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돌아갈 곳이 생겼다.』, 노나리, 책나물, 2021
독립 출판이라는 것을 책을 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나서부터 알고 있었지만 실제 이렇게 독립출판을 한 책은 처음 만난다. (인터넷에서 알았다.- 정확한 것은 더 이상 확인은 해보지 않았다.) 처음 <엄마와 바다>를 읽기 시작했을 때 이정도의 실력이라면 꼭 독립출판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다. 그런데 조금씩 뒤쪽으로 갈수록 울진의 여행기로는 뭔가 부족함을 느끼게 되었다. 오늘 읽은 강원국 작가의 <어른답게 말합니다.> 란책에서 나온 이야기가 생각난다. 작가님께서 <대통령의 글쓰기> 책을 출간할 때 편집자가 했던 말이라고 했다. 글은 재미있는데 너무 개인 적인 이야기라는 것이다. 독자들은 재미있어도 의미가 있어야 하고 너무 개인적인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단다. 그런 의미에서 쉽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두께도 얇았지만 사진도 많아서 읽고 독서 메모까지 1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처음에 울진 여행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저자와 할머니와의 이야기라고 하는 편이 더 우울릴 것 같다. 사실 나는 그 이야기가 더 좋았다. 아마 울진 여행기였다면 딱히 읽어야 할 필요를 못 느꼈을지도 모른다. 울진은 아주 자주 가지는 않았지만 내 고향과 가까운 곳이고, 방문도 여러 번 했던 곳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책을 본다면 아쉬움이 있었겠지만 감성에세이를 좋아하는 나는 충분히 의미가 있고 좋았던 책이었다. 서점에서 구매하기에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 책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저자 소개
노나리
가능한 한 자주 여행을 떠난다. 낯선 세상과 부딪힐 때 받는 새로운 자극이 내 안의 뻔한 틀을 깨뜨려, 이전보다 조금은 더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여행서적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의 걷다』, 아동서적 『눈과 얼음의 도시 누크』, 학교 밖 청소년 인터뷰 모음집 『어디로든, 무엇이든』, 미얀마 여행기 <같이 걸을까 미얀 미얀 미얀마>를 썼다. 가까운 시일 내 이루고 싶은 목표는 여행책 두 권 마저 쓰기, 먼 목표 중 하나는 겨울에 그린란드로 여행 가기이다.
독서 메모
울진은 내 아버지, 어머니의 고향이다. 매해 설과 추석에는 읍내에 있는 외가를 경유해 화성리의 친가에 갔다. 귀성길 차량 정체는 괴로웠고 재래식 화장실은 몸서리쳐졌으며 명절 상차림을 돕는 건 귀찮았다. 그래도 밤하늘 곧 쏟아질 듯한 별구경이나 맑고 차가운 공기, 아궁이에 불을 때며 나무 타는 냄새를 맡는 건 좋았다.
다 아는 농작물도 희한하게 5일장에서 만나면 퍽 새롭다 대형 마트의 인동조명 아래에서는 잘 도드라지지 않던 작물 고유의 색감이 여기 햇빛 아래 난전에서는 가감 없이 드러난다. 호박도, 가지도, 양대도, 드릅도 새삼 신기하게 들여다보며 그 때깔과 자태를 감상한다. 이따금 작물이 쨍한 민트색 소쿠리나 선명한 붉은 색 함지박에 담겨 보색 대비까지 이루면 정말이지 미술 작품이 따로 없다.
버스가 비포장의 깎아지른 비탈을 아무렇지도 않게 기어오른다. 우당탕쿵탕, 바퀴에 바위 밟히는 소리가 요란하고 차체는 놀이기구마냥 들썩인다. 양옆으로 선 숲, 나뭇가지들이 버스 몸체를 싹싹 쓸어내릴 정도로 좁다란 길도 무심히 뚫고 간다. 아니 이 정도면 운전 기술이 아니라 운전 ‘무술’ 아닌가…? 버스비를 5천 원이 아니라 5만 원은 드려야 할 거 같은데요? 입이 떡 벌어진 채 소광리 정류장에 내린다.
첫인상은 이 시기 두메산골답게 그저 황량할 뿐이지만 찬찬히 거닐다 보면 그 고즈넉한 분위기에 절로 빠져든다. 공기는 청량하고, 창백한 햇살은 사방에 파리한 필터를 씌워 이 계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색을 낸다. 시커먼 고목과 바짝 마른 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말고는 도무지 고요한 마을 길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노라면 오로지 나 혼자라는 기분에 막막한 한편 평온하다. 외로워서 더 다정한 겨울, 산촌. 지금 여기를 여행할 수 있어 참 다행이다.
아예 들판을 황금빛으로 메우며 봄을 알리는 녀석도 있었다. 행곡 가는 길, 아직 마른 흙빛인 논과 작물이 겨우 연녹색을 띤 밭 중간에 불쑥 무언가가 눈부시게 솟아 있었다. 이 봄에 저리 누렇게 익을 게 뭐가 있나, 지금은 벼 나올 시기도 아닌데. 갸우뚱하다가 마치 불을 처음 발견한 원시인마냥 도 트는 소리를 냈다. 이게 보리구나! 겨울에 쌀 떨어지고 나면 다음 가을 추수 때까지 넘어야 한다는 보릿고개의 바로 그 보리구나.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는 처음 봐. 봄 햇살이 작물로 잠시 몸을 바꾸면 꼭 이런 모습 아닐까. 바람에 물결치는 모습이 말 그대로 찬란하다.
여행 안 가고 집에서 뭉개면서 게으름 피우는 날은 둘이서 방에 나란히 누워 소소하게 수다를 떠는 날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두서없이 오가는 와중에 이따금 당신의 소녀 시절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친언니와 동무들과 재미있게 놀았던 추억을 조곤조곤 풀어놓는 걸 듣고 있자면 어쩐지 슬퍼졌다. 할머니도 어릴 적이 있고, 같이 놀던 친구들이 있는 건데. 그 시절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때 그 소녀는 지금 행복할까.
할아버지 인생이 요동치는 대로 자식들의 인생 방향도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잘산다는 집에서도 딸은 중학교나 겨우 보내고 말던 그 시절에 매번 전교 1등과 전교회장을 도맡던 첫째 딸을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켰지만, 형편이 형편인 터라 원하던 국문학과에 진학시키지 못하고 뒤늦게 교육대학에 보내 선생님이 되도록 했다. 한편 빨갱이 집안이라는 낙인 때문에 국가고시를 통과하고도 마음 졸이던 둘째는 천만다행으로 연좌제가 풀리는 시기와 잘 맞물려 무사히 공직 발령을 받기도 했다.
“니 우리 정원에 꽃이 얼마나 이쁘게 핐는지 아나. 와서 보고 가라.” 자랑하는 할머니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낭랑하다. 모두들 붙들린 발목에 마음이 뒤엉켜버린 전염병 시국에도 할머니는 당신의 테두리 안에서 하루하루 밭과 정원과 화분을 돌보며 평정을 잃지 않는다. 광합성 하듯 홀로 있어도 늘 충만한 당신. 나는 당신의 그 단단한 기운을 그리며 이 시국 속 하루하루를 버틴다.
모전여전인지 나도 생미역이 좋다. 뻣뻣한 줄기를 오독오독 씹으면 쌉쌀하고 짭짤한 바다 맛과 향기가 입안에 확 퍼지는 게 좋다. 깔깔하니 떫은 뒷맛마저 좋다. 외가에 놀러 가 밥상에 생미역이 올라와 있으면 당장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생색을 내며 놀린다. “엄마! 나 지금 뭐 먹게요?”
“넌 스모키한 위스키가 취향이구나”라며 한마디 덧붙였다. “후각은 우리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부이랑 바로 연결이 돼 있거든. 스모키한 위스키가 좋았다는 건 스모키한 향에 대한 좋은 추억이 있어서일 것 같은데, 실제로 그래?” (…) 아, 나 어릴 적 화성리 친가가 나무를 댔지, 아궁이 앞에 한차 ㅁ쪼그리고 앉아 불구경을 했더랬지, 아욱이 위 가마솥에는 늘 뭇국이 한 솥 절절 끓었었지. 괜히 부지깽이로 장작을 들쑤시곤 했지. 열기에 못 이겨 밖으로 뛰쳐나오면 시린 시골 공기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양 정강이를 식혀줬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 게 내 안에 이렇게 남아 있었구나.
밤이 익는다. 할머니가 먼저 “나리야. 자자.” 하기도 하고, 할머니가 깜빡깜빡 조는 모습을 보고 “할머니, 불 끌까요?” 하기도 한다. 티브이를 끄고 형광등을 내리면 순식간에 고요한 어둠이다. 굽은 허리 때문에 항상 옆으로 눕는 할머니 곁에, 나도 옆으로 마주 눕는다. 괜히 할머니 손도 한 번 꾹 잡아본다. 안녕히 주무세요. 오냐. 잘 자.
마을 회관이나 시장 한편에는 항상 낡은 유모차가 한두 대씩 주차돼 있다. 노인 전용으로 나온 보행기와 달리 차양이 달려 있는 모습에 한 때 낯모를 어린 얼굴 위로 드리웠을 은은한 그늘 따위도 떠올려본다. 누구였을까, 손주 였을까, 혹은 이웃집 아이였을까. 걸은 서툰 젖먹이를 태우고 부지런히 마실을 다니다 어느덧 버려졌던 유모차가, 걸음 서툰 할머니들의 보행기로 제 쓰임을 새로이 찾아 마을회관으로 시장으로 다시 마실을 나와 있다.
살다가 마음이 뒤숭숭해질 적엔 핸드폰 앨범을 뒤적여 울진바다 사진들을 본다. 짙푸르고 시푸른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기억 속 세찬 바람과 비릿한 짠내, 천둥 같은 파도 소리를 되짚는다. 동해바다 풍경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사진만 놓고 봐서는 여기가 강릉바다인지 속초바다인지 알 게 뭐냐고 따지고 든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내 눈엔 달라. 무릇 사랑에 빠지면 흔해 빠진 것도 사뭇 특별해 보이는 법이잖아. 나는 종종 죽고 나면 가루 한 줌이 되어 이 바다에 뿌려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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