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빙하 같지만 그래서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 한은영, 이봄, 2021
저자 소개
한은영
서늘하고 날카로운 시선을 가진 소설가다. 물이 얼어 얼음이 되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기록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마냥 차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무언가를 숨기지 않는, 솔직함이 한은형의 미덕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는 때때로 놀라울 정도로 관조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자기 자신을 풍경처럼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한은형일 것이다.
한은형은 장편소설 『거짓말』로 제 20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를 썼으며 테마 소설집 『도시와 나』, 『안녕, 평양』에도 작품을 실었다. 에세이로는 『우리는 가끔 외롭지만 따뜻한 수프로도 행복해지니까』, 『오늘도 초록』, 『베를린에 없던 사람에게도』 등의 책을 썼다
독서 메모
나는 약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강한 사람”이지 않나 싶다. 그래서 일단 올해는 꿋꿋하고 강하게 살아보기로 한다. 나의 그녀들처럼 말이다. 그녀들이 너무 멋져서 애정과 우정을 담아 쓸 수 있었다.
안 나 카레리나의 매력은 한마디로 "너무 많이 느끼는 여자야" "살아있는 사람이며 내게는 죄가 없다는 것을 신이 나란 사람을 사랑하고 살아 숨 쉬어야 하는 인간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안 나는 한마디로 올림포스 지혜의 여신 아테나였다.
사랑했다. 그것도 지나치게. 안나 카레니나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 그녀는 인생의 다른 모든 행복보다도 사랑을 중히 여기는 여자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사랑으로 ” 브론스키를 사랑했다. 이게 왜 나쁜가? 나쁘다. 안나가 살던 19세기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는 아주 나쁜 일이었다.
사랑의 말들은 한 발짝 멀어져서 보면 유치하고 졸렬하기 그지없다. 이 사랑의 맹세 때문이었을까? 안나는 회복된다. 이 ‘유사 죽음’의 체험이 안나에게 남긴 교훈은 이렇다. ‘사랑이 위험해졌을 때는 죽음을 이용하라.’ (…) “아아! 어째서 나는 죽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이제라도 죽으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졌다.
여자들의 이름을 적다가 충격에 빠졌다. 이 여자들은 남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여자들에게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기회는 극히 한정되었고, 제대로 된 ‘유리한’ 결혼을 하는 게 삶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돈키호테, 로빈슨 크루소, 파우스트, 오디푸스 왕, 율리시스, 데미안... 역시, 남자들은 달랐다. 그들에게는 전쟁이, 모험이, 출세가, 입사가 있었다. 세상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고도 여유가 있을 때 남자들은 연애를, 때로는 사랑을 했다. 여자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여자들에게 육체적 모험과 정신적 모험이 허락된 길, 그러니까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연애 혹은 사랑. 그러니 전부일 수밖에.
『엠마』를 읽고 나서 제인 오스틴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평생 자기 방을 가진 적도 없고,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인 오스틴이 '다 가진 여자' 엠마에 대해 질시하거나 냉소하지 않고 공평하고도 균형 잡힌 태도를 취하는 걸 보면서 마음이 뻐근해졌던 것이다. 나는 이런 배포가 있는 '큰 사람' 앞에서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런 그녀에 대해 버지니아 울프가 한 말을 적어본다. "1800년경 증오나 쓰라림,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항의하거나 설교하지 않으면서 글을 쓴 여성이 있었다."
아처는 엘렌의 세련됨을 발견하면서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또 엘렌과 한자리에 있는 늙은 부인들을 보면서 아처는 "그 얼굴들이 엘렌에 비해 신기할 만큼 미성숙해 보인다는 느낌" 을 받으며 엘렌의 눈을 그렇게까지 깊이 있게 만든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니 두렵기까지" 하다고 느낀다. 아처에게 세련이란 미숙의 반대말이기도 한 것이다. 그에게 세련된 여자란, 의식이 세련된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련이란 무엇인가. 사랑이 그런 것처럼 사람마다 다른 정의가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뉴요커들에게 세련이란 캐럿이 큰 보석들과 모피코트와 신식 옷차림에 둘러싸이는, 요란하고 반짝이는 ‘외모’를 갖추는 일이다. 아처가 보는 세련은 다르다. 문학적 묘미나 정신적인 것을 나눌 수 있는 ‘내면’을 가진 게 세련된 거다. 아처가 바로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엘렌에게 세련이란? “정말 모두가 그걸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거예요? 각자 자기 방식대로 세련될 수 없는 건가요?”라고 말한다. 아처보다도 한수 위로 보인다. 나는 이렇게 말하는 여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처음 볼 때부터 제멋대로 키스를 하고, 테스를 거의 윽박지르다시피 해서 테스와 자게 되는 그 남자를 떨치고 집으로 돌아온 테스에게 그녀의 엄마는 말한다. 결혼할 것도 아니었다면 ‘몸조심’을 했어야 한다고. 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남자들이 위험하다고 왜 말해주지 않았어? 조심하라고 왜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신사 집안 아가씨들은 남자들의 술수를 소설에서 읽고 뭘 경계해야 하나 알게 되는디, 난 그런 식으로 배울 기회가 없었어. 엄마도 도움이 되지 않았어.”라고. 당시에도 테스보다 나은 처지의 여자들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으며 연애와 결혼에 대해 배우기도 했을 것이다. 배운다고 해서 인생에 대해 속지 않는 건 아니지만.
페르미나 다사라는 인물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에 따라서 우리가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은 어떤 그 누군가를 만나지 못해서일 수 있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다면 그 누군가를 만나서였을 수도 있다는 것을.
단순하면서도 심원한 이 소설의 비밀을 깨달은 나는 좀 다른 눈으로 이 소설을 보게 되었다. 예전의 내가 먼 거리에서 워더링 하이츠를 올려다보았다면, 지금의 나는 비바람이 치는 워더링 하이츠에 서서 미칠 듯이 일렁이는 히스들과 함께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길지도 않은 내 머리카락은 바람에 날려 산발이 되고… 나는 그런 채로 완악한 바람이 대기 중으로 풀어놓은 히스 입자들을 보고 있다.
요코를 보면서 사람의 성격이라는 게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난폭은 격정이 될 수도 있고, 어두움은 은밀함이 될 수도 있고, 험상궂은 기운은 용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 어떤 상황을 만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버티기도 하고, 폭발하기도 한다. 폭발을 제대로 할 수도 있고, 불발되기도 하는데, 어떤 폭발은 ‘히스테리’라 불리고 또 어떤 폭발은 ‘기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게 베이커의 매력이다. 자세가 꼿꼿하고, 자신감이 있고, 사근사근하지 않고, 단단하다. 나는 이런 인물들에게, 특히 이런 여성 인물들에게 매료되는 편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자들은 애교나 사랑스러움을 가지라는 식의 내면화된 교육을 받고 자라게 되는데, 내가 "왜 이렇게 애교가 없어?" 라며 종종 비난받았던 사람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그녀들을 통해 느꼈고, 그런 그녀들로부터 지지받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나는 조던 베이커가 나스따시야 같은 인생 역정을 겪었더라면 나스따시아처럼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나스따시야에게 조던 베이커가 얻었던 제대로 된 기회 같은 게 있었더라면 조던 베이커처럼 자기 이름을 걸고 세상과 승부하는 여자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두 여자는 비슷하다. 애교나 사랑스러움을 임하지 않고, 자신감이 있고, 사근사근하지 않고, 단단하다. 남자에게 속박되지 않고 자기 자신인 채로 살고 싶어 한다. 또 자존심이 상당하다.
다른 것은 자존감이다. 베이커가 자존감도 높고 자존심도 있다면, 나스따시야는 자존감이 거의 바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상처받은 여자'인 나스따시야는 자존심을 세우는 것으로 자신의 망가진 인생과 망가진 자존감을 회복하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러면 그럴수록 자존감은 더 없어지고, 자존심은 망가지고, 자신감은 사라진다는 것을. 나는 상냥할 수 있을 때의 나를, 그 누구보다 힘 있는 사람이라고 느낀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나는 소설가 말고는 되고 싶은 게 없었고, 그때까지의 내 삶은 소설가가 되기 위한 잉여의 삶이라고 생각해왔는데, 그래서 맞지도 않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소설가가 못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고,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버텼다. 쿤데라, 존 드릴로, 쿳시, 안젤라 카터, 베른하르트, 슐링크 토마스 만…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들을. 그래서 ‘절망적으로 좋아했었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것들 말고는 좋아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람이니 절망적으로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도 델핀 루를 이해한다. 책으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고, 책에서 빠져나와 다른 인생을 살고 싶기도 하지만, 모든 삶의 기준이 책으로 형성된, 아이러니한 그 여자를 말이다. 이를테면 이 문장을 보자. "그녀와 눈길을 마주치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그녀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들이다. 그리고 읽고 있는 책에 푹 빠져있는 사람들,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주변 상황은 안중에 없는 사람들과 마음을 꿈틀거리게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그냥 자기들이 읽고 있는 책에 푹 빠져 있을 뿐이다. 그녀가 찾으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녀는 자신을 인정해 줄 남자를 찾고 있다. 그녀는 위대한 인정 능력을 지닌 사람을 찾고 있다."
나는 에스더에 대해서, 에스더와 같은 삶을 이미 살았던 실비아 플라스를 생각하면서 이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1950년대라는 시대의 공기와 함께 그녀들을 떠올리면 말이다. 1950년대 여자들에게는 요리와 속기와 춤이 필수로 요구되었다는 걸 <벨자>를 읽어 알게 된 나는 에스더처럼 토할 것 같았다. 요리와 속기와 춤은 저마다 멋진 것인데, 이게 여자들에게 필수 덕목으로 요구되는 상황은 정말이지 끔찍하다. 남자를 돌보거나 보조하거나 기쁘게 하는 일들이 여자의 필수 덕목이었던 시대에 에스더 같은 여자는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테레사는) 육체를 통해 자기를 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자주 거울을 보았다. 그년ㄴ 그러다가 어머니에게 들키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거울을 보는 그녀의 시선은 은밀한 죄악의 흔적을 띠었다. 그녀의 얼굴 구석구서에서 드러난 자신의 영혼을 본다고 믿었다.
그녀는 짧게 깍은 그의 뒷머리를 손으로 가볍게 어루만졌다. “소시민님!” 그녀가 말했다. “약간 침윤된 얼룩이 있는 귀여운 시민님, 나를 그토록 사랑하는 게 정말이야?” 그녀의 손길이 닿자 그는 감격에 겨운 나머지 두 무릎을 다 꿇고 머리를 뒤로 적히고는 계속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말을 하면서, 아주 즐기면서 말이다. “아름다운 건 더럽고, 더러운 건 아름답다. 날아다니자, 안개와 탁한 공기 속을.” 내게는 그녀들이 세상을 상대로 현란한 그루브를 타면서 춤을 추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춤의 목적은 춤 그 자체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이겨야 하는 싸움에서는 이겨야겠지만, 그러고 싶지만, 그게 꼭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아는 나는 바베트처럼 말하게 될 것이다. “어떡하겠어요, 그것이 제 운명인데요.” 나는 이 말을 하면서 바베트처럼 웃고 싶다. 바베트가 어떤 얼굴로 웃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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