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사회』, 김민섭, 미래엔, 2016
작가는 건강보험 때문에 맥도날드에서 일을 했다. 건강보험이란 국민이 건강할 때 수입에 따라 보험금을 내고, 아플 때 보험의 도움을 받아 저렴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한 제도인데, 건강보험이 걱정이 되어 취직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사업을 할 때나 직장을 열심히 다닐 때는 고액의 건강보험료를 냈고, 젊은 나이에 특별히 건강에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병원을 가는 경우가 적었다. 그런데 문제는 퇴직을 하고 백수가 된 다음에 문제였다. 매년 1000만 원 이상의 수익이 있을 경우 자녀들에게 피부양자로 등록이 될 수 없어서 가지고 있는 차량이나 재산에 의해 고액의 보험료를 내야한다. 수입이 국민연금만 겨우 1000만원이 넘어가는데도 말이다. 보험공단 직원의 설명을 듣는 내내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작가는 대리기사를 비롯한 대학의 강사나 청소원, 각종 아르바이트들을 대리 사회라고 칭했다. 대리사회는 진정한 노동자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회라고 했다. 대리기사로의 애환보다, 대리가사로서의 인간다움을 강조했다. 처음 책을 대할 때 대리기사로서 경험할 수 있는 에피소드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작가는 에피소드에 대리사회에 대한 철학을 강조했다.
나는 직장을 다닐 때 주위에서 나만큼 대리운전을 많이 이용하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많이 이용했다. 작가가 이야기 했던 C 법인대리운전회사의 초창기 멤버들과 카페에서 닉네임으로 만날 정도로 오래 되고 자주 만나기도 했고, 한 창 많이 대리 운전을 할 때는 일주일에 대여섯 번의 대리운전을 하기도하고, 한 달 사이에 같은 대리운전기사를 세 번씩이나 만난 경우도 있을 정도로 자주 대리운전을 했다. 그 만큼 술을 자주 마시기도 했고, 술을 한 잔만 입에 대면 절대 직접 운전을 하지 않고 대리기사를 부르는 철저한 습관이 한 몫을 했다.
그 때는 대리운전기사가 힘든 직업이라고 만 생각을 했다. 작가처럼 대리사회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대리사회의 잘못된 관행에 대해서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요즈음은 일 년에 한두 번도 대리운전을 하지 않게 되었다. 차를 가지고 술을 먹으러 가지도 않지만, 통풍으로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친구의 차를 대리운전해 줄 때가 있다. 대리 운전을 많이 이용할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좀 더 대리운전기사에게 좋은 고객으로 차주로 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나라의 대리사회인들이 좀더 행복한 날이 빨리 오길 기원해 본다.
저자 소개
김민섭
1983년에 서울에서 태어났고 망원동에서 어린 시절을 거의 보냈다. 309동 1201호라는 가명으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책을 펴낸 이후, 2015년 12월에 대학에서 나왔다. 그 이전까지 대학, 대학원을 떠나 본 일이 없는 현대소설 연구자였다. 글이라고는 논문만 읽고 썼고 4년 동안은 글쓰기 교양 과목을 강의했다. 하지만 대학 바깥에 더욱 큰 강의실과 연구실이 있음을 알았고, 세상으로 걸어 나왔다. 이제는 ‘김민섭’이라는 본명으로 논문이 아닌 글을 쓴다.
대학에서 교수도 아니고 학생도 아닌, 어느 중간에 위치한 ‘경계인’이었다. 강의하고 연구하는 동안 그 어떤 사회적 안전망이 보장되지 않았고 재직증명서 발급 대상도 아니었다. 서류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으로 8년 동안 존재했다. 그러한 중심부와 주변부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들에게 보이는 어느 균열이 있다. 그는 경계인으로서의 시선을 유지하면서 그 균열의 너머와 마주한다. 그렇게 작가이자 경계인으로서 계속 공부하고 노동하며, 글을 쓰고 싶어 한다.
독서 메모
타인의 운전석에서 내리며, 나의 신체를 되찾는다. 무엇보다 사유하고 발화할 자유를 되찾아 온다. 더 이상 상대방의 눈치를 보며 기계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반복되면서나는 조금씩 주체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데 익숙해져 갔다. 상대방이 말하는 대로 수용하고 긍정하는 간편한 대화의 방식, 말하자면 ‘순응’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몸에 각인된 것이다. 누군가 나를 주체로서 대우한다고 해도 익숙해진 몸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면 어디에서든 주체로서 발화할 수 없게 된다. ‘순응하는 몸’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소통은 주체가 된 이들의 논리를 확인하고 강요하는 수단이 된 지 오래다. 부하 직원은 직장 상사에게 아이디어를 내지 않고, 학생은 교사의 의도에서 벗어난 답을 제출하지 않는다. 아이 역시 부모 앞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털어놓지 않는다. 자신이 주체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부터 시작해 교사,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을의 공간’에서 순응하는 방법을 주로 배워왔다.
대학이라는 ‘갑’은 전쟁의 주체로 나서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주체로 믿는 대리인들이 자연스럽게 그 전쟁을 수행하게 했다. 그런데 나의 앞을 막아선 그들을 미워할 수가 없다. 나 역시 갑을 위한 ‘대리전쟁’에 수차례 동원되어 왔기 때문이다. 을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또 다른 을이다. 반드시 폭언이나 폭력을 수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전쟁의 수행자가 된다.
대리사회에서 대리를 주체로 일으켜 세우는 이들도 있으니, 담배를 피우거나 전화 통화를 하기 전에 "죄송하지만 제가 무엇을 해도 괜찮을까요?"라고 묻는 이들이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그 공간의 한 주체로서 존중한다는 의미다. 그 자체로 나는 '함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에게는 호칭을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직 대학이라는 공간에 젖어 있던 나의 신체를 우악스럽게 현실로 잡아끌었다. 나는 지금 대학이 아닌 거리에, 그리고 세상에 있다. 아저씨에 익숙해져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뛰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나를 위해서도, 가족을 위해서도, 우선 ‘공부’가 필요했다. 그때 나는 고작 대리운전인데 그냥 몸으로 부딪히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가벼운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모든 거리에는 저마다의 문법이 있다. 그것을 익히지 않으면 어느 생태계에서든 살아남을 수 없다. 작년까지 논문을 쓰던 책상에서, 이제는 대리운전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논문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생존의 문제였다. ‘길을 잘 모르니까’ 하는 것이 삶의 핑계가 될 수는 없었다.
새롭게 거리의 문법을 배우는 일은 즐겁다. 각각의 점이 선으로 연결되어 간다. 그것은 인접한 도시이기도 하고, 대중교통의 노선이기도 하고, 거기에는 어떠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그 점과 선을 다시 면으로 구성하고 나면 나름 대리기사로서의 기초문법을 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지명을 외우고 막차 시간을 계산하는 데서 나아가 그 안의 ‘사람’에 대해 상상하게 된다. 그들은 언제 어떻게 나가고 들어오는지, 그들의 도시는 어떻게 외부와 소통하는지, 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그러한 사유로도 확장된다. 그렇게 경험한 삶의 문법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대리가 아닌 온전한 주체로서 내 몸에 남을 것을 믿는다.
택시기사와 대리기사는 운전석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이처럼 서로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편이 특별히 수다스럽거나 사교적이지 못해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단순히 서로의 운전석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택시 기사에게 운전석이란 온전히 자신만의 공간이다. ‘개인택시’가사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운전석에 앉은 대리가사는 그래서 외롭다. 조수석에 앉은 차의 주인도 함께 외롭고 민망할 것이다. 주인은 손님이 되고 손님은 주인의 역할을 대리하며, 그렇게 서로의 가면을 바꿔 쓰고 목적지까지 간다.
스스로 한 발 물러서서 타인의 눈으로 자신의 공간을 바라보는 일은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괴물에 먹히지 않은 주체들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행위다. 그러고 나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행동과 말은 통제되더라도 사유하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을 아주 어렵게 배웠다.
아이/아내와 나눠 먹으라며 빵을 한 아름 안겨 주었던 누군가는, 자신이 가진 차의 ‘가격’보다도 훨씬 ‘품격’이 있는 손님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에 더해 “여기 높으니 버스 타고 가요”하고 2천원을 건네주었던 어떤 이는 자신이 가진 차의 가격과는 별개로 가장 품격이 있는 손님이었다.
한 번은 새벽에 젊은 커플을 태우고 막 출발하는데 그들에게 계속 전화가 왔다. 받지 않기에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근처 사거리에서 중년의 대리기사 한 명이 전화를 하며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코너를 돌면서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어야 했다. 분노도 절망도, 허무함도, 그 무엇도 아니면서 더욱 아픈 감정이 그 찰나의 순간에 그대로 전해졌다. 한 집안의 가장임이 분명할 그는 차의 백미러에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순간의 감정으로 욱, 하는 이들보다 오히려 타인의 수고를 농락하는 이들이 더 밉다. 양쪽에서 전화를 받아 누가누가 먼저 오나 경주를 시키기도 하고, 자신의 요구에 따라 거리를 내달려 온 이들을 취소 문자 하나로 돌려세우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 일상의 '갑질'이다. 당하는 이들에게는 대리가 아닌 주체의 아픔으로 오래 남는다. 대리라는 직함을 달고 있다고 해서 감정까지 대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정규직이라고 해서 그 어떤 비정함에 무뎌질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주체로서 아파하고 주체로서 절망한다.
아내는 잠시 말이 없다가 내가 이번 달에 받은 생활비가 이거였구나, 하고 말했다. 집에 들어가서 맥주 한잔을 하면서 그날 번 돈을 모두 주었다. 차비가 너무 비싼 게 아니냐고 하자 아내는 웃었다. 그날 이후 아내에게는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아이의 장난감을 사왔기에 저건 얼마야, 하고 묻자 “응 저건 대리를 두 번 뛰면 살 수 있어”라고 했다. 모든 물건을 살 때마다 1대리, 2대리, 하고 화폐의 단위처럼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 정말 사야 할 물건만 사게 된다고 해서, 나는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를 고민했다. 하긴, 그러면 무엇도 쉽게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어쩌면 가족은 끊임없이 서로를 위한 ‘대리’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위해, 너는 나를 위해, 우리는 너를 위해, 그렇게 끊임없이 주체와 대리의 경계를 넘나든다. 나는 아직 모든 가족을 주체로 두는 방법을 잘 모른다. 하지만 아내하고든 아이하고든, 조금은 더 많이 대화하려고 한다. 기꺼이 그들을 위한 대리의 삶을 살며, 그렇게 조금은 더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다.
나의 아내는 자신을 규정할 만한 제대로 된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남성이 자신을 주체로 두고 주변을 상상하는 데서 만들어진 단어들을, 혹은 오염된 단어들만을 곁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의 아내뿐 아니라 모든 여성은 언어의 주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선택한 아내라는 단어는 어떠한 언어 권력과 폭력이 될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누군가가 아내는 ‘안에’라는 공간을 나타내는 단어라고 말해 주었는데, 그러면 마치 ‘집사람’ ‘안 사람’ 과 같은 의미가 된다. 하지만 아니라고 믿고 싶다. 아는 아내라는 단어가 가장 따뜻하게 나의 아내를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대학은 가의하고 연구하는 한 인간을 노동자로도 사회인으로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다. 학문의 길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환상만을 덧입히면서 그 대상을 어디에서도 주체로 서지 못하게 만들었다. 만일 연구하고 강의하는 것으로 나의 가족이 그럭저럭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다면, 혹은 건강보험과 같은 사회적 안전망을 보장 받을 수 있었다면, 나는 여전히 대학에서 학문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사회는 우리를 ‘대리인간’으로 만든다. 나아가 소중한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한다. 그러한 대리사회의 욕망은 결국 모두를 집어 삼키고, 주체로서의 자리 역시 빼앗는다. 하지만 그러한 고난의 시간을 추억으로 남겨서는 안 된다. 대학에서 10년 가까이 연구자로 있는 동안, 외로운 한 존재를 바라보는 이들은 그보다 더 외롭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들이 상처받기 이전에 ‘고맙다’거나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을 것이다. 그 시간이 지나가면 모두 추억이 될 것이라 믿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부는/ 가족은 한 동이의 물을 함께 지고 버티는 존재다 하지만 강태공도 허생도 물동이를 지려고 하지 않았다. 조금만 버티면 그것을 내려놓게 해주겠다면서 그 역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물이 가득 찬 물동이를 홀로 위태롭게 지고 있던 한 여인은, 결국 그것을 놓아 버렸다. 물을 쏟은 책임은 우선 자신의 역할을 외면한 이들에게 있다. 그러나 강태공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대신 아내를 원망했다. 허생 역시 아내에게 7년 동안 홀로 물동이를 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아내에게 자신의 ‘대리인간’이 되기를 강요했다. 대학에서 강의하고 연구하는 동안 나는 당신을 강태공과 허생의 아내로 만들었다. (…) 내 주변의 연구자들도 대개 나와 같았다.
우리시대의 노동은 대리노동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의 주체이면서, 또한 주체가 아니다. 대리운전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동네마트에서도, 장례식장에서도, 그 어느 노동의 공간에서도, 우리는 노동자가 아닌 ‘대리인간’으로서만 존재한다. 지금 이 사회에서 타인의 운전석보다 나은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지방시’라는 글을 세상에 내놓으며 계속 대학에서 강의하고 연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실 그러기 위해서 쓴 글이었다. 교직원이나 보직 교수가 그것으로 트집을 잡으면 그와는 싸워나가고자 마음먹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나를 찾아온 것은 동료들이였다. 같은 연구실의 연구자들이, 같은 교양과목을 강의하던 시간강사들이, 왜 자신들을 /대학을 모욕했는지를 나에게 물었다. 내 앞을 막아선 것이 갑이 아닌 을이었다. 대학의 구조에 문제를 제기한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었다.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을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또 다른 을이다. 반드시 폭언이나 폭력을 수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전쟁의 수행자가 된다. 내 주변의 목소리를 외면하거나 그와 나 사이에 선을 긋는 것 역시, 갑의 욕망을 대리하는 행위인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대학은 우리 시대의 가장 전근대적인 공간이다. 대학은 학생과 졸업생을 노동에 동원하면서도 그들을 숨을 노동자로 만든다. 말하자면 내부의 ‘대리인간’을 양산해 낸다. 나는 8년 넘는 시간 동안 대학에서 학생이자 노동자로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노동자로서의 감각을 느껴본 일이 없다. 지식을 만드는 공간이 가장 사람을 위하지 못한다.
‘힐링’이라는 단어의 소멸 이후 ‘분노’와 ‘혐오’가 우리 사회를 뒤덮었다. 개인들은 이제 더 이상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둘러싼 구조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N포 세대’로 대변되는 허무와 고독, ‘노오력’이나 ‘헬조선’이라는 비아냥과 냉소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차근차근 임계를 향하던 개인의 감정들이 최근에 이르러 실체를 드러냈을 뿐이다.
나는 대리운전 기사다 지문 잠금이라니, 그렇게 생체 정보를 입력하고 화면을 잠가두어야 할 만한 여유는 나에게 없다. 센서가 지문을 인식하는 1초는 너무나 길고, 말하자면 사치에 가까운 시간이다. 나는 곧바로 핸드폰에 걸린 모든 잠금을 풀었다. 나는 이 기계가 보내는 모든 신호에 즉각 반응해야만 한다. 눈을 깜빡이거나 코로 숨을 쉬거나, 귀로 듣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한 몸이 되어 교감해야 한다. 핸드폰을 나와 연결된 하나의 생체, 외부의 장기와 같은 존재다 그러지 않으면 거리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어느 외군인은 ‘한국에는 요정이 산다’라고 했다. 술에 취하면 대신 운전해 집까지 데려다주는 요정이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술을 얼마나 마셨든지 자신의 안방 침대에서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 자동차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고에 얌전히 주차되어 있고, 마치 요정이 다녀간 듯하다. 그래서 그들에게 한국의 대리운전 기사는 ‘요정’이 된다.
그렇게 기계가 된 이들을 다시 사람으로 호출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기사와 손님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거기에는 사람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을 여전히 기계로 두는 이들이 있다. 그저 핸드폰에서 간단한 클릭 몇 번을 하는 것으로 자신이 해야 할 그 무엇을 타인에게 대리시키면서, 그 기계 너머에 사람이 있음을 잊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고로움을 상상하지 못한다. 쉽게 호출을 취소하기도 하고, 아니면 기계를 대하듯 타인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발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간편함에 이끌려 사람을 상상하는 법을 잊게 되면, 그 역시 기계가 되어버린다. 타인의 처지에서 사유하거나 공감하지 못하고, "여기에 사람이 있어요"라는 누군가의 절망에도 무뎌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기계들의 밤이 열린다. 하지만 그 누구도 기계가 아니다. 나는 '지문'이 있는 한 인간으로서 그 밤을 걷는다. 이 거리에,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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