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을 읽다. 』, 서현숙, 사계절, 2021
소년원! 생경한 단어다.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는 단어다. 이 책은 저자가 1년간 소년원에서 국어 수업을 하는 동안 쓴 일기를 엮었다. 교육부에서 실시하는 소년원의 중학교 졸업을 도우기 위한 사업의 일환인 수업에 파견교사로 참여했고, 그 1년간의 일들은 적었다. 독서 위주의 수업을 진행하면서 같은 책을 읽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차분하게 그렸다. 내가 바라보던 편견을 하나하나 내려놓게 했다.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도 어렴풋이 생각나게 한다. 오늘 또 하나의 생각이 내 마음을 정리하고 지나간다. 편견을 지우고, 진정한 사랑을 배워본다.
저자 소개
서현숙
인생의 절반을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살고 있다. 알고 보면 뼛속 깊이 재미주의자. 공무원 사회에서 지루한 얼굴로 살 뻔했는데, 가슴 설레는 재미난 일을 만났다. “이 책, 같이 읽을래?”라는 말로 아이들을 책의 세계로 이끄는 일이다. 덕분에 직업이 삶이고 삶이 직업인 시절을 즐기고 있다. 2019년 우연히 소년원에서 국어 수업을 하게 되었고, 소년원 학생들과 함께 책을 읽었다. ‘2020 청소년 책의 해’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며 ‘책 읽는 소년원’을 꾸려나갔다. 지은 책으로『독서동아리 100개면 학교가 바뀐다』(공저)가 있다.
독서 메모
대단할 것 없는 몇 번의 납작한 건넴 이었지만,소년은 나에게 바윗덩이만큼 육중한 신뢰를 보냈다. 당신 덕분에 책을 좋아하게 되었고,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 많은 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세상에 나가서도 책을 계속 읽고 싶다는 말들이었다. 어디에서도 경험하기 힘든 절대적인 신뢰이자 지지의 말들이었다. 소년이 나에게 선물한, 내가 소년에게 필요한 사람이자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 존재감에 기대어 일 년을 살아 냈다.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사람'이다.
"추상적인 생각 속에서 소년원에 있는 아이는 '얼굴을 모르는 범죄자'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고, 고통을 준 후안무치의 범죄자. 나는 추상적 존재가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타인에게 고통을 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면서 동시에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삶의 맥락을 지닌 존재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말이다. 쓰레기도 인간 말종도 아닌 그저 소년일 뿐이었다. "
"선생님, 힘드시죠? 오늘 어쩐지 어수선하네요." 오늘은 소년원의 소년이 나의 표정과 마음을 살펴주었다. 작년의 나는 알고 있었을까? 위로는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사람으로부터 찾아오기도 하더라. 나의 마음을 살펴준 소년의 마음이 고마웠다.
17세의 소년이 ‘먹고사는 일의 급급함’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한다. 이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된 삶의 경험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마음이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주체가 될 때 즐겁다. 구경꾼 노릇은 언제나 재미없다. 무기력해지고 귀찮아진다. 아이도 어른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참여하고, 그게 몸이든 손이든 머리든 입이든 움직이면, 세상의 많은 일이 흥미진진해지다. (···) 작가와의 만남을 준비하면서 아이들을 구경꾼이 아닌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다. 자신이 주체가 되는 짜릿함을 선물하고 싶다.
오늘을 통과한 아이들의 영혼에는 어떤 자국이, 흔적이 그려졌으려나. 아마 전과 다른 무늬가 아로새겨지지 않았을까. 내 마음에 들려왔다. 아이들의 마음이 조금 움직이는 소리.
책을 읽고 인상 깊은 구절을 서로에게 말하는 것은, 마음을 들키는 좋은(?) 방법이다. 책 한 권을 읽고 나서 단 한 줄의 인상 깊은 문장을 쓰면, 저자의 마음이 아닌 책을 읽은 사람의 마음이 드러난다.
우리는 부족할지라도 환대의 준비를 했다. 이 시간의 함께 읽기 경험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언젠가 아이들이 알게 될까? 환대로 사람을 맞이하는 경험, 자신이 주체로 활동하는 경험은, 나도 타인도 소외시키지 않는 연습이다. 사람의 온기를 느끼는 연습이다. 이런 연습이 쌓이면 삶에서 적어도 ‘나’를 소외시키지는 않을 것 같다. 막 살지 않을 것 같다. 길 밖으로 떨어지더라도 자신을 돌보며 다시 삶의 길 위에 올라서게 되지 않을까. 두 다리에 힘주고 걸어가게 되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완독'이 아니다. 작가와 독자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내밀한 소통이 일어나는 공기, 이것을 느껴보는 것이 관권 아닐까. 이 시간의 농도가 제법 진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로 소년의 마음이 흘러가기 시작한다.
의도를 지닌 이야기 였다. 그렇게 짐작되었다. 소년의 마음에 ‘하고 싶은 일’ 하나 만들어주고 싶은 의도, 하고 싶은 있는 사람은 자신을 무작정 방치하지 않는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돈을 모으든 공부를 하든, 어떤 노력이건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길 안의 삶’을 살게 된다. 박찬일 작가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그저 슬쩍, 작은 일 하나 보여주고 “이거 하고 싶지 않니?”라는 말을 가만히 건넨다. 그 일 하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자신을 돌보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이 마음이 소년들에게 맑은 물로 스미고 있었다.
아이에게 “책으로 말을 거는 일”이 쉬우면서도 위대한 힘을 지녔다는 것, 심하게는 사람의 영혼을 뒤바꿀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책을 함께 읽은 사람들은 감정을 나누고 서로 마음을 연다. 서로를 함께 무장해제한다. 주변의 일들에 함께 물음표를 꽂아본다. 당연하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다.
편지를 쓰는 소년의 시간을 떠올렸다. 사람에게 사람은 어떤 의미인가. 아이들과 나는, 그러니까 우리는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관계는 아니게 되었다. 누가 일방적으로 무엇을 베푸는 관계도 아니다. 그것이 어떤 방법이든 얼마만큼이든,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요란한 색, 강력한 힘은 아닐지언정,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물들이고 있다.
“아냐, 나 돈 없어, 원래 선생님들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짜장면도 사주고 선물도 사주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얼급 받잖아. 그래야 학생들이 나중에 어른 돼서 선생님 찾아와 밥 사주지!” “저도 나중에 성공하면 선생님 밥 사주러 갈게요!” 찬현이가 호기롭게 장답한다. 그 순간 기도했다. 그 약속이 부디 지켜지기를. 나중에 찬현이가 나에게 자랑할 생활의 이야기가 아주 많기를. 이 녀석 자랑에 내가 질리기를.
고마우 너머, 거기에 미안함이 있다. 어른인 우리는 이미 알고 잇다. 고마움에 미안함이 왜 찰떡처럼 들러붙어 있는지 말이다. 마음의 일이어서 그렇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마음으로 꽉 채워져 있어서 그렇다. 바다는 푸른 물결이 가득 차서 끊임없이 넘실거린다. 사람 안에는 마음이 가득하다. 마음은 단단하지 못한 채로 항시 흔들린다. 미안함, 고마움, 그리움으로 꽉 차서 넘실거린다.
마음이 저릿하다. 몇 글자 ㅇ나 되는 분량의 활자에 …. 독서는 철저히 자기입장에서 읽는 행위다. 이를 사무치게 느낀다. 이 문장들에 한동안 머물렀을 마음, 나야 그 삶의 맥락을 알도리가 없는 타인이지만, 책의 어떤 손길이 소년의 마음을 쓰다듬고 지나갔으리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있는 힘껏 노력하고, 그 결과물이 나뭇가지가 늘어지도록 주렁주렁 열리는 인생의 시기, 그런 시절도 있다. 그런가 하면 지금은 마음과 정성을 들이고 허전함과 쓸쓸함을 받아서 주머니에 넣고 길을 걸어야 하는 그런 시기인 것이다.
인상 깊은 문장을 쓰는 것이 마음을 들키는 결정적인 방법이라는 것 말이다. 마음의 맨살이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몇 글자 안 되는 문장에 가슴이 뻐근하다
쉽고 좋은 책을 소년의 손에 자꾸 쥐여 주고 싶다. 그것은 결국 ‘책’이 아니게 될 것이다. 책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화化할 것이다. 우리는 소년에게 책을 주지만 소년이 손에 받은 것은 자신을 돌보며 사는 마음 아닐까.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 수 있는 마음 아닐까.
"나는 아이들에게 지극정성이지 않다. 적당한 정도의 친절함과 세심함, 딱 그 정도다. 갇힌 공간, 일주일에 한 번만 수업한다는 특수성이 아이들에게 그런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생활에서 비롯되는 온갖 감정을 나누지 않아도 되니까. 좋은 표정만 보여줄 수 있으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같이 웃을 때 한 뼘 좁혀진다. 같이 열 받을 때 또 한 뼘 좁혀지고, 같이 안타까워할 때 곁으로 바싹 다가온다.
<소년의 마음>을 읽으면서 우리는 웃음이 터졌다. 눈물도 터졌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났고, 어린 나이에 내 편을 잃은 동수의 마음을 헤아리다가 속상해서 또 눈물이 났다. 혼자 읽었더라면 조금 웃고 조금 먹먹했을 텐데, 같이 읽는 바람에 많이 웃었고, 마음도 많이 시렸다. 어른이 된 후에 엄마가 사라진 나도 그렇게 추었고, 그렇게 혼자였다. 그러니 여덟 살에 내편을 잃은 동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하나의 문화적 경험이고 삶의 경험이다. 단편적인 정보를 얻는 경험이 아니라30분 이 넘어가는 맥락 있는 이야기를 듣는 경험. 어린 시절부터 이런 문화적 경험이 많은 아이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아이도 있다. 이 차이가 쌓이고 쌓이면 어떻게 될까. 좀처럼 메울 수 없는 공백, 뛰어넘을 수 없는 문화적·지적 격차가 생긴다.
"동수도 나쁜 애 아니거든요. 욱하는 감정 때문에 갈등을 일으켜서 그렇죠. 누가 동수 옆에서 선생님처럼 다정하게 얘기해주면 좋겠어요. 그러면 그 녀석도 마음이 순해질 텐데." 어른인 나에게도 그런 존재는 필요하다. 나의 마음을 순하게 만드는 사람. 사납고 날 선 마음의 결을 조용히 빗질해서 얌전하게 만드는 사람. 싸우듯이 살다가도 팔다리에 긴장 풀고 몸도 마음도 평평하게 눕게 만드는 그런 사람. 이런 사람 하나 없다면 누구도 멀쩡하게 살아가기 힘들다. 소년에게는 더 절실한 존재, 사무치게 필요한 존재가 아닐까.
고정관념의 뿌리는 깊고 집요하다. 그 뿌리가 내 몸의 신경 어디쯤까지 닿아 있는지 나도 알 수 없다. 아이들이 시를 잘 외울 때, 책을 잘 읽을 때, 나에게 정성 들인 편지를 건넬 때, 나의 마음은 많이 흔들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흔들림은 감동보다는 충격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지닌 고정관념과 충돌하는 데서 생긴 충격 말이다.
한 명씩 두 명씩 면회실로 들어서는데 아무도 큰 소리로 “누구야”,“아무개야”라고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들어온 소년의 눈빛이 두리번거리다가 기다리던 이를 찾으면 그쪽으로 걸어간다. 아버지가 꽉 안아주기도 하고 어머니가 손을 잡고 손등을 하염없이 쓰다듬기도 한다. 옆에 앉혀놓고, 어머니는 아들 귀를 매만지고 손을 마주 잡는다. 어머니의 눈길은 소년의 얼굴을 떠나지 못한다. 과자 봉지를 뜯고 음료수 뚜껑을 열어서 소년 앞에 밀어 놓는다. 반가움에 목소리가 커지는 사람도, 눈물 흘리며 애달파 하는 사람도 업다. 그저 곡진한 공기가 실내를 서서히 메운다. 염려와 걱정, 안도와 안타까움, 반가움, 간절한 마음들이 술렁술렁 조금ㅆ기 조금씩 면회실을 채운다.
소년이 남기고 싶어 하지 않는 시간에 나도 포함되어 있는 까닭이다. 나는 누군가의 어두운 시간, 달아나고 싶은 시간, 숨기고 싶은 시간에 함께 있는 사람이다. 여기에서의 시간은 소년의 삶에서 최대한 빨리 삭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열 개의 소년원이 있고 소년원에 갇힌 청소년이 1000여 명 이라고 한다. 소년원 본연의 목적처럼 우리 사회는 그들이 행동을 교정 하고 좋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더 이상 우리 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의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일 까.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실현하지 않아도 좋으니 좋은 삶을 살지 못해도 좋으니, 사회의 저 아래에서 우리에게 무해한 투명 인간으로 살아가기만을 바라는 건 아닐까. 그가 지은 죄는 누군가를 괴롭히고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었을 것이다. 가해자인 소년을 영원히 가둘 수 있다면 그저 가두면 된다. 가두는 것만으로 죗값을 치르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는 곧 우리의 이웃으로, 사회의 구성원으로, 무엇보다 영 혼을 지닌 하나의 존재로, 우리 곁에 서게 될 것이다. 이것이 죗값을 치르는 그 너머'를 생각해야 하는 까닭이다.
소년원 본래의 목적처럼 우리 사회는 그들이 행동을 교정하고 좋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더 이 상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의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일까.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실현하지 않아도 좋으니, 좋은 삶을 살지 못해도 좋으니, 사회의 저 아래에서 우리에게 무해한 투명인간으로 살아가기만을 바라 는 것은 혹시 아닐까.
무모할지도 모를 상상을 해본다. 아이들은 신체의 자유를 제한받는 것 자체가 이미 죗값을 치르는 것이다. 소년들은 죗값을 치르면서,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기 위한 교육을 받는다. 그 교육에 '좋은 삶'을 직접 경험하는 것을 포함시키면 어떨까. 내가 겪은 바로는 소년원의 아이들은 사회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삶'을 충분히 경험해보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들이 좋은 삶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긍정적인 자극이 되지 않을까.... 나도 좋은 삶을 살고 싶다. 소년이 이런 삶을 원하게 되는 것. 이것이 사회와 사회의 어른들이 소년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다. 욕망이 가는 길을 바꾸는 것 이 최고의 교정교화가 아닐까. 소년이 좋은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좋은 삶을 욕망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소년원 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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