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 수영클럽(느려도 끝까지)』, 이서현, 자그마치북스, 2020
수영을 배워보고 싶다. 요즈음 뭐라도 해보고 싶은데 그중 하나가 수영이다. 여자들은 나이 먹고 수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남자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것도 초보 수영교실은 찾기가 쉽지 않다. 내가 수영을 배우러가면 초보일까? 중급일까? 평생 수영 교육을 배워보지 않은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평생 수영교육을 받지 않은 게 아니고 군대에서 평형을 배웠었다. 전투수영은 평형만 한다. 수영은 경영이라고 해서 누가 빠른가를 결정하는 경기이다. 그런데 군대에서 하는 수영은 전투수영이라고 해서 누가 조용하게 수영하는가다. 그러니까 자유형이나 접영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고 평형이 주를 이룬다. 그러다가 힘들면 배영이나 옆으로 비슷하게 평형처럼 발차기를 하는 수영이다. 이건 한 손에 개인화기를 들고 있을 때 가장 적당한 수영방법이다. 내가 평형 발차기는 할 줄 안다. 그러니 완전 초보라고 하기에는 억울하다. 심지어 현역시절(40년이 지난 일이지만) 1km, 2km 수영도 했었다. 지금도 물에 가라앉지는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다. 그런데 이젠 어려울 것 같다. 근육이 다 빠져 체력이 완전 저질 체력이기 때문이다. 거북이 수영클럽을 읽어보고 서평보다는 나도 수영을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더 많이 드는 건 그루터기 특유의 욕심 때문이리라.
저자 소개
이서현
동아일보에서 13년 째 취재하고 기사를 쓴다. 접영을 못하는 3년차 수영인이다.
어린 시절 남들 뛰어놀 때 책만 읽느라 수영을 배우지 못했다. 운동 신경이 부족하고 몸과 마음이 유연하지 못하다. 서른 중반 예기치 않은 인생의 풍랑을 만나면서 수영이 최고의 생존 비법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을 차근차근 익혀가며 물속으로 풍덩 뛰어드는 시간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중이다. 접영을 잘 하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 꿈이다
독서 메모
나는 엄마가 아직도 나에게 가르쳐 줄 것이 남아 있어서 좋다. 접영 박자가 엉망진창인 날, '혼자만 잘할 거냐, 딸도 좀 같이 잘하자'며 엄마에게 카톡을 보내는 순간이 좋다. 텔레비전을 보며 자유형을 하듯 팔을 휘저으면 "팔을 왜 그렇게 이상하게 꺾어?"라며 엄마가 내 자세를 흉보는 순간이 좋다. 엄마가 30, 40대 '젊은 놈들' 사이에서 새벽반 1 번을 꿋꿋이 지키며 수영을 오래오래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엄마보다 늘 수영을 조금 못했으면 좋겠다.
알고 보니 요가와 수영은 정말로 닮은 운동이었다. 남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매일매일 내가 연습하는 만큼 자세를 가다듬고 나아질 수 있다는 것.(…) 여럿이 하면서도 또 결국은 아주 외롭게, 철저히 혼자 해내야 하는 운동이라는 것.
“우리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레인을 따라 한 바퀴 쭉 걸어갔다 오시구요. 그다음에는 그냥 다 같이 물에 둥둥 떠 볼 거예요.” 선생님의 말에 수강생들 모두 앞 사람의 등을 보며 느릿느릿 수영장을 한 바퀴 돌았다. 다리에 기분 좋게 감기는 물을 느끼며 레인을 걷는 할머니들처럼. 그다음엔 물을 이불 삼아 물 위에 엎드렸다. 아, 물 위에 떠 있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들고, 숨 막히는 것만은 아니구나. 버둥대지 않아도 되는구나.
CT를 찍는 날, 암이 다른 조직으로 전이 됐을까 마음을 졸이던 아침에도 수영을 했다. 입원 기간 동안 아기를 맡길 사람을 고민하면서 수술 전날에도 수영을 했다 이유식을 만들고, 빨래를 하고, 아기를 재웠다. 그리고 다음날 짐을 싸서 혼자 병원을 갔다.
나는 이제 겨우 수술을 막 마친 암 센터 신입생인데다, 소위 ‘착한 암’이라고 하는 갑상선암에 걸렸으니 감히 ‘지나고 나니 별일 아니에요’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비슷한 흉터로 무언가를 주저하고, 위축돼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은 해 줄 수 있다. 어느 수영장에서는 70대 할머니도, 60대 아주머니도, 그리고 30대 아기 엄마도 결국에는 암 센터를 나와 매일 신나게 물속에서 자유를 느낀다고. 그리고 물속에서 그 지옥 같은 감정들이 마법처럼 녹아내린다고. 마치 그게 아주 오래전 꿈인 양, 어딘가로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암 환자 네 명이 서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흉터에 대해 말하는 날이 오더라고 말이다.
수영복 밖으로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는 누구나 흉터 한씩은 가지고 산다. 남들이 내 흉터만 들여다 볼 것 같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찰나일 뿐이다. 그리고 좀 들여다본들 어떤가. 어떤 상처든 시간이 지나면 아물고, 덜 아프고, 옅어진다. 상처가 아물었다는 건 그동안 우리가 겪은 마음고생이 우리에게 주는 훈장이다. 내 흉터를 가장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다
그 다음날은 플립턴이었다. 실내 수영장 자유 수영 때는 아무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픈턴을 하는데, 사실 그 오픈턴도 정확한 자세로 하는 사람을 거의 본적이 없었다. 수영 대회에 나온 것도 아니고, 북적거리는 레인에서의 안전 문제도 있고 무한 자유형 뺑뺑이 돌기를 위해서는 그저 슬쩍 벽을 잡고 방향을 바꾸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할머니들은 마치 대회에 출전한 수영 선수들처럼 물속에서 앞구르기를 해 턴을 하는 플립턴을 연습하고 계셨다. 자유형으로 가셨다가 벽 앞에서 돌고래처럼 앞구르기, 그리고 벽 차기, 그리고 유선형 자세를 유지하며 다시 되돌아오기, 타이밍이 안 맞아 벽을 차는 발이 삐끗한 건지, 아니면 코에 물이 잔뜩 들어간 건지 중간에 멋쩍은 듯 배시시 웃으며 서실 때도 있었지만 할머니들의 플립턴 연습은 한 번, 두 번, 그리고 열 번 넘게 계속 이어졌다.
록쌤이 고개를 저은 이유는 내 다리가 가라앉기 때문이었다. 수영은 누가 물의 저항을 덜 받아 남들보다 더 빠르게 앞으로 나가는 가 겨루는 경기다. 그런데 하체가 가라앉으니 기울어진 상태에서 온몸으로 저항을 받으며 남들보다 더 힘겹고 더 느리게 수영하고 있는 꼴이었다. 가라앉는 발차기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다시 킥판에 의지한 채 코어에 힘을 주고 몸을 유선형으로 띄우는 것이 과제였다. 록쌤의 마지막 말이 내 귀를 때렸다.
가라앉는 발차기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다시 킥판에 의지한 채 코어에 힘을 주고 몸을 유선형으로 띄우는 것이 과제였다. 록쌤의 마지막 말이 내 귀를 때렸다. “아마추어가 킥판 잡고 하는 게 뭐 어때서요. 회원님 인생에서 앞으로 킥판 안 잡고 수영할 날이 더 많아요.”
“어머니가 말씀 하셨다.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인생이란 놈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대로 우리가 알게 앞통수를 치는 법은 없다고.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그러니 억울해 말라고.”
갑상선암은 통증이 없다 그런데도 아주 가끔 심한 마음의 통증을 겪을 때가 있다. 나는 수술 직후 한동안 모든 면에서 무척 삐딱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인 걸 알면서도 수술한 아내를 두고 한 달 가까운 장기 출장을 떠난 남편에게도 서운했고, 갑자기 잘 먹던 이유식을 거부하는 딸에게도 화가 났다. 그저 갑작스럽게 찾아온 내 불행의 원인을 누군가에게 돌려 마구 비난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탓하고 싶은 사람은 사실 엄마였다.
수영 가방에는 나와 동생이 미처 읽지 못한 엄마의 마음이 오도카니 담겨 있었다. 엄마는 모두 곤히 잠든 새벽, 늘 같은 시간에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그 가방 속마음들과 함께 수영장으로 향했다. 엄마는 내일 아침 8시20분에 전날의 피로와 그늘, 고단함이 다 사라진 얼굴로 돌아왔다. 그리고 활기차게 당신의 딸이 먹을 아침을 준비하고 손녀가 먹을 과일을 씻었다.
그 순간 정말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선생님 저는요. 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느리게 무언가를 해 본 적이 없어요. 아니, 더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뒤를 따라 일부너 느리게 가 본 적이 없어요. 저는 늘 선두 그룹에 서려고 아등바등했고, 맨 앞에 선 사람보다 더 앞서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어요.
소설 <라이프 오브 파이>의 주인공인 파이는 망망대해에서조난당한 뒤 구명보트에서 영국 해군의 생존 지침서 한 권을 발견한다. 그 책에 있던 여러 수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한 가지는 ‘수영을 하지 말라’였다. 바꿔 말하면 더 오래 버티기 위해서라도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지 말고 최대한 힘을 비축하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마지막 수칙, ‘위축될지언정 패배하지는 말라’
욕심을 부리면 물은 안다. 억지로 이기며 나아가려고 하면 물은 귀신같이 알아챈다. 더 큰 전복을 찾으러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바다가 아래서 나를 당기는 순간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래서 해녀였던 할머니가. 역시 해녀였던 엄마한테 그렇게 타일렀다. 욕심 부리지 말고 내 숨만큼만 있다 오라고.
불완전한 인간에게 그런 완벽한 유선형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하지만 일하는 엄마들은 언제나 일과 가정 어느 한쪽도 가라앉지 않는 완벽한 중일 포인트를 요구 받는다. 세상 모든 엄마들은 늘 현실에 존재하니 않는 무한동력 장치처럼 우리 몸을 늘 이상의 세계로 채찍질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영이란, 인생이란 언제 돌이켜 봐도 배우고 고쳐나가야 할 것투성이다. 물에 뜨는 게 능사가 아니라 언젠가는 우아한 전진을 고민할 시점 이 온다는 건 초급 때 일러 줬어도 어차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이름 모를 학생은 자신만의 ‘야옹이 올림픽’에 출전했는지도 모르겠다. 나 같은 속물 결과 지상주의자는 ‘그럴 거면 왜 대회에 나가느냐’는 질문을 던지겠지만 그의 레이스 너머에는 ‘아름다운 완영(完泳)’ 같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의미가 있으리라. 기록도, 심지어 완영에 대한 목표도 없이, ‘6등할 거면 뭐 하러 출전해?’라는 시선 따위 아랑곳 않고 그저 그 초 단위 경쟁의 세계에 아무런 목표 없이 일단 몸을 던져 보는 일, 그리고 그 무대에서 남들이 앞서 가든 말든 신명 나게 놀아 보는 일을 내가 마지막으로 경험한 게 언제였을까. 무엇보다 메달이나 기록 없이, 누군가에게 순수한 기쁨으로 내 성취를 알린 적이 있었나. 나는 죽기 전에 그런 신나는 수영을 해 볼 수나 있을까.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숨을 쉬려는 욕심을 조금만, 아주 조금만 버리고 역설적으로 다시 가라앉기 위해 물속으로 몸 던져야 한다. 질식할지도 모르는 물속으로 일부러 뛰어들어야 한다.
허공에 이미 없는 헛손질을 하는 것 같지만 손과 팔에는 어쨌거나 한 줌이든, 한 움큼이든 물이 거기에 있는 한 무언가 잡히게 되어있다. 사막의 모래가 전부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도 반짝이는 마지막 한 조각은 남기 마련이리라. 우리 인생은 참을 수 없이 가혹하면서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 자비롭다 수영의 마법은 그래서 언제나 포기하는 순간 시작된다. ‘오늘은 그저 한 줌의 물만 잡아도 좋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그런 절망적인 순간, 바로 그때 만화처럼 ‘에네르기파’가 시작된다. 그러니 쉬지 않고 잡으라! 그리하면 전진할 것이니.
고요했던 엄마의 공간,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그 안방 옷장 안에 엄마의 20대가 고이고이 걸려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옷장에서 수십 년을 잠자던 그 멋들어진 바바리를 엄마는 한두 번 꺼내 입었던 갓 같기도 하다. 엄마도 그 선녀의 날개옷 같은 바바리를 입고 과거로, 무엇을 입어도 반짝반짝 빛이 나던 20대 초반으로 훌훌 날아가고 싶은 날이 왜 없었을까. 옷장에서 잠ㅈ는 신세가 되더라도 언젠가는 엄마에게 펑키타를 한 번 선물하고 싶다.
남들보다 많이 늦어도, 마침내 평영 발차기를 끝낸 사람은 어떻게든 평영으로 전진한다. 인간은 개구리가 아님에도 개구리 같이 헤엄쳐야 하는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평영을 마스터했다는 건 언젠가는 우아하고 유유자적한 헤드업 평영을 할 수 있는 단계를 밟았다는 의미다. 좌절하고, 속상해하고, 열등감을 느끼고, 조급해하며, 마침내 시간이 흘러 그 모든 걸 사실은 그때 내가 그랬노라 털어 놓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나이를 얼마나 먹든 언제든 조금씩 자랄 것이다.
삶에는 정말로 기준선이 필요하다. 제멋대로인 몸뚱이는 늘 그 기준선을 넘어가며 곡선을 그려댄다. 일과 쉼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다면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제멋대로 살아왔던 걸까. 그 선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가파른 절벽으로 헤엄치고 있던 것일까.
몸에 새겨진 ‘바를 정(正)’은 정직하다. 거기에는 어떤 타협도 없다. 선생님의 눈을 피해 몰래 보는 만화책 같은 기만도 없다. 케트로놈처럼 정확하게 움직이는 그 친구들의 수영은 수백, 수천 번 근육에 새긴 ‘바른 정’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그대 처음으로 확인했다. 근육에 새긴 연습의 흔적은 인간의 몸을 더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마치 돌고래가 데를 지어 질주하듯 그 친구들이 물속에서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기계처럼 반복한 고된 연습의 대가라는 것을 말이다.
숨을 쉬기 위해 몸을 너무 많이 비튼 걸까. 순간 뒤집어질 뻔했다. 코로 들어온 물이 쏴~아 하고 정수리까지 찌른다. 다리 사이에 끼운 킥판이 수영장 천장으로 튀어 오를까 번개 같은 속도로 멈칫하는 찰나 록쌤이 소리쳤다. “잘 가다가 지금 왜 멈칫했어요?” “뒤집어지면 물에 빠질까 봐 저도 모르게….” “몸통을 최대로 돌려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겨우 물에 빠지는 거라면, 그냥 한번 빠져 보는 건 어때요?”
돌 전 부터 엄마의 오리발과 수영 모자를 신나게 갖고 놀았던 딸은 말을 배우기 시작한 뒤로 이따금 핸드폰을 가리키며 ‘엄마 음~파! 음~파! 하는 거 볼래!’ 한다.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흑역사를 담은 수영 모습이지만 이 두 돌을 갓 지난 아기는 케이티 레데키나 마이클 펠프스가 하는 자유형을 본 적이 없으니 내가 엉망진창 수영을 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마음 놓고 보여 주곤 한다. 언젠가 동생이 호텔 수영장에서 내가 턴 하는 모습을 물속에서 찍어 준 적이 있는데 아기 눈에는 그게 꽤나 신기했던 모양이다. 아기는 연신 헤헤 웃으며 외친다. “우와! 엄마가 새처럼 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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