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그루터기의 일상사

요즈음은 마음이 참 급합니다.

그루 터기 2022. 6. 20. 09:00

요즈음은 마음이 참 급합니다.

 

예순 여섯? 금방이예요, 열아홉에 청량리역에 내린 것이 엊그제처럼 생생한데... 그리고 47년 지나서 생각하니 후딱 지나갔네요.

제일 후회한 게 뭐겠어요. 부모님을 크게 속 썩이거나 공부를 무지하게 못하거나 열심히 살지 않고 말썽 부린 것도 없지만, 그게 다 후회되요. 좀 더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었는데 못했고, 열심히만 하지 말고 돈을 벌수도 있었는데 너무 몰랐어요. 그렇네요. 제일 후회되는 거 그거네요. 부모님께 제대로 효도 한 번 해 보지 못 한 거요. 아버지 살아계실 때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들었구요. 어머니 살아계실 때 정신 좀 차리니까. 자식만 눈에 보이고 어머니는 형님이 알아서 잘 해 주시더라구요. 당연히 그러러니 했어요. 나이가 50대 중반인데 그 때도 아직 철이 들지 않은 거지요. 지금도 철이 덜 들었지만.

 

학교 다닐 때요?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는 항상 상위권이었지요. 중학교 때는 워낙 공부 잘하는 애들이 많은 학교라 상위권이라고 말을 못하고 430명 정도에서 100등정도 했으니까 아주 공부 못하는 정도는 아니었지요. 이 때 정신 차리고 공부 좀 했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변했을까 많이 생각해요.

부모님 속 썩인 거는 별로 생각이 안나요. 말은 그런대로 잘 듣는 편이었거든요. 가끔 책 산다고 돈 받아서 먹고 싶은 거 사먹거나 대학 다닐 때 장학금 받고도 못 받았다고 거짓해서 등록금 받아 쓴 거지요. 대학은 낮에는 직장 다니고 밤에 야간 대학을 다녔는데 금형 계통의 일을 했기 때문에 중간기술자로서는 대접을 받았지만 피곤해서 공부시간에 많이 졸았어요. 그러다 보니 공부도 열심히 못하고, 졸업 할 때쯤에는 장학금도 못 받았지요. 그렇다고 공부를 못하고 농땡이였나 하면 그 정도는 아니고 한두 명 주는 장학금을 받지 못했다는 겁니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그 때 시험은 벼락치기 시험공부라 낮에 집에서 놀고 야간을 다니는 친구들은 시험기간에 벼락치기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나는 피곤해서 공부가 힘들었어요. 요즈음도 잠이 많지만 그 때도 책만 펴면 10분도 되지 않아 벌써 책을 베고 잠이 들었지요.

 

한 때는 공부 좀 해 보겠다고 하숙을 하면서도 야간에는 독서실에서 밤을 샌 적이 있었어요. 회사를 마치고 나서 독서실에 가서 공부하다가 아침에 하숙집에서 씻고 밥 먹고 회사를 출근하여 하루 종일 일하는 건데. 한 달 동안 독서실에서 공부를 한 게 아니라 엎드려 잠만 자게 되더라구요. 지금 생각해도 용기만 가상한 거지 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결국 한 달 만에 포기했지만요. 그 때 우리 집이 부자였으면 낮에 직장을 다니지 않고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런다고 공부만 했겠어요. 결국 낮에 학교 간다고 맨 날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고 했겠지요.

 

 

솔직히 제일 후회되는 게 사업한다고 시작했는데 사업수완이 별로 없었어요. 열심히 하는 것 하나로 버티다가 부도를 맞는 바람에 아내와 자식 고생 시킨 거 그게 제일 후회가 되지요. 애들 어릴 때 참 많이 어려웠어요. 쌀이 떨어져서 밤을 못 먹게 된 때가 두 번인가 있었어요. 돈도 없고 쌀도 떨어져서 아침을 못 먹게 되었는데, 어디 가서 돈을 빌려오는 것도 못했어요. 아침에는 그냥 굶고 점심 때 공장에서 외상 거래하는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을 사 먹었던 기억이 나고, 어렵다고 친구가 20키로 쌀 한 포대를 사다 준 기억이 납니다. 참 고마웠지요.

 

그래도 포기 하지 않은 건 잘 한 거 같아요. 부도난 어음 기계 팔아 모두 갚고 300만원으로 다시 시작했지요. 전셋집에서 100만원 보증금에 매달 얼마씩 월세를 주고 사는 집으로 이사를 가니 딱 그 정도가 손에 잡히더라구요. 그리고 나서도 10년 정도는 정말 어려웠습니다. 사업수완이 별로 없었다고 했잖아요. 사업을 하면 돈을 보고 뛰어야 하는데 돈보다 일이나 의리를 보고 뛰었으니 고생을 좀 할 수밖에요. 20년 사업하면서 고생만 계속했냐구요? 그랬으면 지금이 없었겠지요. 끝이 보이지 않던 가난도, 여명이 밝아오듯 조금씩 어둠이 걷히는 날이 있었습니다.

 

주위의 대부분의 친구들이 내 집 장만을 끝낸 결혼 13년차에 신도시 막차로 겨우 안양 평촌에 집을 하나 분양 받았습니다. 아파트가 나쁘다고 소문이나서 다른 사람들은 신청을 잘 하지 않는 거의 미분양 정도의 한양아파트인데 털컥 당첨이 되었습니다. 친구들 모임에서 한양아파트에 당첨되었다고 하니, 건축계통에 정보가 빠른 친구 하나가 왜 자기한테 물어보지 거기 신청했냐고 타박을 합니다. 고민하다가 그래도 어떡하나요. 한 번 당첨되면 청약 1순위가 박탈되어 점점 내 집 마련이 어려운데요. 설상으로 돈도 없었습니다. 당첨이 어렵고 계속 떨어지니까 일단 신청하고 보자 했던게 이렇게 된거니까요. 계약금과 1, 2차 중도금은 30년 상환 저리로 주택은행(지금의 국민은행)에서 주택담보로 빌려줘서 간신히 넘어갔는데 그 다음부터 6개월 정도에 한 번 나오는 중도금 1,000만원 정도를 준비할 수가 없었네요. 중도금이 납입 날짜가 넘어 연체료가 붙어서 100여만 원씩 붙고 했습니다. 그런데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떡했냐구요? 우리 속담에 쥐구멍에 볕들 날 있다고 하는 것도 있고, 고사성어에 전화위복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아파트 현장에 바닥파는 공사를 하는 중에 ()한양이 부도가 났습니다. 워낙 부실공사를 많이 하다보니 경영이 엉망이었나 봅니다. 하긴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알 수가 없지요. 분양받은 입주예정자들이 난리가 났는데 다행히 지금의 LH인 주택공사에서 인수를 하게되고, 부실공사하나 없는 멋진 아파트를 지어서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입주대금은요? 10년 정도 신용하나로만 열심히 일을 했더니 기회가 오더라구요. 국내 대기업과 거래를 하게 되었구요. 일이 갑자기 늘어나 친구 공장 재하청을 주고 일을 시켜야 할 정도로 정신없이 1~2년이 지나갔습니다. 공사금액도 이익이 많이 날 수 있게 넉넉히 받고, 어음 깡(할인)도 은행에서 싸게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음이 거의 사라지고 대부분의 어음도 은행에서 할인을 해 주지만 그 땐 내가 거래하는 중소기업은 3개월에서 6개월짜리 어음을 주는데 은행에서는 쳐다보지도 않구요. 사채시장에서 월 3%~4% 정도의 고금리로 할인을 해 줬습니다. 그것도 그냥 막 해주지 않아요. 담보가 있거나 잘 알거나 해야 겨우 사정사정해야 바꿀 수 있었지요. 그러니 대기업과의 거래는 저에게는 천운이었던 거지요. 중도금을 못 내서 이자를 100여만 원씩 내던 중도금뿐 아니라 잔금과 은행에서 빌린 30년짜리 저금리 대출금까지 한 번에 다 갚고, 완전 무결점으로 입주를 했습니다. 거의 2년 가까이 밤을 낮으로 알고 몸이 부서져라 일한 보람이지만 다른 분들이라고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을리 없으니 저에게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의 20년 사업 전반기인 10년은 애들 키우느라 힘든 집사람 고생시키며, 밤낮없이 일만 하던 때라고 하면 나머지 10년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여유가 좀 있었던 기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들은 IMF 구제금융 시절에 부도가 나고 힘들어 할 때 무차입 경영으로 짧은 기간이지만 은행에서 연리 25%의 사체이자 만큼의 이자를 받고 정기예금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그때가 현금도 제일 많고 좋았던 시절이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그 때 공장을 하나사서 내 공장을 하나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돈이 전부 3채의 집에 묶여있어서 똑 같이 내려가는 바람에 실천에 옮기지 못했는데 지나고 나니 아쉬움이 조금 생기긴 합니다. 그렇지만 그건 욕심이 과한 것일 수도 있다 생각합니다.

 

 

오늘 이렇게 백수로 지내면서도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는 것도 그 때 모은 작은 재산이라도 잘 관리하고 지켜왔던 덕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제 앞으로 얼마나 건강하게 더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날이 결코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고 싶은 일은 많고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왜 이렇게 마음이 급한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캘리그라피 배우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