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창의 숨결, 시간의 울림』, 민병일, 나남출판, 2021

그루 터기 2022. 3. 20. 05:18

창의 숨결, 시간의 울림, 민병일, 나남출판, 2021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1 문학나눔 선정 도서이다. 양장본. 항상 부담이 되는 책이 양장본이다. 내용부터가 부담이 될 것 같은 느낌. 책을 편다. 프롤로그부터 긴장이 된다. 이 책을 처음 들었을 때는 창을 통해서 내다본 풍경에 대한 글들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창의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 글이었다. 가끔 오래된 절이나 한옥을 찾았을 때 창의 아름다움에 잠깐씩 걸음을 멈춘 적이 있었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난 그저 아름답구나 정도로만 느끼고 지나게 되었다. 오늘 이 책에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창을 보는 새로운 눈을. 한 번에 이해할 수 없는 쉽지 않은 글 속에서 보석하나라도 건지려고 노력해 본다.

 

 

 

저자 소개

민병일

서울 경복궁 옆 체부동에서 태어나 서촌에서 자랐다. 남독일의 로텐부르크 괴테 인스티투트를 거쳐 북독일의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 시각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같은 학과에서 학위를 받았다. 홍익대 미술대학, 교양학부, 대학원에서 겸임교수로 대중예술론과 미디어아트론 등을 강의했으며, 동덕여대 미술대학, 대학원에서 겸임교수로 현대미술 등을 강의했다.

시인으로 등단해 두 권의 시집과 두 권의 산문집, 한 권의 사진집과 한 권의 번역서를 펴냈다. 소설가 박완서와 함께 티베트를 여행할 때 우연히 사진을 찍은 것을 계기로 티베트 여행기모독(박완서 글, 민병일 사진)을 냈고, 독일 노르트 아르트 국제예술제에서 사진이 당선되었고,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 시에서 초청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에서 한국의 아름다운 책100’ 선정위원장 일을 했다.

산문집창에는 황야의 이리가 산다로 제 7회 전숙희 문학상(2017)을 수상했고, 모든 세대를 위한 메르헨바오밥나무와 방랑자(2020)를 냈다.

 

 

독서 메모

 

이 책은 온전히 우리 땅 흙냄새가 나는 창들로 채웠습니다. 장이 서는 곳이면 얼쩡거리는 장돌뱅이처럼 제주까지 창이 있는 곳을 찾아다녔지만 미적인 창은 잘 보이지 않았고, 창은 많았지만, 창에는 창이 없었습니다. 달빛 은연히 비치는 창과 별이 빛나는 창, 은하수가 흐르거나 안개에 싸여 묵상 중인 창도 보고 싶었지만 사라져 가는 풍경 속에 흩어지고 여의치 않은 시간 속에 잠겨버렸습니다. 하지만 제 몸에는 밖을 내다볼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창이 생겨났고 제 영혼에는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창은 세상을 바라보는 통로이면서 불협화음의 세계를 내면화하여 정신을 반응하게 하는 미적인 명상 공간입니다. 당신은 어떤 창을 꿈꾸는지요?

 

"이것은 배추 밭이 아니다. 어찌 된 일인지 밭에는 일렬종대로 선 배추들이 흰 눈을 흠뻑 맞은 채 얼어있었다. 밭 전체가 그랬다. 눈밭에 얼어붙은 배추들은 낯선 장엄함을 보여준다. 마치 진시황릉 병마용에 도열한 흙으로 빚은 병사들 같다. 금방이라도 흙먼지를 털고 깨어날 것 같은 무덤 속 용사들처럼 눈송이를 털고 싱싱한 얼굴로 환생할 것 같은 배추밭 풍경. 그러나 '이것은 배추밭이 아니다.' 우리에게 친숙하기 짝이 없는 배추밭이 낯설어 보였다. 낯섦은 일상적인 친숙함을 전복적인 관계로 발전시킨다. 우리에게 친숙한 일상적 사물이 유희적이고 전복적 사물로 바뀌는 데는 예술의 원리가 작동한다. 르네 마그리트 그림 이미지의 배반이 그렇다. 미셀 푸코의 말마따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 그림' 일뿐이다.

 

그림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Ceci n'est pas une pipe’라고 쓰여 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문장이다. 배추밭에서 얼은 채 로 눈을 뒤집어쓴 배추역시 그것은 배추가 아니라 그것은 배추라고 말하고 있는 문장이다. 배추밭 역시 그것은 배추밭이 아니다. 사진 속의 배추밭은 우리에게 박제되어버린 이미지, 혹은 이미지의 배반이 있을 뿐이다.

 

농부의 아내로 일생을 흙만 일군 할머니의 생애는 어디에 숨어있고, 할머니는 속절없이 흘러 가버린 시간만 증언하는 것일까. 몬드리안 역시 어느 순간 증발해버리듯 사라지는 것이 삶이고 예술이라고 여겼는지 노란 선들의 구성(1933)을 만들었다. 서로 대칭되는 선들이 사라진 공간은 절제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마치 노년의 뜰에 자리한 텅 빈 공간처럼 욕망이 순수화된 해맑은 얼굴 같은 마음을 형상화시켰다. 마름모꼴 캔버스 그려진 서로 다른 굵기의 선들은 묘한 균형미를 보이지만, 마름모꼴의 불안정성은 원초적으로 불안정 한 생의 단면을 노출하고, 노란 선 사이의 열린 공간은 밖으로 뻗어나가려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그린 것인지 모른다. 할머니의 삶이 그림 속의 빈 공간처럼 보인 건, 창으로 들이치는 눈부신 햇살 때문이었을까

 

1900년에 준공된 성공회 강화성당은 이 땅에 하옥으로 지어진 최초의 성당이다. 한옥 돌담 가에 패앨이 꽃 핀 유월 우연히 이곳을 찾았다. 우리 땅 어디든 한 꺼풀 벗겨보면 상흔 아니 새겨진 곳이 있으랴마는, 강화도 역시 역사의 더께를 긁어보면 비애가 서린 땅이다.

 

미사포를 걸어놓은 것 같은 저 창 안의 작은 책상엔 성모마라아상고 묵주, 양초, 책 몇 권이 놓여 있을 것이다 사제는 타인의 번민을 엮어 사라의 창을 만든다. 어깨에 짊어진 번민의 무게가 늘어날수록 마음속에는 희망의 창을 하나, , ,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사제의 창, 저 창을 통과한 번민 한줄기마다 자유롭게 비상하는 빛의 길이 날 것 같았다. 독일어 표현인 리히(Lichtung)퉁은 사전적으로 밝게 하기라 뜻이지만, 하이데거는 진리를 리히퉁이라 했다. 사제의 창을 통과한 번민은 우리를 리히퉁으로 자유롭게 빛내 줄 것만 같다. 그러나 세계와 생이 끊임없이 순환되고 변호되듯, 그 리히퉁마저도 진리는 비 진리다.!”

 

세월의 풍상을 못 이긴 문짝은 나무 무늬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 늙은 여인의 정 깊은 몸뚱이 같다. 창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보았다. 청산이다! 산은 품은 창은 산의 겉모습이 아니라 산의 안감을 보여 준다. 은유로서의 창은 인간과 사물의 내면을 비추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겨울이다. 사람들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겉모습을 본다고 여기지만, 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내면을 엿본다.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훔쳐본다는 것처럼 가슴 설레는 일이 또 있을까?

 

산을 품은 창에서 '아포리Aporie당혹'를 느꼈다. 아름다운 당혹이랄까! 그러나 수수께끼 같은 '아포리'는 지극히 철학적이고 미를 판단하는 형이상학이다. 기실 시골집 창의 이미지를 판단하는 미의 기준은 연민에서 나온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길가 하찮은 풍경 에 눈길 줄 수 있는 연민,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과 풍경 속에서 정겨움과 쓸쓸함을 느낄 수 있는 연민. 따뜻한 허무가 무장무장 쌓이는 창의 연민. 거울에 비친 사물 같은 창속의 산을 본다. 유리창을 보면 얼굴이 산에 겹쳐져 내 몸 안에 산이 들어있는 것 같다.

 

회화란 화가가 자신의 내면에서 가시화되어지는 어떤 찰나를 포착하여 캔버스에 남긴 영감의 흔적이다. 그것은 예술가의 내적 사유가 외부의 푸른 공기와 처음 맞닿아 일으키는 강렬한 스파크이다

 

춘천가는 길, 북한 강변 설경을 헤매다가 사람의 온기 사라진 빈집을 보았다. 북한강의 겨울 해거름은 미투리 끝처럼 짧고 뭉툭해서 금방이라도 땅거미가 내릴 것 같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은 상처 입은 시간을 증언한다. 주저 않을 것 같은 창틀, 바람에 펄럭이는 도배지, 무너진 헛간, 불쏘시개로 타다 남은 공책 몇 권 .

 

저것은 창이 아니라, 나의 영혼을 찌르는 창이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punctum'은 라틴어로 ''을 뜻하는데 이 단어는 뾰족한 도구에 의한 낙인을 가리킨다. 지붕에 난 구멍이 창문처럼 찍힌 사진의 인화지는 무수한 망점의 집결체이며, 미세한 망점들은 모자이크 조각처럼 하나의 형상을 꿈꾼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 행복한 눈물에 표현 된 인쇄 망점 dot처럼, 사진의 촘촘한 점은 선을 이루고 선은 다시 평면 위에 사물의 윤곽을 드러낸다. 사진 속의 밀도 깊은 망점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것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실체이고 감흥 덩어리이다. 사진 속 허물어져가는 집의 상처가, 지붕에 난 창문 같은 집의 상처가, 내 안에 숨겨둔 창문 같다. 세월과 사람들에게 상처받으며 바깥을 동경하는 나의 작 은 창! 사진 속창의 푼크툼은 나를 찌르는 아름다운 창이다.

 

 

유리창에 핀 꽃을 찾아 창속으로 들어가면 어디쯤에선가, 우리가 잃어버린 낯선 시간들과 황야를 방황하는 하얀 이리 한 마리, 몽당연필, 파란 바람 한줄기, 그리고 르네마그리트의 그림을 만날 것만 같다. 현실과 이데아 사이의 경계에서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신비한 분위기를 비친 헤겔의 휴일이나,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준 빈집 유리창의 꽃, 어쩌면 그것들은 우리가 잊고 살았던 영원불변한 실재의 메타포라는 생각이 든다.

 

나무의 창은 꽃이고, 창의 꽃은 마음이다. 나무는 꽃을 피워 거룩한 고뇌에 눈 뜨고, 창은 마음의 우주를 품는다. 창이야말로 인간의 영혼에 피어난 꽃이다. 창을 통해 꿈꾸는 세계는 이성의 논리를 넘어서는 이미지의 세계이다.

 

상원사에는 적멸보궁이 있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기에 법당 안에 불상을 모시지 않은 채 단만 있고 공간은 텅 비어 있는 적멸보궁. 나무들도 가벼워지기 위하여 자신의 생을 뒤덮었던 잎을 떨어뜨리기 시작한다.

 

깨진 창문 안의 글씨가 파편처럼 눈에 박혔다. "연탄 41"이라고 흰 벽에 삐뚤빼뚤하게 쓴 검은 색 타이포그래피였다. 연탄집 아저씨가 연탄배달을 위해 써놓은 것일까. 동네 어딘가에 있던 그 많던 연탄 가게는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어느 순간,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 버린 연탄가게 흔적이 신기루 같았다. 주인 잃은 글씨에서 밥 냄새가 났다. 연탄 화덕 냄비에서 뜸들이던 구수한 쌀밥 냄새였다. 구공탄 위에는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석쇠 위에서는 약간 탄 냄새를 풍기며 꽁치가 익고 있었다. 연탄 가게에 저녁 밥상이 차려졌다. '연탄 41'이란 글씨에서 밥상 앞에 둘러앉은 식구들을 보았다. 삶을 스캐닝 한 타이포그래피는 실제 풍경이 아니지만, 저녁 무렵 연탄 집 모습을 실제처럼 보여주었다. 감성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타이포그래피는 풍경과 대상이미지로 묘사한다. 연탄과 냄비 사이에서 발갛게 달구어진 별표 모양의 삼발이도, 연탄가게 아저씨가 목에 두른 쉰 내나던 흰 수건 도, 골목길을 누비던 연탄 지게와 지게 작대기도, 봉인된 저 활자 속에 갇혀있다. 연탄가게 아저씨 몸속에는 검은 탄가루가 쌓여갔다. 연탄장수 손톱 밑에 끼어있는 검은 때는 막 물들인 봉숭아 꽃물처럼 가실 줄 몰랐다 눈 내리는 겨울밤, 새끼줄 끝에 매달린 까만 연탄 한 장과 봉지쌀을 가슴에 안고 걸어가는 날품팔이 가장도 보였다.

 

봄 햇빛은 튀어 오르는 공처럼 탄력이 좋다. 겨울잠을 자는 듯한 잿빛 햇살과 달리 봄볕에선 날갯짓이 느껴진다. 도산서원 창으로 온화한 빛이 새어들고 있다. 어두컴컴한 공간으로 은밀히 들이치는 광선은 햇빛 실타래에서 빛이 풀어져 나온 것처럼 아름답다. 태양이라는 거대한 빛 타래에서 풀린 빛살 무늬가 창호지를 수놓고 있다. 빛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사물에 닿은 빛은 보는 이를 빛의 사색자로 만든다.

 

 

도산서원의 방에 난 작은 창. 선비들은 저 작은 창을 통해 세계를 사유했다. 창 안은 유고 이데롤로기가 지배하는 거대한 우주였고 담장 너머는 밥이 지배하는 광막한 우주였다. 창 안은 성이학적 질서에 의해 담장 밖은 밥벌이의 구조에 의해 굴러갔다. 창 안에 사는 사람들이 공맹의 왕도정치를 따랐다면 담장 너머 사는 무지렁이들은 철저하게 밥의 존재론을 따랐다. 담장 안과 밖 사람들은 모두 생로병사에 시달렸다 창밖 연초록 물 오른 나무를 바라보면 선비들은 어떤 생각에 잠겼을까? 봄은 왔지만 봄은 아니다.

 

빈집에는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공을 떨어뜨리면 바닥에 부딪혀 튀어 오르려는 탄력대신, 공간을 떠도는 기억의 환각만이 존재한다. 빈집은 사물의 무중력 지대이다. 사람이나 사물의 그 무엇이, 탄력 있게 튀어 오르는 공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람의 호흡이 튀어 오르고, 나의 웃음이 너에게 튀어 오르고, 왕겨 때느라 풍구질 하는 어머니 눈가에 메케한 연기 튀어 오르고, 아버지가 장작 패는 소리 튀어 오르고, 식구들 온기에 아카시아 향 튀어 오르고, 양은냄비 속 비빔밥 먹느라 바닥 긁는 소리 튀어 오르고, 김치찌개 뜨는 식구들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 튀어 오르던 소리 의 화음, 창의 기억! 사람 사는 집에는 식구들 간의, 식구와 사물 간의 만유인력이 존재한다.

 

여행길에 본 모든 창들은 집의수정체 같은 투명한 눈이며, 길 위의 서사이고, 하나의 세계이다 저 집의, 검게 그을린 창은 우리 생의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우주의 차선 별 파란 땅을 여행하는 발걸음마다. “내 여정의 행적마다”, 이 길은 속세를 벗어난 의미 갖기도 하고, 몽상을 꿈꾸게 한 여러 겹의 또 다른 속세. 지구 중력을 벗어나 광대한 적막을 꿈꾸는 나는, 창의, 초현실적 상상에 빠진다.

 

다시 허물어진 창 앞에 섰다. 프레임 속의 풍경은 익숙한 듯 낯설고, 낯선 듯 익숙하지만 가슴 한쪽이 저려왔다. 무엇인가를 그리워한다는 은 한쪽이 저려오는 것 같다.

 

1799년 쉰두 살의 고야가 에칭기법으로 남긴 80컷의 카프리초스판화들은 인간 삶의 방식과 부조리, 관습이 된 악습,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풍자한다. 작품들마다 제목 밑에는 고야가 직접 짧은 글을 달았다. 그림들은 한결같이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인간 군상의 적나라한 모습과 시대의 허위를 풍자하는 내용들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에칭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수가 짙게 깔려 있다. 귀머거리가 된 고야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인간 본성에 천착했기 때문일까?

 

바람과 별과 흰 달빛, 산벚나무만이 반추하는 빈집의 무덤 같은 시간이 펼쳐지고 있다. 인적 묘연한 빈집 앞에 선 산벚나무 한 그루, 집의 화신 같다. 곧 사라질 봄의 정경 앞에 밖에 나갔던 마음이 몸에 들어와 혼불을 밝힌다. 내가 본 것은 모두 허무의 그림자이다. 나무의 창으로 엿본 꽃잎의 붉은 심장이 그랬다. 나무의 그늘이 된 집의 흔적 또한 그러하며, 삶의 흔적을 예술에 새긴 보딜리아니의 그림 속 여자들 모두가 그랬다. 삶과 예술, 나무와 꽃 모두 그림자의 허무한 이야기 같은, 허무의 그림자이다.

 

정자를 나서기 전 열어 두었던 창문을 다시 닫고 나오는데, 창호지에 비친 햇살 한 조각이 모노크롬 미술같이 보였다. 캔버스가 된 창문의 한지에 햇살이 무수한 선을 긋고 있었다. 보이면서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서 보이는 무위의 선, 순간, 무아로 변주되는 무위의 무진장한 선에서 그늘의 따스함을 보았다. 찰나의 미에 비친 햇빛이 벽 속으로 들어갔다. 벽의 그늘에 갇힌 사람들은 벽의 기호가 되어 말이 없다. 선비들이 지은 정자에는 선비들이 없다.

 

해 저무는 갈대밭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사람 키보다 큰 갈대숲에 땅거미가 내렸다. 늦가을 바람이 불 때마다 갈대는 서걱대며 울고, 어둠이 짙어 가는 공포 속에 저 석양빛을 담았다. 그리고 화포에서의 일몰 사진을 끝으로 십여 년간 갈대밭과 화포를 볼 수 없었다. 그리운 풍경은 동경하는 자의 발걸음 따라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