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 한순, 나무생각, 2021

그루 터기 2022. 2. 22. 13:53

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 한순, 나무생각, 2021

 

책을 고를 때마다 기도하듯 책을 고른다. ‘내가 원하던 책이 한 권이라도 선택되게 해 주세요

나는 감성에세이를 좋아한다. 굳이 표현하자면 문학적 표현이 살아있는 감성에세이가슴을 울리는 감성에세이면 더 좋아한다. 특히나 비슷한 세대의 글들은 공감대가 형성되어서인지 감동을 주는 경우가 많다. 몇 주 동안 열심히 책을 골랐는데 아쉽게도 그런 책들을 만나지 못했었다. 다른 부류의 책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골라서 오기 때문에 싫거나 덮어버릴 정도의 책은 거의 없다. 대부분 재미도 있고, 유용한 책들이다. 그러나 갈증을 완전히 해소하기에는 뭔가 아쉬운 부분이 한두 가지씩 있었다.

 

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그 갈증을 한 방에 날린 책이었다. 가슴에 전율이 이는 책. 나는 이런 책은 꼭 필사를 한다. 내가 닮고 싶은 책. 내가 쓰고 싶은 글. 바로 이런 글이다. 얼마나 많이 연습하고, 얼마나 많이 공부하고, 얼마나 많이 써야 이렇게 쓸 수 있을까? 크기지 않은 작은 일상을 이렇게 가슴에 와 닿게 쓰는 작가들을 보면 부러움이 나를 더욱 작게 한다. 이렇게 따뜻한 가슴을 가진 작가를 만나면 닮고 싶어 안달이 난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작가님이지만 어느새 아주 친근한 이웃인 듯 다가온 작가님!

다재다능하고 열정이 넘치는 이야기가 마음에 쏙 든다. 내가 제일 못하는 노래와 춤, 가끔을 좋아하던 등산, 아직도 희망사항인 시골집 짓기와 시골 살이. 그리고 시와 에세이의 멋진 문장까지. 부러운 점이 너무너무 많다. 같은 연배라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지다가도 문득 다가설 수 없는 높은 벽을 느낀다.

좋은 글을 책으로 엮어 주신 작가님께 감사하고 싶다.

 

독서를 끝내고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기 전에 첫 번째 필사를 마쳤다. 필사를 위해 독서대도 하나 샀다. 독서대에 놓고 필사를 하니 엄청 편한 걸 이제까지는 핸드폰으로 눌러 놓고 필사를 했었다. 지금까지 필사는 한 번씩만 했는데 다시 한 번 필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독서대 때문이 아니라 글이 좋아서다.

 

만약 내가 책을 내게 된다면 편집에도 내공이 느껴지는 한순 대표님께 부탁하고 싶다. 글을 잘 쓰는 게 먼저겠지만 말이다. 아니 작가님의 멋진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시인의 감성이 듬뿍 담긴 에세이를.

 

교보문고에 다녀와야겠다. 내 책장에 떡하니 꽂힌 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를 보기 위해.

 

(책 속에서는 오래전부터 작가로서 소질이 있는 작가님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이제 시작이니 여든 살은 넘어야 비슷하게라도 갈 수 있으려나.)

 

 

저자 소개

한순 글

1960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시인, 에세이스트며 도서출판 나무생각 대표다. 2015년 문화체육부장관 출판공로상을 받았다. 첫 시집 내 안의 깊은 슬픔이 말을 걸 때와 함께 한순 노래 모음 돌이 자란다를 발매했다.

 

김덕용 그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 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하였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UAE관광문화청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한국미의 고유한 특성을 나무와 자개를 사용하여 세계화시키고 있는 대표적 작가다.

 

 

독서 메모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그녀의 눈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의 눈 속에서 나는 서점에서 지루하게 손님을 기다리던 젊은 날의 남편과 나를 만났다.

 

봄비 한 번 내릴 때 우리도 한 번 착해지고 봄 새순 고개 내밀 때 묵은 감정에 숨구멍 생기면 좋겠다. 이름하여 너도 봄, 나도 봄!

 

진달래는 살짝 묻은 웃음 같은 꽃이다. 결혼을 하고 어느 시점 시점마다 과거의 그는 부분부분 사라져갔다. 그 모습은 물감이 바래가는 모습 같기도 하고 한지로 바른 얇은 문이 한 겹씩 닫히는 것 같기도 했다.

 

엇박자를 잘 놓던 그와 내가 일치할 때가 있다. 회갈색 나무를 배경으로 점점이 진달래 분홍 점이 찍힌 풍경을 볼 때다. 내가 그 꽃을 보며 지옥 같아.” 해도 맞아,”, “천국 같아.” 해도 맞아.”, “! 고혹적이다해도 맞아.”, “, 허무하다.” 해도 맞아.” 그는 진달애에 대한 나의 상상에 언제나 맞아.”로 대답한다. 길 위에서.

 

허무와 그리움 사이에 핀 진달래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찍힌 흔들리는 꽃 도장이다.

 

세월이 흘러 나는 그 반지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책을 만들어내는데 30여 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컴퓨터의 한쪽 구석에 늘 조각조각 구겨져 있던 나의 시를 시집으로 묶기로 했다. 그때 마침 젊은 뮤지션과 알게 되어 내 시를 가사로 한 노래를 작곡하게 되었고, 나는 가수의 꿈을 드. . . 펼치게 되었다. ( 진심의 박수를 보냅니다. 내 가슴이 다 두근두근 합니다. )

 

나는 약속을 미루고 혼자서 휴지들이 뒹구는 식당에서 속도 없이 냉면을 밀어넣었다. 점심이라기에는 좀 늦은 시간이었다. 식초를 몇 방울 더 떨어뜨리고, 겨자도 조금 더 넣고, 냉면 육수를 한 모금 삼키니 씁쓸함이 위장 속으로 떨어졌다.

 

오랜만에 서울로 올라오신 엄마는 늙은 호박 같이 속이 말라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의 웃음은 노랗고 따스했지만 왠지 허전했다. 그런데도 손자와 사위가 좋아하는 주물럭 요리는 꼭 해주고 싶어 하셨다.

 

그래, 엄마, 이거 내가 가질게.” 하며 순순히 받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엄마와 만나면 서로 돈을 주겠다고 싸우다가 결국 상한 마음으로 헤어지고는 했다. 그때마다 그냥 내 돈 좀 받아가면 내 맘이 편하잖아.’ 하며 나는 엄마를 원망하기도 했다. 엄마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도, 결국은 부딪치고 헤어질 때는 마음이 좋질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몇 칸쯤 채워지지 않아 미완성이었던 퍼즐이 한 조각씩 맞춰지며, 엄마의 마음을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내가 엄마에게 이렇게 주고 싶은데, 엄마는 나에게 얼마나 주고 싶었을까, 그 마음이 이해되었다.

 

실수” “수줍음” “ 자기답게 보이기” “올바른 생활로부터의 자유” “무능함” “어리석음” “부와 명성으로 부터의 자유” “ 일단 당신 자신과 화해하라. 그리고 기억하라. 가장 완벽한 순간은 대개 가장 불완전한 시간에 만들어진다.” “완벽할 필요 없다.”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나리라. 밤기차를 타고 달려 내려가 새벽녘 지리산 자락에 다다르리라.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조팝나무 연둣빛 싹들을 만나리라. 온 산천이 연둣빛으로 빛나는 곳에서 오월로 샤워를 하리라. 찌들고 묵은 욕심, 반복되는 일상을 피톤치드 비누로 씻어 내리라. 돌아오는 길, 나의 발자국마다 연둣빛 봄이 고이게 하리라.

 

시골 생활을 하면서 문득문득 만나게 되는 이 자연스러움(?)에 몸이 움츠러들곤 한다. 그런 자연, 스스로 그러한 것들 앞에서 그저 나도 그러한 듯 견디며 지나가야 한다. 벽 틈을 파고드는 바늘귀 황소바람 앞에서도, 새끼를 데리고 먹이를 찾는 고라니 앞에서도, 무슨 업인지 온몸을 땅에 대고 구불구불 기며 살아야 하는 뱀 앞에서도. 아직은 그들과 우리 사이에 어떤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를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나 선조들의 이야기와 경험으로 미루어 모두 존재의 이유가 분명히 있기에, 그들은 그곳에 있고, 나는 이곳에 있다. 내가 잠든 시간에도 굴참나무 도토리는 종자를 떨어뜨리고, 내가 번민에 싸인 시간에도 바람은 나무를 흔들어 깨운다.

 

스스로 그런 자연 앞에서 나는 자비와 무자비가 비빔밥이 된 여르을 맞게 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사전적 정의가 무너지는 것이 한편으로 혼돈스러우면서, 한편으로는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다. 무엇인가 그동안 나를 누르고 있던 금형 프레스 같은 것이, 가벼이 날리는 아카시아 향기에 실려 사뿐히 사라진 기분이다.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손바닥 가득 달빛을 받았다. 부드럽고 유순한 달빛이 손을 넘어 가슴에 담기나 쉽더니 머릿속으로 들어와 모든 개념을 소리없이 무너뜨려 놓았다. 무너져 내린 그곳은 넓고 평화로웠다.

 

초록이 마음껏 팔을 뻗은 산과 들을 달리며 내가 자란 옛집의 풍경을 떠올려보는 일은 흥미롭다. 그중 어느 장면들은 나를 이해하는 훌륭한 단초가 되기도 한다. 나는 요즘 나를 알아가는 시간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사이가 좋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주변에 의해 많은 지배를 받고 사는 것 같지만, 주변을 받아들이는 스스로의 프리즘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 듯하다. 그러니 문제는 나 자신이고, 나를 알기 위해서는 자라온 환경을 살피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백두대간을 품에 안고 있는 산방에 야생화 꽃 같은 작은 웃음이 번졌다.

 

얼마나 내려놓고 내려놓아야 이 달마같이 온화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얼마나 썩고, 남몰래 울어야 마리아처럼 순종할 수 있을까? 벗은 얼마나 많은 마음을 이 돌조각과 함께 내려놓았을까? 돌조각을 닦던 마음이 울컥했다.

 

선머슴처럼 떠돌던 마음이 이제 와 새삼 여성의 자리에서 움찔했다. 냉장고를 차곡차곡 정리하는 여성에게, 한 끼 밥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살림 선배에게, 자신 몫의 슬픔은 이미 정기예금에 맡겨버린 예쁜 후배 여성들에게 느끼던 선망의 마음은 이런 여성성이었을까? 우주, , , , 이들이 가진 여성성이 경이롭게 다가왔다. 아우르고 독려하고 참고 키우고.

 

이제는 내 자신으로 돌아가려고, ‘를 찾아보겠다고 나선 길에 오지랖이 더 넓어져버렸다. 여성이지만 다시 더 큰 여성을 선망하는 마음. 늘 가까이에 있었던 오빠나 아버지의 흉내를 내며 살아왔지만, 내 속에서 여성이 다시 노크를 하고 있었다. 녹색의 에너지가 하늘을 향해 거칠 것 없이 뻗어가고, 대지가 곪고 썩는 여름 한복판이다. 이 싱싱하고 푹푹 썩는 무더운 여름이 유난히 여성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제 와 새삼.

 

손을 씻으면서 그가 설컹이는 마음과 알 수 없는 허허로움, 그리고 들썩이는 엉덩이와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심정을 알 것 같았지만, 이런 문구들에 대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욕심은 제 모습이 부끄러운 줄 알아 변장술에 능하니 한밤 깜깜한 어둠 속에 나직이 불러 차 한 잔 할 일이다.

 

작은 오빠와 늘 좋았던 것은 아니다. 서운한 순간도, 갈등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건빵을 품에 안고 낯선 서울의 어느 단칸방으로 달려오던 군인, 작은오빠. 그 장면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핑 돈다. 아버지, 엄마, 오빠, 언니가 준 사랑으로 나는 삶의 어렵고 각박한 시절을 잘 넘을 수 있었다. 작아도 나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배웠다. 내 인생에서 가장 촉촉한 건빵이다.

 

격물치지,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앎에 이른다는 뜻이다. 사람 관계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앎에 이를 수 있을까? 사람과 의 관계에서는 마음껏 가까이 가보지도 못하고,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단계에서 대부분 상처를 받고 떠나고 배신하고 분노한다.

 

눈물을 흘리게 될 때도 북한산에 오를 것을 생각하면 위로가 되곤 했다. 그곳에는 도시와는 다른 질서와 아름다움이 있었다. 겸손한 마음만 있으면 누구도 공격하지 않았고, 조금씩 배려하면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곳이었다. 허공이 있고, 바람이 있고, 나무가 있고, 바위가 있었다. 계절에 따라 피는 꽃의 아름다움도, 떨어져 뒹구는 낙엽도 자연스럽게 흐르고 흘렀다.

 

너무 평화로워 막막하기까지 했던 내소사의 여름, 나무와 절과 하늘과 구름 사이로 떠다니는 빈 공간이 보였다. 어느새 나이를 먹어버린 나는, 둥실 공간 위로 떠올라 그날의 젊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였다. 이 느낌을 사진에 담아 두고, 나이든 어느 날 이 사진을 꺼내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소사를 보러 간 것이 아니었다. 내소사의 향기와 빈 공간이 그리웠을 것이다. 어쩌면 막막함의 구체적인 느낌이 더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길가에 은행잎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말이 없는 나를 대신해 남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 노란색이 말이야. 미친년 빤스 색깔 같더라고.” 내가 없는 동안 혼자서 열한 살, 다섯 살 두 아이와 앓아누운 노무 사이를 다니며 바라보았을 은행잎 색깔. 그도 얼마나 낯설음이 그리웠을까? 모든 책임을 벗어버리고, 모든 인연을 모른 척하며 얼마나 떠나고 싶었을까? 나는 대답대신 창밖으로 얼굴을 돌려 은행잎을 바라보았다. 11월이었다. 욕망이 한 꺼풀 내려앉는 11, 낯선 곳을 향해 뻗던 넝쿨이 걸음을 멈추는 11.

 

기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멀리 한적한 마을이 바라보인다. 그러나 기차는 어느새 그 마을을 지나고 만다. 휙휙휙, 거리의 나무도 빠른 속도로 스쳐 미처 바라볼 겨를이 없다. 이제는 간이역에서 용기 있게 내릴 것이다. 그리고 마을로 난 오솔길을 걸을 것이다. 아주 천천히, 오솔길과 한적한 마을이 내 삶 속으로 가만히 내려앉을 수 있도록. () 속도를 멈춘 그 자리에 산 자와 죽은 자의 해후가 마련되었다. 언니와의 이별은 나의 발걸음을 느리게 했다.

 

삶의 어느 모퉁이를 돌아 그가 이런 호흡의 노래를 갖게 되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저 지극함에 다다른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지극함이란 순리에 따르는 것, 피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이는 일. 때론 그 순리가 잔인하게 느껴질 지라도 그 속에 섞여 흐를 것. 이런 삶의 애환을 그가 스쳐온 것은 아닌 가 유추해볼 뿐이다.

 

서툰 숟가락질과 허기진 입ㄷㄹ이 겨울비 속에 지나다니고 뜨끈한 훈기, 후루룩 한 모금 아직은 말 말거라. 지평선 가득 밥 짓는 냄새 날 때까지 나는 굽은 허리로 더 휘어진 소나무 숲속으로 걸어가리라.

 

아담한 초등학교 운동장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늘어서 있는 작고 평화로운 마을 끝자락 언덕 위에 있는 집이었다. 마을 도로를 따라 평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산속 언덕으로 100미터 가량 올라간 숲속에 오도카니 집 한 채가 앉아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너무 외져 무섭다고 했을 텐데, 이날은 그 집이 눈에 쏙 들어왔다. 나는 그 집을 얻겠다고 말했고, 이곳저곳을 헤매던 차라 남편도 어물쩍 끌려들고 말았다.

 

산속 언덕 집에서 1년 반 정도의 월세살이를 마치고 짐을 싸 나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쇼팽의 녹턴을 하루에 다섯 번씩 주말마다 들었으니 한 달이면 40, 1년이면 사백팔십 번, 1년 반이면 칠백이십 번을 들을 셈이었다. 그렇다면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열과 성을 다해 만났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그들에게 과연 나는 최선을 다 했던가 사람에게 지칠 때마다 나는 자연 속에서 홀로 쉬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밤을 지나며 쇼팽과 만났던 것처럼, 한 사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최소한 칠백이십 번은 만났어야 하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시골집에 고요히 앉아 겨울나무 빈 가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많은 문제들이 자명하고 단순해진다. 하지 않아야 할 일과 해야 할 일에 대한 판단은 시골집에 있을 때 훨씬 자명해진다. 반면 도시는 무엇인가 과부화의 연속이고, 그것은 질긴 끈처럼 사람을 당긴다. 아무도 묶은 사람은 없으나 모두 묶여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묵묵히 스스로가 묶어 놓은 삶에 충직하다.

 

신념이 확 무너져 내릴 때 인간이 자연으로 한 게단 한 게단 내려갈 때 소리 한 번 치려고 겨울 강가에 다다랐으나 겨울 강도 입을 다물었다. 네모난 책처럼 강물이 풀려 한 글자, 한 글자 물처럼 스미는 책을 좋아했다. 책 동네에 산 것이 참 다행이다.

 

직장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손만 뻗으면 만질 수 있는 가족들 사이에서 미움은 자연발생적이다. 그러나 미움의 화살을 내쏘기 전에, 나만의 사연을 펼쳐 볼 수 있는 자성의 시간을 갖는다면, 최소한 몇 분만이라도 화살을 자신에게 돌려본다면 마음이 만들어 낸 가시에 스스로 찔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주말이면 파란색 체크무늬 가방을 들고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나는 도피처로 가고 있는가. 안식처로 가고 있는가?” “나는 타인에게 도피처인가. 안식처인가?” “ 나는 나 자신에게 도피처인가 안식처인가?”

 

, 여름, 가을, 겨울 색깔이 다른 교과서가 시간에 따라 펼쳐지는 곳이 자연이다. 매년 친절하게 말없이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우리의 나이만큼 반복해서 가르쳐준다. 식물이 떨어뜨린 씨앗 하나가 생명의 움을 틔우기까지, 두더지는 포슬포슬하게 땅을 일궈놓고, 빗방울은 대지의 목마름을 적셔놓고, 또 낙엽은 이불을 덮어 온기를 지켜준다. 무심한 듯 자신의 일을 하지만, 이런 무심들이 모여 하나의 생명을 빚어낸다.

 

헉헉 차오르는 숨을 고르려 허리를 펴자, 옆집에서 테라스 문을 열고 나왔다. “뭐 해요? 차 우리 집 주차장에 세워요.”하고 소리쳤다. 나는 아니에요. 조금만 밀어 놓으면 햇빛이 녹여줘요. 햇빛이 아까워서요.”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더니 들어갔다.

 

열정이 자기중심적 에너지라면 사랑은 상대 중심적 에너지일까? 그러나 많은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면서 타인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애달픈 혼돈이다. 연인의 사랑이든, 부부의 사랑이든,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든 이 혼돈은 늘 존재한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들어주는 마음이 충만하다면 아마도 그것을 사랑일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의지대로 말하지 않고 상대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볼 것이다. 밤에도 홀로 피는 저 열정, 내가 나 자신을 혼돈하게 만드는 저 열정과 사랑을 좀 더 깊이 바라볼 걸 그랬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나면 다른 사람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늦었지만, 이제라도 알게 되어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