 훨씬 가까이 있는 대상이었다. 이제 더 이상 쓸 수도, 쓸 일도 없게 된 아버지의 도장을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그에게 그 점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모님 댁에 갈 때마다, 어렸을 때부터 전혀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 하나 있다. 그것을 버릇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도 내가 항상 잘못하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냉장고에 있는 음식 찾기가 그것이다. 습관이 되면 조금은 나아지지만 대체로 잘 되지 않다보니 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 한참을 찾다 어머니에게 늘 되묻고, 결국 직접 오셔서 찾아주시도록 만든다.
내가 냉장고 문을 열고 어떤 원하는 것을 찾은 후 온전히 문을 닫을 확률보다 뭔가를 찾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문을 닫는 확률이 생각해 보면 훨씬 더 많았고, 이런 일이 그리 희한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 또한 오핸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혼자 있는 집 냉장고에는 넣어둔 게 별로 없어 그런 일이 전혀 없지만 가족이 있는 집은 얘기가 다르다. 웹 게시판의 가벼운 글들이나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소재로서의 냉장고 이야기들을 보면 무슨 미로나 보물창고와 같은 공간처럼 인식하는 사람들의 개인적 경험이 아주 많이 보이는데 이를 보게 된 후에야 내가 어떤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될 정도였다. 어머니가 나 대신 찾으러 오신 후에도 그런 다행인 확인은 반복되었다. 그 냉장고 안의 각종 음식물과 식재료들을 쌓아오고 관리하신 장본인 또한 나보다는 훨씬 필요한 음식을 쉽게 찾거나 빨리 찾을 수 있는 확률이 높긴 했지만 못 찾는 경우도 꽤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엔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할 수 없는 상황도 있었으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양말이 떨어지면 한두 번은 기워서 신는다. 할인마트나 잡화점에 가면 값싸고 질 좋은 양말을 저렴한 가격에 뭉텅이로 살 수 있는 시대에 다소 궁상맞아 보일지 모르지만, 꼭 그것이 구두쇠 같은 습관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 (…) 기운 티가 많이 나고 가끔 금방 다시 터지는 경우가 생겨, 그럴 때는 부모님 댁에 갈 때 가져가서 어머니께 고쳐달라고 부탁드렸다. 어머니는 그때마다 거리낌 없이 재봉틀을 꺼내시는데, 기계로 드르륵 하고 박으면 내가 누더기처럼 고치는 것보다 훨씬 야무지게 고쳐지므로 요즘의 나는 나태하게도 직접 반짇고리를 잘 꺼내지 않는다.
어머니의 재봉틀은 국산 '부라더미싱'의 ZL-B950 모델인데 생산된 지 사십여 년이 지난 물건이다. 우리나라에서 재봉틀 하면 가장 잘 알려진 그 회사는 설립된 지 육십 년 정도 된 곳으로 최초로 재봉틀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 B950은 요즘 나오는 컵퓨터 드라이브가 장착된 전자동 방식이 아닌 완전한 기계식 재봉틀인 데다 프레임이 무쇠 주형으로 되어 있어 무척 무겁고 크기도 큰 편이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에게 우스갯소리로 "이건 가정용이 아니라 공업용 같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잘은 모르겠지만 공업용일 수도 있겠다."며 웃으셨다.
“벗어봐라, 금방 기워 주께." 또 구멍이 난 줄도 모르던 내 양말을 목격한 어머니가 재봉틀을 다시 꺼내 오실 때, 양말이 제 모습을 찾을 때마다 외부 수동 풀리 중앙에 붙은 노란 제조번호 스티커가 반쯤 떨어진 채 흔들리는 모습을 볼 때, 나는 김명인 시인의 <역류, 그중 "시계를 고치면서, 기다리 지 않겠다. 않겠다고 흘러가버릴 시간을 되돌려놓으면서, 비추고 또 비추어도 외눈박이 확대경 속은 고장 난 세상"이라는 구절을 떠올려본다. (…) 나는 누구도 아무것도 최소한 멋대로 고치려 하진 않을 테니, 앞으로 남은 우리의 시간 속 세상들은 더 이상 고장 난 곳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버릇 같은 쓸쓸한 말놀이를 마쳤다. 어머니가 잘못 박힌 실코를 수정하기 위해 풀리를 거꾸로 돌리시는 것을 보고, 나는 재봉틀에 그런 기능이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우리가 태반에 싸인 채 이 세상에 도착하듯이, 사물은 대개 상자에 담긴 채 도착한다. 그것은 상자 밖에서 만들어지지만 한번은 상자에 들어갔다가 본격적으로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다. 물론 상자 밖으로 영영 나오지 못하는 사물들도 있다는 점에서 사물과 인간은 모두 씁쓸한 출발선을 가졌고 우리는 죽어 다시 한 번 상자 속에 들어가므로 상자는 모든 시작과 끝에 위치한 사물에 가깝다.
'인간'은 명사형보다는 동사형에 가깝다고 생각 했다. 마치 자유라는 개념이 완전히 자유로운 불가능한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상태 그 자 체의 의미에 가까운 것처럼 알 속의 새는 아직 온전한 새가 아니고, 상자 속의 냉장고는 아직 온전한 냉장고가 아니 듯, 우리가 정신의 태반 속에 정리해 있는 동안은 아직 온전한 인간이 아닐 것. 헤르만 헤세의 껍질을 깨고 날아오르는 새 이야기는 다른 게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어떤 진행형의 의지를 가질 때 비로소 고귀해진다는 의미일 테지. 나 는 가령 인간이 비록 온전한 인간으로서 거듭날 수 없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대상이 되거나 그 대상을 오롯이 담는 상자가 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순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택하는 과정으로서의 동사적 개념이 곧 인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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