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수어』, 이미화, 인디고, 2021

그루 터기 2022. 3. 17. 05:27

수어, 이미화, 인디고, 2021

 

참 많은 감동이 잔잔하게 밀려온다. 이 책을 고를 때, 왠지 이 책을 읽어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면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왠지가 아닌 큰일 날 뻔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참 잘 읽었다는 생각이 가슴가득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에 자주 나오는 이길보라님의 책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을 읽었었다. (인용한 책은 이 책이 아니고반짝이는 박수소리를 몇 번 인용했다.) 수어는 막연한 농인에 대한 생각을 적극적인 생각으로 바꾸게 한 책이다.

 

책을 읽고 내가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유튜브를 보고 자막을 넣어 달라는 댓글을 다는 것이다. 이건 작가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에 자막을 다는 자원봉사자 역할도 할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사실 음악에 소질이 전부한 나 같은 사람이 자막봉사를 하면 틀림없이 다른 사람이 보충해야 하겠지만 그 정도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시간이 많은 나의 제2인생을 살아가는 보람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작가님께서 프롤로그에서 밝혔듯이 수어가 그랬듯, 우연히 이 책을 마주한 누군가가 인생을 다르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썼다. 쓰는 동안 나는 낙관주의자가 되었다.’처럼, 나도 그 누군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용기를 내어 본다.

 

 

 

저자 소개

이미화

영화 에세이스트. 영화를 곁에 두고 글을 쓰는 사람. 베를린 다이어리』 『당신이 나와 같은 시간 속에 있기를』 『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 『수어: 손으로 만든 표정의 말들을 썼다.

최근작 : <에픽 #05>,<수어>,<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

 

 

 

독서 메모

 

지문자는 자음과 모음을 손가락으로 표기하는 수어로, 이름이나 지명과 같은 고유명사를 표현할 때 주로 사용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일일이 지문자로 표기하는 건 언어의 경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농사회에서는 사람의 특징적인 면을 부각시켜 얼굴이름(수어이름)’을 만들어 부른다. () 얼굴 이름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은 농인에게 선물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농인이 고민 끝에 지어준 이름이 있다는 건 농사회에 받아들여졌음을 의미 하는 말이기도 하다.

 

수어를 배우다 보면 수어가 손동작뿐 아니라 표정까지 사용해야 하는 언어라는 사실을, 근육이 얼얼할 정도로 깨닫게 된다. 외국어로 말하는 게 사고체계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뇌로 생각해야 한다면(수어도 물론 그렇지만), 수어는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근육을 사용하는 일이다. 질문과 대답을 표정으로만 구분해내야 하기 때문에 눈썹 근육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움직이는가가 곧 의사소통의 핵심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래도 질문은 비교적 수월한 편이다. ‘?’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앞으로 내밀면 질문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풀어진 얼굴 근육처럼 말도 조금 말랑말랑해진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무표정이 아닌 내 모습을 보는 건 어색하지만, 수어를 배우며 얼굴과 마음의 근육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다.

 

시각적이고 입체적인 수어의 특징은 시간을 나타낼 때 특히 매력적이다. ‘1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공전의 과학적 개념을 그대로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오른 주먹을 지구, 왼 주먹을 태양이라고 했을 때, 오른 주먹의 검지를 펴서 숫자 1을 만든 뒤 지구가 태양을 돌 듯, 왼 주먹 주변을 한 바퀴 돌리면 1년이 된다. ‘1시간은 손목시계의 분침이 한 바퀴 돌아가듯, 왼 손목 위에서 오른손으로 만든 숫자 1을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린다.

 

언어는 무기도 되었다가 선물도 된다. 그걸 선택하는 건 언어를 쓰는 자신일 테다. 나는 어떤 능력을 갖게 될까? 수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게 된다면 말이다. 아무래도 내게 미래를 보는 능력이 생길 것 같지는 않다. 농인과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거나 지금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없겠지. 어쨌거나 확실한 건 지난하고 때론 괴롭기까지 한 이 과정 속에서 내가 무언가를 얻게 될 거라는 점이다. 그건 분명 미래를 향하는 능력일 것이다.

 

우리는 침묵을 예의로 여겼다 선생님은 농인이 적어도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모르는 대화는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규칙을 정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그래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어쩌면 배려는 학습이 아니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마음이 아닐까 하고, 수어가 만들어낸 고요함의 물결 속에서 나는 작게 웃음 짓곤 했다.

 

농인은 걸으며 자주 뒤를 돌아본다는 것, 농인과 대화할 때는 상대방의 얼굴과 눈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 청각장애가 있어도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운전 시 시야가 건청인에 비해 1.5배 넓다는 것, 농인은 한국어로 문장을 짓는데 어려움을 느끼는데 그건 수어의 문법과 한국어의 문법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 강의나 행사 등 다수의 농인을 집중시킬 때는 불을 끄면 된다는 것. 낯선 섬에 서서히 정학하듯 소리 업음에서 비롯된 농인의 문화적 특수성을 배워나가고 있다.

 

최근 산책길에선 장애 앞에서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아직은 비장애인인 내가 언젠가 갖게 될지도 모를, 혹은 늙어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갖게 될 장애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많이 상상해본 만큼 조금의 좌절도 없이 나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장애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모든 청각장애인이 수술을 감당하면서까지 듣기를 희망하는 건 아니라는 것, 수술을 받은 사람 모두가 소리에 만족하는 건 아니라는 것, 장애를 치료하거나 제거하는 방식으로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해결책을 강요하는 것 또한 차별이라는 것. 내가 속한 사회의 값을 기준으로 그보다 덜하거나 더하면 완전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한민과 수지가 걷는 산책길은 그 자체로 완전한 세상이었다. 불완전한 건 나의 인식 수준이었다. 오디즘AUDISM 은 선량한 얼굴을 하고 내 안에 숨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약자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우리는 아마 지금처럼 같은 길을 걸으면서 다른 장면을 볼 테지만, 마음속에 같은 질문을 품고 살아가자고 말이다.

 

언젠가 타히티인에게는 슬픔을 표현해줄 단어가 없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아픔가 곤란, 피곤, 시큰둥함을 모두 독감에 걸렸을 때 느끼는 피로정도로 해석되는 페아페아라는 단어로만 표현한다고 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지상 낙원이라 불리는 타히티 섬 원주민들의 자살률이 높다는 글이었다. 분명 슬픔을 느끼지만 그것을 표현할 말이 없다는 건, 구체적으로 우로해줄 수도, 공감해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얀 손이 햇살 아래에서 곧고 깨끗하게 움직인다. 뒤이어 두 손이 허공에서 반짝인다. 소리가 없는 세계에서 박수는 손뼉을 치는 대신 양손을 올려 별처럼 반짝이는 동작으로 표현한다. 반짝반짝. 박수 소리가 반짝인다. 화면 가득 소리 없이 반짝이는 박수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환대받는 기분이 들었다. 어서 오라고, 기다렸다고. 농세계엔 이런 반짝이는 언어가 있다고. 우리의 삶도 당신의 삶처럼 반짝인다고. 그러면 나는 화답하듯 손을 들어 올린다. 반짝반짝. 손에서 박수 소리가 반짝인다.

 

우리나라 도로교통법상 대형면허 또는 특수면허를 제외한 1종 보통과 2종 보통은 청력과 무관하게 취득이 가능하다. , 청각장애인도 당연히 운전면허를 딸 수 있고, 택시 운전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고요한 택시의 기사가 되기 위해는 택시 회사와 면접을 보고 운전정밀 검사. 택시운전 자격면허 시험에 합격하면 된다. 면허를 취득하고 교육을 받으면 청각장애인 누구나 택시 운전기사가 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단어가 있다면 그건 누구나가 아닐까. 누구나 참여하고 있고, 누구나 사랑할 수 있고, 누구나 살 수 있는 세상. 어쩌면 이모든 일이 누구나 자신의 권리를 지키며 살 수 있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나 가능한 그 일, 자막 제작 봉사에 바로 뛰어 들었다.

 

자막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간결함입니다.

 

1인치 자막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는 할리우드도, 기술력이 부족한 1990년대도 아니다. 한국 영화를 감상하고 유튜브 채널을 즐기는 것이 청인만의 특권이 되지 않게 하려면 수어 통역과 문자 정보를 제공하면 된다. 여기에 최첨단의 기술이나 획기적인 발전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는 장벽 아닌 다리를 놓을 수 있다. 나는 자막 제작 봉사 외에 누구나가능한 일을 하나 더 늘리기로 했다.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에 한글 자막을 달아 달라는 댓글을 남기는 것이다.

 

나는 늘 실수하고 길을 잃고 발전은 더디. 이렇게 후진내가 수어를 배우고, 또 그 과정을 글로 쓰기로 한 건 불편함의 힘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내 글이 사람을 바꿀 수는 없어도 불편하게 만들 수는 있으니까. 불편함이야말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평소처럼 고기를 구울 때, 대화 중 누군가 내뱉은 혐오적 표현을 들었을 때, 고통스럽진 않아도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불편하다면 그때부터 변화는 시작된다. 자신이 더 나아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우리는, 세상은 변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살아내고 싶어서 적어 내려간 문장이 우리를 변화시킬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것 말고 이 세상에 어떤 희망이 있나요?”

 

덕심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수어를 향한 나의 이 마음은 나를 어디까지 데려갈까? 이제막 시작된 나의이야기는 이 책을 읽는 독자를 어디로 데려다줄 수 있을까?

나는 그 대답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수어 수업이 끝나고 학원 건물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종종 호프 자런이 되곤 했다.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수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오직 나뿐인 듯 특별한 존재가 된 기분. 어느 날엔 내가 이 감정을 기다려 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럴 땐 졸린 눈을 비비며 억지로 학원의 문을 열던 아침과는 영 딴판인 얼굴로 감격했다. 세상에 이런 언어가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