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그루터기의 일상사

생일날이면 전화 주시던 어머니가 생각나는 날입니다.

그루 터기 2021. 9. 5. 21:00

 

   오늘 가슴에 와 닿는 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

 

   보통 책들을 보면 저자만 있거나, 번역을 한 사람이 있거나 공동저자가 있는데 오늘 아침에 읽은 책은 구술, 글 그리고 엮은 사람으로 나누어 있었다. 이런 책이 예전에도 있었을 것 같은데 내가 처음 본 거라서 그런지 좀 신선한 느낌이었다.

김덕성님이 구술하고, 이은영님이 글을 쓰고 김용택님이 엮으신 나는 참 늦복 터졌다라는 책이다. 2014년에 나온 책으로 도서관에서 읽을 책을 검색하다가 호기심에 빌려온 책이다.

   이 책은 김용택 시인의 어머님의 이야기를 시인의 아내이신 며느리가 받아 쓴 책이다. 시어머님께서는 구술을 하시고 며느리는 녹음을 하고 글로 옮기셨다. 내가 보기에 구술은 받아 적었다기보다는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쓰시면서 글로 옮기고 책으로 엮으신 거라 생각이 든다.(같은 이야기인가?)

 

   여든 여덟, 수를 놓으시고 글을 배우시며 새로운 날들을 살아가시는 모습을 잔잔하게 풀어놓은 글이다. 책의 내용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나는 왜 우리 엄마와 이런 걸 할 생각을 못했을까?’ 이 책이 진즉에 나왔으면 좋은 생각이라고 나도 얼른 엄마랑 글쓰기와 밥상보 만들기를 해 봤을 텐데. 엄마가 좋아하시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든다.

 

   엄마는 기본적인 글을 읽고 쓰실 줄 아신다. 엄마 어릴 때 외증조 할아버니께서 여자도 글을 쓰고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글을 가르치셨다고 하셨다. 소백산 아래 깊은 시골 동네지만 함창 김씨 집성촌의 제일 큰집 맏딸이니 어깨 넘어서라도 글을 읽히셨으리라. 얼마 전에 올린 게시글에도 있지만 평생 엄마한테 한 통의 편지를 받아봤다. 우리가 요즈음 쓰지 않는 단어가 많이 섞인 구어로 된 편지지만 혼자 충분히 글을 쓰시고 읽으실 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꽤 많은 글이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니까 진즉에 생각하지 못한 아둔함이 미워진다.

 

   어머니도 그 세대의 여느 사람처럼 맏아들에 대한 의지가 크셨지만 90세 때까지 혼자 시골집을 지키시며 계셨다. 자식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생각이 있으셔서 42녀 육남매의 자식이 있었지만 어느 자식 집에서도 오래 머무는 법이 없으셨다. 가끔 우리 집에 오셔서 좀 오래 계실 때 우리 집이 넓고 생활하기 편하시니 여기서 사세요하고 아내가 이야기하면 안 된다. 내가 여기 계속 있으면 다른 애들이 섭섭해 한다.”라시며 어느 자식 집에서도 한 달을 넘기시지 않으시고 가시던 게 생각이 난다. 어쩌면 아들은 회사에 가고 손주는 학교에 가고, 며느리와 둘이서 특별히 할 일이 없는 도시 생활이 심심하고 딱히 재미있는 일도 없으셨으리라.

 

   어머니께서는 자식들의 생일을 잊지 않으시고 챙겨 주셨다. 고등학교까지 집에서 자랄 때는 큰 밥그릇에 밥을 수북이 떠 주시는 것으로 생일상을 차려주셨고, 결혼하고 떨어져 살 때는 잊지 않고 전화를 주셨다. 그러던 언젠가부터 어머님이 기억력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하셨고, 생일을 잊으시기 시작하셨다. 그 때 부터는 내 생일이 돌아오면 꼭 어머님께 낳아주셔서 고맙다는 전화를 드렸었다. 어머님께서는 연세가 많으셔서 기억력이 떨어질 때도 다른 자식들의 생일은 잊어버리시더라도 맏아들 생일은 한 번도 잊으신 적이 없으셨다.

 

   마침 오늘은 어머니께서 평생 한 번도 잊지 않으시던 고향의 큰 형님 생신이다. 내 나이가 6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으니 큰 형님도 이제 70대 중반을 넘으셨다. 아마도 어머님께서 살아계신다면 틀림없이 맏아들 생일을 챙기셨을 것 같다.

 

   큰 형님께는 코로나로 직접 찾아뵙지는 못하고 아침에 생신축하와 안부 전화를 드렸는데 목소리가 너무 안 좋으시다. 암 수술 후유증으로 진통제로 통증을 참아내야 하는 날들의 연속이라 얼마나 힘드실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김용택 시인의 어머님의 맏아들에 대한 생각이 오늘 큰형님의 생신과 오버랩이 된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각별한 자식 사랑과 유별난 큰 형님의 부모님에 대한 효심이 오늘의 나를 부끄럽게 한다.

 

 

 

   이젠 생일이 되어도 낳아 주셔서 감사하다는 전화를 할 수 있는 엄마가 없다.

   생일은 일 년에 한 번씩 또박또박 다가오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