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숲속 책방 천일야화』, 백창화, 남해의 봄날, 2021

그루 터기 2022. 3. 18. 05:30

숲속 책방 천일야화, 백창화, 남해의 봄날, 2021

 

작은 책방, 어린 적 다니던 시골의 책방, 이젠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다. 요즈음 K, Y, U, A 서점 같은 대규모 서점이나 인터넷서점으로 인하여 시골이나 골목의 작은 책방이 점점 자취를 감추는 추세이다. 애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독산동에서 거의 매주 애들과 함께 집앞 시장통의 작은 책방에 다닌 일이 문득 생각난다. 그 땐 대부분의 동네마다 작은 책방들이 있었다.

일 년간 읽은 책 중에 서너 권 정도의 시골 책방에 관한 책을 읽었다. 그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지만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에 관한 문제는 막연한 기대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시골 작은 책방이 없어지는 이유는 물어볼 것 없이 책방의 수입으로는 생활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숲속의 작은책방은 작은 지표가 될 것이다. 요즈음 특성화 고교라는 이름의 학교들이 있다. 과거의 농고, 공고, 상고와 같은 학교의 이름은 바꾼 것이지만 시대에 따른 변신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책방도 이런 시스템을 본받아 특성화 책방이 될 수 있다면 존재의 가치가 확실해지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숲속의 작은 책방의 북스테이나 작가초청 행사와 작가가 상주하는 서점 등 각종 행사들은 존립을 위한 처절한 몸짓이기도 한 희망의 불씨라 생각한다.

이런 와중에 코로나19숲속작은책방에도 큰 타격을 줬단다. 책방 수입의 대부분이 도시에서 오는 단체 방문이나. 근처 시골학교 학생들의 서점나들이, 그리고 일 년 내내 이어지는 북스테이인데 이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았다고 한다. 다시 생각해도 안타까운 일이다. 코로나 펜데믹이 서서히 탈출구가 보이는 듯하다. 빠른 기간 내에 일상이 이어지고, ‘숲속작은책방도 오래오래 그 자리에서 역할을 기대해 본다.

 

이 책의 앞부분은 숲속의 작은 책방에 대한 이야기가 뒤편에는 작가의 인생 책들과 추천하는 책들이 소개되어 있다. 하나 같이 다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다. 내 취향과 딱 맞아 떨어지는 책들은 많지 않지만 다양한 책을 읽어보리라 생각하는 나는 하나하나 책들의 이름을 메모하고 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는지 확인을 준비중이다.

 

 

저자 소개

백창화

책 읽느라 밥때 놓치고 밤새는 줄 모르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도서관에서 위안을 얻으며 청소년기를 지나왔다. 잡지 기자로 활동하다 아이를 키우며 어린이책에 눈을 떠, 2001년 가정문고를 열었다. 이후 일산과 마포 성미산에서 숲속작은도서관10년 동안 운영하며 작은 도서관 활동가로 일했다. 첫 책 유럽의 아날로그 책공간을 쓴 후, 충북 괴산으로 이주하여 가정식 서점이자 북스테이 숲속작은책방을 열었다. 2015년에 쓴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는 전국 골목골목 책방 열풍을 일으킨 최고의 화제작으로 주목을 받았다. 작은 도서관과 작은 책방 문화를 일구기 위해 사람들과 손잡고 연대하며 보낸 20, 그 길에서 만난 이들과 영감을 준 책 이야기를 숲속책방 천일야화에 풀어놓았다.

cafe.daum.net/supsokiz

 

 

독서 메모

 

"책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책이 세상을 더 살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받은 날, 힘없이 계단을 올라가 다락방 청소를 하던 나는 손님들이 남기고 간 책방 노트에서 이 글을 만났다. "상처받은 내게 작은 위로가 되어 줘서 고마워."

 

책을 읽고 사람들을 읽고 마음을 읽고 세상을 읽었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었어도 육체는 서글프다'는 시인의 말처럼 어쩌면 책이란 읽을수록 생에 서러움을 더해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읽지 라도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읽은 책들이 숲속작은책방서가에 쌓였다.

 

내 단잠을 방해하는 방문객들이 잠깐 성가시게 느껴지지만, 모쪼록 냥이 세상에선 '일하지 않는 냥, 먹지도 말라'는 오래된 속담이 전해 내려오는바 몸을 일으켜 부르르 떨어 봅니다. 앞으로 뒤로 몸을 길게 뻗어 쭉쭉 스트레칭도 한 번 하고요. 그리곤 자세를 바로 합니다. 오후 1, 이제 책방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할 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이 시골 책방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존재, 영업이사를 맡고 있는 '나비'입니다, 냐옹.

 

내 순찰 영역인 마을을 한 바퀴 다 돌아봐야 책 읽는 목소리 한 번 듣기 어려운 이 시골에 책을 파는 서점이라니, 말이 되냐고요. 한심한 집사들을 대체 어찌하나 걱정이었습니다. 그렇잖아요? 집사의 벌이는 그대로 아옹이 삶의 질과 비례하는데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잖아요. 귀찮지만 어쩔 수 없이 나도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고양이 손을 빌면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지 세상 사람들에게 한번 보여 주고 싶은 욕망도 있었고요.

 

다음 날 아침 마당 정자에 일명 그물침대, 해먹을 걸고 누워 흔들거리며 쉬는 조카를 보았다. 눈이 부셨다. 이모의 탐심에 조카는 결국 해먹을 그대로 둔 채 돌아갔고, 난 단 한 번도 치우지 않았다. 이토록 편안하고 사랑스러운 정원의 소품이라니.

해먹 위에서 내가 가장 많이 읽는 책은 바로 시집이다. 사가 긴 책은 도무지 읽어 낼 수가 없다. 여기서 5분만 책을 읽으면 곧바로 스르르 잠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구름과 기분 좋게 머리칼을 날리는 실바람, 옆에서 속삭이는 새들의 노래까지, 이곳에는 부족함이란 없다. 더욱이 손, 혹은 발 닿는 거리에 책방 고양이 두 마리까지 함께 누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다. 이런 만족스러움을 만끽하기 위한 허영심으로 나는 시를 읽는다. 누워서 읽는다. 소리 내어 읽는다. 읽던 시집을 배위에 얌전히 내려놓고 방금 읽은 시를 왼다. 외워 본다.

 

말린 고사리 한 뭉치, 누군가에겐 하잘 것 없이 가벼운 것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겨우내 얼어 있던 땅을 뚫고 나온 봄의 소식이며 빛의 시간을 온전히 견뎌낸 보람이 아니던가. 그렇게 내게로 와서 살이 되고 피가 된 말린 고사리 한 뭉치. 가슴이 뭉클했다.

 

왜 책방에 이 책이 없는 거냐고, ! 작은 책방은 당신이 찾는 바로 그 책만 없는 곳이라지만 이건 최악이 아닌가. 메모지에 필요한 책을 한가득 적어 오셨지만 역시 단 한 권의 책도 없는 이 망할 놈의 작은 책방

 

농촌 지역에는 서점이 별로 없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의 분석에 따르면 전국 기초지방자치단체 중 서점이 한 군데도 없는 서점 소멸 지역이 2019년 기준으로 5(인천 옹진군, 전남 신안군, 경북영양군, 울릉군, 경남 의령군), 서점이 단 한 곳뿐인 서점 소멸 예정 지역'도 총 44곳이나 된다. (지역서점 현황조사 및 진흥정책연구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9.12). 내가 살고 있는 괴산군도 그중에 속해 있다.

 

돈을 모아 어떤 선물을 했어도 좋았겠지만 은퇴 후 여유 있는 시간, 그 첫걸음을 책과 함께할 수 있게 해 준 동료들의 배려가 얼마나 따뜻한가. 선생님은 동료들의 이런 마음을 받아 들고 기뻐하며 기념으로 책방지기에게 첫 책을 골라 달라고 하셨다. 주저 없이 나는 세 권으로 된 두툼한 책을 집어 건넸다. 책방지기 인생에 아주 소중한 감동을 전해 주었던 책, <나는 걷는다.>였다. 프랑스 저널리스트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은퇴 후 심한 우울증에 사로잡힌다. 아내와도 사별했고 이제는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자괴감에 시달린다. 삶의 우울을 걷어 내기 위해 그가 선택한 건 실크로드 횡단의 여정이었다. 예순 두 살 나이에 이스탄불에서 시안까지 12000킬로미터를 두 발로만 걸어서 완주했던 4년간의 기록이 책 세 권으로 묶였다. 처음 책을 발견했을 때는 선뜻 읽기 시작하기가 어려웠다. 한 권이 무려 500쪽이나 되는 두꺼운 책. 게다가 여행기라고 하면 아름다운 정경들을 사진이나 이미지로 담기 마련이라 대개 글 반 사진 반인데, 이 책은 사진이나 그림이 한 장도 없고 글만 빽빽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뒤 어떤 여행기도 나를 감동하게 만들지 못했다.

 

인생 2막을 기약하는 이들에게 나는 언제나 이 책을 골라준다. 과거를 묻고 새 삶을 시작하고픈 이들, 쉼 없이 달리는 것으로 존재감을 확인하다 문득 멈춰 서게 된 퇴직자들, 그들에게 나는 새로운 시작을 이 책과 함께 하라고 권한다. 책은 때로 직접 하지 못하는 것들을 대신해 주는 고마운 조력자다. 저자는 60세가 넘어 실크로드를 걸었지만, 아직 그 나이에 미치지 못한 나는 절대 실크로드를 걷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대신 세 권의 책을 통해 나만의 실크로드를 걷는다. 어쩌면 야비한 방법이지만 독서란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은퇴한 선생님이 이 책을 읽고 당장 배낭을 꾸린다고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독서란 또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세 권의 책을 통해 나만의 실크드를 걷는다. 어쩌면 야비한 방법이지만 독서란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은퇴한 선생님이 이 책을 읽고 당장 배낭을 꾸린다고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독서란 또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괴산에 와서 살아가며 가장 소중한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숲속작은책방이요'라고 대답해 왔는데 소중한 이유가 또 하나 더해졌다. 책방에 와서 내 인생 책을 찾았다고 하는 아이,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을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아이, 이렇게 저렇게 아이들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려 준 책방에서의 하룻밤이 너무나 소중하다." 얼마 전 학교 북클럽 어린이들과 책방에서 북스테이를 하고 간 초등학교 선생님이 남겨 주신 글이다.

 

책은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반려견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함께 사는 내내 기쁨이었던 반려견이 수명을 다해 점차 생명이 꺼져 가는 과정이 동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늙어가는 내 엄마에 관한 이야기처럼도 읽힌다. 어느새 책을 읽어 가는 친구의 목이 메고, 곁에서 낭독을 듣고 있던 친구가 갑자기 폭풍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떠나보낸 반려견, 그리고 아직 곁에 남아 점점 늙어 가고 있는 또 다른 식구 생각에 왈칵 울음이 터져 버린 것이다. 눈물은 전염이라 책을 읽고, 또 들으며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함께 울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함께 앉아 펑펑 울었다. 다 큰 어른들이 그림책을 읽으며 같이 운다는 것, 그래도 흉이 되지 않는 공간, 말로 미처 하지 못했던 내 안의 감정들이 무언가에 공명해 밖으로 터져 나오고, 그 감정은 다시 옆 사람에게 전이되고, 그래서 다 함께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이런 일련의 과정이 책방에서는 자주 일어난다.

 

우리 세대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내게 첫사랑 같은 설렘을 안겨 주었던 세계 명작들이 있다. <빨강머리 앤, 키다리 아저씨>, <소공녀>, 작은 아씨들> 같은 추억의 명작들. 책 속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냈고 그러나 시련의 끝에는 해피엔딩이 있었다. 그들처럼 가난이 보편이던 시절, 어려웠던 우리들은 앤과 주디와 세라, 조와 자매들을 통해 힘든 일상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다.

 

"시련을 즐기지 말라. 시련은 흔히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고 하지만 시련은 사람을 깎아내리고 거칠게 하고 고통을 남길 뿐. 애써 시련을 거둘 필요는 없다. 나는 네가 시련 없는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불안정한 젊음과 해답 없는 미완의 청춘으로 방황과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던 내게 이 말은 추운 겨울 아침, 눈앞에서 쟁하고 부서지는 햇빛마냥 명징한 언어로 다가왔다.

 

그럴 때는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생각한다. 내가 가장 많이 울면서 읽었던 책. 꼬마 제제의 아픔이 그토록 처절하게 다가올 수가 없었다. 제제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내 머릿속에 항상 질문으로 남아 있던 그 삶을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다시 만났다. 시리즈의 2부인 햇빛사냥), 3부인 (광란자)가출간된 것을 알았다. 짧은 유년기 이후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제제의 청년기가 가슴 아팠다. 그리고 도서관 관장이 되어 다시 읽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나를 제제보다 뽀르뚜가 아저씨에 감정 이입하게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어른인가를 고민하게 했다.

 

이렇게 긴 시간을 살고서도 여전히 수많은 제제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한다. 때론 아이들의 눈물이 귀찮고, 상처가 거슬리기도 한다. 할머니란, 모든 것을 보듬어 주는 따뜻한 존재가 아니라 실은 괴팍하고 까탈스럽고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걸 나를 통해 확인하는 순간 책 속 의 삶과 책 밖의 현실이 괴리된다. 아아. 나의 현실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시인은 이곳에 와서 문득 자신의 꿈을 그려 보았나 보다. 조용한 책방에서 사람들을 기다리는 삶, 조금은 외롭지만 충족스러운 시인의 삶.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 어쩌면 우리는 그 고적한 시인의 책방을 찾아 길을 나서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한다. 한 사람의 꿈이 다른 누군가의 꿈으로, 나의 삶이 어느 낯선 타인의 삶으로, 이렇게 마음은 돌고 돌아 긴 인연의 끈으로 지구를 휘감고 그래서 세상은 아직 조금 더 살아볼 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큰 도시에서만 살다가 시골로 이사 와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러 일을 겪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처음엔 정말 잘하고 싶었다. 그러나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고 관계가 틀어진 자리에 한숨과 한탄이 남았다. 되돌아갈 수 없기에 마음을 다잡고 남과 관계없는 나의 삶을 살기로 했다. 묵묵히 집과 정원을 돌보고 마음밭을 가꾸다 보니 척박한 돌밭이 윤택해졌고 상처가 퇴비가 된 자리엔 예쁜 꽃이 피었다. 비로소 삶을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고 조급해하지 않는 법을 배우니 시골살이가 살 만해졌다.

 

완벽하진 못해도 끊임없는 자아성찰과 성장, 다양한 단계의 시선을 읽어낼 줄 아는 인격적 성숙 그것이 책의 팬으로서 보답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답례가 아닐까.

도서관과 서점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지점이다. 도서관 견학과 나들이는 중요한 교육이다. 공공도서관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고, 도서관과 밀착된 삶이 어떻게 일상을 바꿀 수 있는지를 배우며, 도서관을 통해 진정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법을 배우게 한다. 서점은 나의 취향을 결정짓는 장소다. 도서관에서는 작은 호기심으로도 책을 빌려볼 수 있지만, 내 지갑을 열어야 하는 곳에서는 좀 더 강력한 욕구가 필요하다. 잘못된 선택은 후회를 불러오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내가 돈을 들여서라도 얻고 싶은 무엇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이 내 정체성이 될 수도 있고, 취향이며, 지향 점이며, 나아가 나의 삶의 토대가 된다. 직접 사서 꽂아 놓은 책들로 가득한 나만의 서가를 보며 내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게 되는 것이다. 서점이란 그런 곳이다.

 

마음은 먼 미래를 바라보며 꿈을 꾸지만, 현실은 오늘도 하루하루 그림을 그리는 대신 노동을 해야 먹고살 수 있는 차가운 겨울이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면 공모전에 출품할 작품을 그릴 시간이 없고, 당장 먹고살기 위해 아르바이트만 하다보면 꿈꾸던 작가가 될 날이 참으로 요원하다.

 

현행 도서정가제의 최대 문제점은 불공정 경쟁이라는 점이다. 책은 그 성격상 어디에서 팔든 똑같은 상품일 수밖에 없다. 이런 똑같은 상품을 동네책방에서는 정가로 파는데 온라인 서점에서는 일단 10퍼센트 할인은 기본이며, 온갖 특혜와 화려한 사은품까지 선물로 받을 수 있다면 어떤 소비자가 동네책방에서 책을 사겠나.

 

학교 선생님들이 방문할 때마다 이런 설명을 구구하게다. 지역에 서점 하나가 살아 있는 것이 지역 문화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작은 책방에서 할인하지 말고 책을 구매해라고 여러 번 얘기했다. 시골에 있는 작은 책방을 사랑하고. 우리를 응원하는 몇몇 학교와 교사들은 이런 호소에 귀를 기울여주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말 일부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도교육청 장학사를 비롯해 괴산뿐 아니라 충북 지역 많은 학교와 교사들이 책방에 견학 혹은 연수라는 이름으로 단체 방문했다. 이 공간이 정말 좋다며 가족과 꼭 다시 오고 싶다고 이야기하지만, 돌아가서 우리 책방에 공식적으로 책을 주문하는 곳은 많지 않다. 개인의 응원이 시스템을 움직여 실제 협업과 지원으로 돌아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도 죽 이렇게 나쁜 사람이 될 것이다. 사람이 하는 수고와 노력을 감사하게 여기지 않는 이들, 자신과 일하는 상대방을 협업의 파트너로서가 아니라 비용을 지불하고 재화를 지불받는 갑과 을의 관계로만 여기는 이들, 인구도 적고 상권도 형성되지 않는 농촌 지역에 귀촌해 작은 서점 하나를 꿈처럼 가꾸는 이를 장사꾼으로만 보는 이들에게 내 노력과 수고를 바지지는 않을 것이다. (박수를 보낸다. 좋은 책 목록을 고르는 것은 고급인력의 노동의 대가인데 무료로 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책 말고도 이런 갑질이 많다. 반드시 고쳐야 하는 것들이다. 바로 무료 견적도 여기에 포함된다.)

 

신일숙 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1986년부터 무려 10년에 걸쳐 장기 연재하며 한국 순정만화 시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작품이다. 최근에는 북펀딩에서 12000만 원을 넘는 사상 최대 모금 기록을 남기면서 레트로판 20권 전집이 복간되었다. 20년 세월을 가뿐히 뛰어넘어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순정만화의 전설이 되었고, 이 만화를 읽었던 소녀들이 엄마가 되어 다시 딸과 함께 읽겠다고 펀딩에 힘을 보탠 것이다. 또한 잊지 못할 불후의 명언을 낳은 작품이 아니던가. '인생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다.',복잡다단한 우리들의 운명과 삶을 한마디로 정리해버린 그 작품 앞에 나는 고개를 숙인다.

 

만화로 우리 사회 내면을 들여다본 묵직한 작품 중에 발군은 윤태호의 <미생>이다. 2012년부터 다음 웹툰 플랫폼에 연재를 했던 이 작품은 새 회차가 나올 때마다 눈이 발개지도록 울며 봤던 작품이다. 작가가 그린 만화는 북받치는 감정을 애써 눌러가며 읽었으나 독자들이 올린 댓글을 보다가 끝내 눈물이 터져 버린 경험은 나만의 것이 아닐 테다. 바로 이게 웹툰이 가진 힘이라는 걸 느꼈다. 만화가 올라오면 순식간에 수백, 수천의 댓글이 주르르 달리는데, 댓글을 읽으면서 공감의 폭과 깊이가 달라진다. 본문 내용은 물론이지만 댓글 사연을 읽으며 눈물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시리즈 만화로는 드물게 <미생>은 책방에서 오랫동안 판매했는데 아이가 성장해 청년이 되면 꼭 이 만화를 선물할 것이라고 말하며 전집을 사간 젊은 아빠가 기억에 남는다. 책은 그렇게 세대를 이어주는 위대한 유산이다.

 

네 편을 관통하는 이야기는 한결같다. 개와 고양이를 내세웠지만 실상 그것은 가난한 인간들의 이야기며 상처와 고통에 관한이야기다. 책 속에서 개와 고양이를 버리고 학대하는 사람들 역시 이 사회의 가장 취약지대에서 하루하루 생존을 근심해야 하는 약자다. 교과서는 약자끼리 힘을 합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현실에서 약자들은 생존 앞에 비루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인간은 생존이라는 절대 과제 앞에 으르렁대는 야수와 다를 바 없고 따라서 김중미 작가의 동화 속에서 개와 고양이와 인간은 서로 종만 다를 뿐, 벼랑 앞에 내몰린 삶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과거 동화 속에는 인간과 동물의 우정과 모험을 그리는 미담형 캐릭터가 많았다면 최근에는 사회 고발형 캐릭터가 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선악이 분명하고 메시지가 뚜렷한 서사는 질문하고 고민해야 하는 문학의 본질과 달리 하나의 답을 향해 달리는 교훈적 감동으로 끝맺기 쉽다.

 

누군가의 빈 집에는 개 한 마리가 조용히 죽어 있다. 목줄만 풀었어도 다니면서 먹이를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이삼일이면 돌아올 거라 생각했던 주인의 다급한 걸음이 원망스럽다. 아니, 이런 지옥의 풍경을 만들어 낸 인간들의 탐욕과 문명이 무섭다. 이 모든 게 단지 바다 건너 일본의 일일 뿐이라고,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인간에 대해, 더불어 살아가는 동물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본다.

 

그 작물들을 멧돼지들이 일제히 수확하고 지나간 날, 흙빛처럼 어두운 얼굴로 결산을 보던 사장님 표정이 우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하회탈처럼 보기 좋게 구겨졌다. 한 해 동안 책방을 찾은 방문객 숫자는 형편없이 떨어졌는데 매출 손실액이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이다. 거듭 매출전표를 확인하는 우리는 이유를 알아냈다. 지경 이웃들의 힘이었다.

 

지역주민들은 도서관보다 좀 더 자유롭고 열린 분위기를 지향하는 서점이라는 공간에서 책을 매개로 문화를 만들어 간다. 나아가서는 지역의 사람과 공간이 점점이 연결되어 우리 지역의 생활문화 지도를 만들어 내고 지역 공동체가 회복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애정을 갖게 하는 것. 돈으로 결코 환산할 수 없는 만남과 소통과 향유의 가치로 바꿔 놓는 것. 그런 일들이 우리가 바이 로컬 캠페인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다.

 

좋아하는 책을 말해야 오늘 밤을 살아남을 수 있다면 나는 천 일 동안 쉼 없이 책의 이름을 대고는 기어이 살아남을 것이다. 그 가운데는 폭풍같이 휘몰아쳐 내 감정을 흩어 놓은 것도, 도끼처럼 내 생각을 쪼개 버린 것도, 읽을 때는 한없이 비밀스러웠으나 읽고 나선 미련 없이 던져 버린 것도 있을 테다. 그 천 권의 책을 한 줄로 세워 일일이 무게와 경중을 잰다면 어떨까?

 

도서관은 사후 세계이고, 한 사람이 읽은 모든 글이 보관된 낡은 캠핑카는 천국이다. 이 천국은 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몇 시간씩, 몇 주씩, 평생토록 책을 읽으며 갈망하는 것은 무엇일까? 오후의 완연한 햇살 아래 아늑한 의자에 앉아 아끼는 책을 영원히 읽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희생할 수 있겠는가?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나비와 공주, 책방 고양이 두 마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심야 산책을 하며 이 천 권의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게 외우고 또 외워 본다.

 

아이슬란드에서 작가는 대략 최고의 직업이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자기네 작가들을 무척 사랑한다. 이것은 일종의 자아도취다. 아이슬란드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작가 아니면 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때껏 읽어 왔던 많은 책의 이야기가 쌓이고 쌓이다가 중요한 어느 순간, 뒤통수를 탁 후려치는 책을 만나게 되는 것이리라. 이것은 마치 구름 속에 가려진 햇빛이 반짝 나왔을 때, 하필 그 순간 밤새 내린 빗물에 흙더미가 씻겨 내려 숨겨진 보석의 반짝거림을 만나는 것과 같은, 그런 운명적인 찰나와도 같으리라. 그렇게 그 책은 내 인생의 소중한 한 권이 되었지만, 사실 그 한 권의 뒤에는 수많은 독서의 체험이 깔려 있다.

 

각성의 토대 위에서 내가 살던 지역에 '작은 도서관을 시작했다. 책을 좋아하고 책이 결국 사람을, 사회를 변화시킬 거리는 믿음을 갖고 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P172

 

'나는 내 섬약한 손과 창백한 얼굴, 피투성이가 되어 진장을 굴러 보지 못한 내 인생이 부끄러웠다. <그리스인조르바> 나는 내가 부르짖던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했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취재하고 글을 썼을 뿐, 한 번도 치열하게 삶의 현장에 밀착되어 보지 못했던 내게 저 문장은 도끼가 되어 나를 내리쳤다.

아이들을 불러 모으고, 이웃 학부모들을 만나고, 경쟁과 공부만이 최상의 가치가 아니라 모두가 더불어 함께 갈 수 있는 세상의 토대를 지역 독서 공동체를 통해 만들어 보고자 했다. '숲속 작은 도서관'의 시작이었다. 그것이 지금 '숲속 작은 책방'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때로 한 권의 책은 사람의 삶을 바꾼다. 그 한 권을 만나고 싶어 오늘도 우리는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 서가 앞을 서성이고 또 서성인다.

 

'디아스포라'는 원래 이산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로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켰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본래 살던 땅을 떠나 거주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좀 더 폭넓게 사용한다.

 

재일동포 2세로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고 있는 저자 서경식은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그들의 삶과 생각을 전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경계인의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에 가서 실재하는 존재로서 그들을 마주 대하며 역사와 운명의 수레바퀴에 치인 개인의 삶, 그 처연함에 대하여 마음으로 느꼈다.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인간의 본능과 욕구는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하고 음모와 모략이 판치는 이전투구의 삶 속에서 살아남은 자가 이기는 것이라는 승자독식의 결과론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다.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는다고 하지만 그렇게 얻어 낸 교훈 역시 지금의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더욱 견고히 하는 데 쓰일 뿐이니 지식인의 독서가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 앞에서 나는 회의할 뿐이다.

 

오오, 이 책이야말로 '고전이란 읽어야 한다는 소문은 무성하지만 정작 끝까지 읽은 사람은 별로 없는 책이라는 정의에 딱 부합하는 그런 책이 아니던가. 학교 다닐 때부터 이 책에 대한 해설은 얼마나 많이 들었으며 인용된 구절만도 얼마인가 그러나 내겐 아무리 애를 써도 읽을 수 없던 책, 한 줄, 한 장도 주해가 없이는 넘어갈 수 없는 난공불락의 책, 문자를 보고 있어도 내용이 전혀 그려지지 않는 책. 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고 하소연을 늘어놓았더니 단테 신곡 강의라는 책을 권한다.

 

마침 텔레비전에서는 일타 강사가 이 책을 읽어 주고 있었다. 그래서 책방 북 클럽에서 이 책을 읽어 보기로 했다. 혼자 읽기 어려운 책, 도전하기 힘든 책은 독서 모임에서 함께 읽으면 좋다. 소화능력에 따라 분량을 조절하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조금씩 읽으면 되기 때문이다. 간혹 중간을 놓치더라도 대신 읽어 온 이들의 발제와 토론을 들으면 모임 뒤라도 책을 쉽게 읽을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전쟁 중에도 사랑을 하고, 폐허가 된 땅에서도 예술은 고통 속에 꽃을 피운다. 음악이 주는 힘은 놀랍고도 놀라워서 고통을 잊게 하고 상처를 아물게 하며 우리를 위로하고 달래는 치유의 능력이 생각보다 크다. 이 비관적인 어둠의 터널을 지나면서 음악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위로를 받았을까. 그 힘으로 또 하루를 버티고, 웃고, 힘을 내서 다시 내일을 살아간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어떤 이에게, 내가 좋아하는 음악가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그 하루는 코로나로 힘든 수개월을 살아남게 하는 힘이다.

 

"남은 인생 동안 만일 책을 읽는 것과 음악을 듣는 것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할 거예요?" 질문앞에서 멈칫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당연히, 일초도 고민하지 않고, 책을 읽겠다고 답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머뭇거렸다. 이젠 눈이 나빠져서 책이 잘 보이지도 않고, 정신이 흐려져서 그런지 책을 보면 자꾸 졸리고, 예전처럼 책을 읽고 깊은 감동에 빠지는 일도 점점 적어지고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책을 보며 살아야 할까?

 

덕질. 인터넷 어학사전을 찾아보면 어떤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여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일이라고 되어 있다. 덕질하는 사람을 덕후라고 하며 덕질이 나아가 직업으로까지 연결되면 덕업일치라고 한다. 나는 책에 탐닉하고, 책이 있는 공간을 찾아 여행하며 책과 관련된 것들을 수집하고 있으니 일찍이 덕후의 세계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한류가 꽃피고 연예인과 운동선수가 선망인 직업이 되면서 출판계에도 관련 책들이 쏟아진다.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는 시대에,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고 팬덤이 있는 그들이 책을 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아쉬운 건 그 가운데 좋아할 만한 책이 드물다는 것이다. 독자들에게 생각을 유도할 내용이 없는 책, 자기 생각이 들어 있지 않은 책, 그저 유명세에 영합해 가짜의 살을 보란 듯이 전시해 놓은 책, 진실하지 않은 책 그런 책을 내 서가에 꽂아 놓고 싶지 않다.

 

그것이 연주든 걷는 행위든 운동이든 혹은 독서든, 매일 아침 그것이 없이는 하루를 시작할 수 없는 그 위대한 일상의 힘이 내게는 있는가. 이것은 평생을 살아오면서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던 질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없기 때문에 오늘 나의 삶은 이다지도 초라한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서 경험한 세상은 그렇게 가볍게 치부하기에 너무 망가져 가고 있고, 인간이라는 종의 야만성이 충분히 그런 지옥을 불러올 만큼 교양을 압도하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렇게 어두운 디스토피아에서 여자의 삶은 더욱 혹독하다.

 

그 불편함을 참으며 끝까지 읽어 볼 것을 권한다. 불편한 것들은 내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 그 불편함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글은 읽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아름다운 글을 낭송하다 보면 아름다움이 눈앞에 잡힐 듯 선연하게 다가온다. 아름다운 글을 옮겨 적다 보면 아름다움이 내 안에 스며든다. 뜻을 몰라도, 이해하지 못해도 아름다운 것은 따라해 볼 만하다.

 

어린이책의 경우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스테디셀러의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이다. 어린이 책은, 주독자인 어린이가 직접 고르는 책이 아니라 어린이를 위해 어른이 대신 골라 주는 책이라는 점에 시장의 특징이 있다.

 

독서란 시대를 읽는 것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시대 그림의 흐름과 취향과 어린이들의 정서를 반영한 새로운 책을 많이 읽으면 좋겠다.

 

새 출판사에서 발굴하는 새로운 흐름의 책, 새 작가들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이야기, 과거보다는 미래가 보이는 이런 책을 읽으며 작가도 독자도 함께 성장하는 그림책 세상을 꿈꾼다.

 

그림책의 정의 중 최근에 가장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게 그림책은 '0세부터 100세까지 누구나 보는 책'이라는 표현이다. 원래 그림책은 어린이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림책을 보는 어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용정, 문학과 청춘이 영글었던 서울, 생의 마지막 순간이었던 교토와 후쿠오카를 차례차례 다니면서, 별처럼 멀리 있던 시인은 비로소 내 작은 책방서가 한편에 꽃으로 내려앉아 나와 함께 숨 쉰다. 그리고 나는 다짐한다. 잊지 않으리라. 그러나 과거에 머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리라. 새로운 길을 가리라. '내가 가장 예뻤던' 그 시절은 나의 어제가 아니고 지금 이 순간이다. 그러니 걷자. 새로운 길로.

 

그래, 이게 책이지. 영화도 드라마도 감동적이고 좋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내 손과, 끊임없이 다음 페이지를 상상해야 하는 뇌, 이 절대적인 집중과 몰입의 시간을 통해 얻어지는 기쁨에는 무언가 다른 게 있다. 제주 바닷길을 자동차로 즐기는 드라이브의 순간도 아름답지만, 바람과 햇볕을 정면으로 맞으며 해안길을 두 발로 걸어서 만나는 올레길 도보가 누군가에겐 삶을 흔들어 놓는 시간이 되듯 책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종이책이, 깊은 독서가 주는 내 영혼의 울림 속으로 빠져든다. 인생을 살면서 이 아름다운 시간과 감동을 느낄 수 있게 독자로 성장시켜 준 나의 독서, 내 삶에 감사한다.

 

돌아보면 인생의 주요한 시기마다 내겐 책이 있었다. 어릴 때 책으로 꿈을 꾸었고, 커서는 책으로 야망을 품었으며 그 야망이 노동이 되고 생계가 되었다. 책은 한 번도 소리쳐 내게 이 길로 가라, 말하지 않았지만 숨을 고르기 위해 멈춰선 중턱 어딘가에서 뒤돌아볼 때마다 내가 온 길이 책의 길이었음을 알았다. 그렇게 또 10년 후, 뒤돌아보면 여전히 나는 같은 길 위에 서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