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일상이 미니멀』, 진민영, 책읽는 고양이, 2021

그루 터기 2022. 3. 7. 07:35

일상이 미니멀, 진민영, 책읽는 고양이, 2021

 

2021년 중소출판사 출판콘텐츠 창작지원 선정작

 

 

저자 소개

진민영

미니멀리스트, 에세이스트. 내향인

적게 소유하고 싶어 사유하고 풍요롭게 향유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자유, 성장, 간소한 생활에 관한 글을 씁니다.

조그맣게 살 거야》 《내향인입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독서 메모

 

하고 싶은 일의 출처는 나의 내면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꺼이 하고, 하지 말라고 뜯어 말려도 어떻게든 하게 된다. 반대로 해야 하는 일은 나의 외부에서 기인해, 그 일을 하게 하는 동기 또한 외부에 의지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루 이틀만 해도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고생을 하나 싶은 억울함이 드는 일이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면 원하는 목표가 아닌, 좋아하는 마음부터 찾아 과녁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좋아하는 마음으로 과녁을 향해 던지는 화살은 던지는 족족 명중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긴 시간 10점짜리 다트를 모으면 마지막에 명중시키고 싶은 정확한 목표지점이 생겨난다. 전보다 더 구체적이고 간절한 'want'를 향해 지금껏 모아온 연습의 힘으로 회심의 일격을 날리기만 하면 된다. 그저 좋아하는 마음에 하기 시작했던 많은 일은 씨앗이 되어 자연스럽게 목표의식이라는 싹을 틔운다. 그렇게 틔운 싹은 성취라는 꽃으로 만개한다.

 

스스로를 귀하게 대접할 수 있는 작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좋은 식재료로 건강한 한 끼 밥상을 차리는 일이다. 건강한 식탁만큼 나에 대한 분명한 배려와 존중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앉아 있는 동안 뇌를 사용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뇌는 움직임이 있어야 일을 한다. 산책을 하는 동안 좋은 생각이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오는 이유가 설명된다.() 안락함으로 한없이 기울어지다가도 사이사이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불편이 알람을 울려준다.

 

품위 있는 소유는 웬만한 소비보다 만족감이 높다. 가진 것을 살뜰하게 관리하고 사는 곳을 정갈하게 유지하며 얻는 만족이, 매번 새것 을 구입하며 충족할 만족보다 질도 높고 지속성도 어 있다. 무언가를 새롭게 사고 소비하는 행위 이상으로 가진 것을 소중하게 쓰고 돌보며 얻는 만족이 결코 적지 않다.

 

우리 삶을 이루는 많은 것들은 적당히 거리를 두었을 때 비로소 본질을 드러낸다. 지나치게 가까이 있으면 근시안적으로 인지하게 된 다. 어떤 것의 쓰임을 정확하게 되묻고 의도를 명확히 파헤치기 위해서는 멀찍이 떨어져 관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물건일 경우 보다 유용하고 현명하게 사용할 지혜를 터득할 것이다.

 

삶이 글이 될 수 있는 비결은 특별한 재능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태만하지 않고 성실히 꾸준함을 쌓고, 그 사이사이를 적절한 체계로 안 정적으로 지탱한다면, 매일 쓰는 힘은 자연히 생겨난다. 막연한 생각은 글자로 남겨도 그 자체로는 어떤 가치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흘려버린 글과 일상을 정해진 시간에 약속된 규칙에 따라 잘 정돈하고 분류하고 배열해 모양을 잡아 갖추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삶은 하나의 멋들어진 오브제가 된다.

 

내손으로 땅을 고르고 설계 도면을 그리고 무엇으로 벽을 쌓아 올릴지 선택하는 생활을 시작할 때 기존의 사고방식은 낡아 껍질이 되어 버린다각인된 편견, 협소한 시야와 작별하고, 깨끗한 백지 상태에서 아무런 인지적 전제 없이 사물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의견을 제시한다. 주어진 선택지중에서 고르는 일이 아닌, 선택지부터 창조하며 꼭 맞는 책갈피를 찾는 일이다.

 

백지상태에서 다시금 삶을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좀 더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의식주부터 직업과 윤리, 행복 과 가치까지 나만의 분명한 기준을 세움으로써 나와 삶 사이의 괴리를 최소한으로 좁히고, 나아가 그 둘의 합치를 꾀 할 수 있게 된다.

 

자유가 정도가 지나치면 아이디어는 진부해진다. 성벽을 뛰어넘어 자유를 쟁취하고자 한다면 먼저 자유를 제한할 성벽을 경험해야 하 고, 선택의 기쁨을 충분히 맛보려면 무엇 하나 자유롭지 못했던 과거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창의성은 까다롭고 변덕이 심해, 지나치게 유복한 환경에서는 도리어 게으름을 피운다. 집념은 선택지가 많지 않은 환경에서 가장 무르익는다.

 

삶에서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작고 사소한 변화야 수동적인 형태로도 어느 정도의 자극을 줄 수 있지만, 생활의 뿌리를 흔들고 사고의 전환을 가져올 큰 변화는 자력으로 만들어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오직 변화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야만 고착 된 나의 사고와 행동도 변형을 시도한다.

 

환경에 의지하지 않고도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 중 한 가지가 새로운 외국어를 습득하는 일이다. 어쩌면 환경과 사람 그 이상으로 언어는 삶의 크나큰 변곡점이 될 수 있다. 한 언어는 그 언어로 소통하는 민족의 모든 생태와 습성을 품는다. 그들의 언어를 모방하다보면, 사고하는 방식, 느끼는 감정의 결, 특정 상황에 반응하는 태도, 생각이 미치지 못한 세밀한 영역까지 그들을 닮는다. 그러나 외국어는 아무리 배워도 일정수준 이상으로 내 안에 스미지 않음에 또 한 번 나와 모국어 사이의 놀라운 결속력을 실감한다. 언어는 본능보다 더 가까이 우리의 정신을 지배한다.

 

언어가 우리의 의식 세계를 장악하고 있기에, 새로운 외국어를 습득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시선 하나를 얻게 된다. 구사할 수 있는 외국어가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나는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방식으로 말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자신을 만난다. () 경험의 폭은 극히 제한적이라, 체험하며 추구할 수 있는 변화는 사실 많지 않다. 매일같이 사는 장소에 변화를 주거나 만나는 사람을 바 꿔 사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비슷한 환경에서 늘 마주치는 사람과 어울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게 일상이고 현실이다. 그 와중에 도 삶의 변화를 갈구하기를 포기할 수 없다면, 같은 세상이지만 다르게 인식하고 조망할 수 있는 시각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어떤 한 국기 종목에서 공을 잘 다루는 기술이 좋아지면, 구기 종목 전반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진다. 마찬 가지로 외국어 한 가지를 잘하게 되면, 그 언어권의 민족과 문화, 역사와 전통이 낯설지 않게 된다. 나아가 그것은 윤택한 삶을 지원하는 용기와 성장의 자산이 된다.

 

커피는 향기롭고 아름다우며, 동시에 섬세하면서 경쾌하다. 부드럽지만 명랑하고 우아하면서도 무겁지 않다. 커피로 말미암은 모든 행위와 수식에는 기품이 있다. () 반복된 동작이 몸에 배면 행위의 시작도 그만큼 선명해진다. 신성시 하는 어떤 행위를 시작하기 전에 요리사도, 소설가도, 화가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의식을 치른다. 느리지만 정직하고 고요한 아침 10분을 커피가 벌어준다. 일관된 순서와 규칙, 정량과 인내가 있는 커피는 아침을 맞기 가장 좋은 시작이다. 익숙한 동작을 따라가다 보면 어김없이 커피 한 잔이 만들어지고, 만들어진 커피를 마시며 오늘 할 일을 차분히 곱씹는다. 이 시간이 없었다면 버벅대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완성된 커피 한 잔이 테이블 위에 오르면, 나의 하루도 숨고르기를 끝내고 기운 낼 태세를 갖춘다. 쓴맛 나는 음료 한 잔이지만 적지 않은 서사가 담겨 있다.

 

크고 굵은 만족에 다다르고자 한다면 그 사이사이를 관통하는 세밀한 영역을 오랜 시간 무던히 돌보아야 한다. () 내 삶의 만족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많은 일들은 이렇듯 작고 보잘것없다. 살고 싶은 인생, 세상을 지배할 대찬 포부도 그 시작은 지극 히 작고 개인적이다. 자신의 몸, 자신이 사는 곳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서 더 넓은 세상을 제 뜻대로 주무를 수 있을 리 없다. 역사 속 주목할 만한 대부분의 변화는 아주 작은 일에서 비롯되었다.

 

내 삶의 만족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많은 일들이 이렇듯 작고 보잘것없다. 살고 싶은 인생, 세상을 지배할 대찬 포부도 그 시작은 지극히 작고 개인적이다. 자신의 몸, 자신이 사는 곳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서 더 넓은 세상을 제 뜻대로 주무를 수 있을 리 없다. 역사 속 주목할 만한 대부분의 변화는 아주 작은 일에서 비롯되었다.

 

립스틱처럼 나이를 먹어야만 알 수 있고, 할 수 있고 어울리는 일이 적지 않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이 먹는 것을 여러 가지를 잃어가는 과정으로 보느냐 쌓아가는 과정으로 보느냐에 따라 인생의 질이 확연히 달라진다고 말했는데, 나는 삶을 살아내는 태도가 명백히 후자에 가까운가 보다.

 

먹어가는 세월에 후회, 미련, 아쉬움보다 기대와 셀렘, 안도와 감사가 더 많다. 어떤 방식으로든 나는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 더 상냥하고 너그럽고 지혜롭고 성숙하다. 이해하고 끄덕일 수 있는 일도 늘고 알고 있는 단어도 늘었다. 어제의 실수는 오늘의 가르침이 되고 어제의 성취는 오늘의 힘찬 동력이 된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옳지 못한 일을 해 마음이 괴로워도 잘못을 바로잡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기회도 내일에 있다. () 흘러간 세월을 야속하게 여기는 사람보다 살아온 지난날을 보람되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옷차림은 외부 세계가 나를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는 최초의 단서이다. 단정한 복장은 타인에게 신뢰를 주고, 나를 호의적으로 인식하게 하며, 사기를 증진하고, 분위기를 조성한다. 채용의 여부, 거래의 당락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도 한다. 옷차림에는 그 사람의 개성과 성격, 가치관과 신념, 선호와 비선호, 걸어온 모든 시간이 담겨 있다. 삶에 대한 확고한 주관이 있는 사람은 유행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할 수 있다. () 옷은 내게 말을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추구하며, 무엇이 불편한지. 내가 선택한 옷은 시각화된 나의 내면과 같다.

 

사물을 볼 때 가능성과 잠재력에 제한을 두지 않고 능력치에 정량을 정하지 않자, 해낼 수 있는 일이 무한대로 늘어난다. 사람, 사물, 상황을 보는 시각이 전보다 더 유연해진다. ()모든 상황, 사물, 관계, 절차, 결과, 기회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과 부정, 호와 불호, 흑과 백이 존재한다. 북향집은 해가 잘 들지만, 낮밤 변화가 완만해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안정적인 환경이 될 수 있다. 크기가 작은 핸드폰은 유대성이 뛰어나지만, 화면이 작아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위기가 뒤집히면 성장이 되고, 불안을 열어보면 신중함이 있다. 안정의 한 끗 차이로 권태가 되고, 자유라는 표면 아래에는 도피가 있다. 다양함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다면, 어떤 것도 나를 시련에 빠뜨릴지언정 무너지게 할 수 없다. 한쪽 극단을 이해함과 동시에 또 다른 극단에도 공평하게 눈을 돌릴 수 있다면, 이로운 균형 감각으로 삶을 누구보다 건강하고 유연하게 유지할 수 있다. 요리조리 뜯어 살피니, 집안의 많은 물건이 두세 가지 이상의 쓸모를 가지고 있다. 시선을 달리하고 시간을 들여 차분히 보니, 변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한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지만 멀쩡한 이를 뽑아가면서까지 잇몸으로 살 필요는 없다. 결핍을 옹호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으로 인해 내 삶이 풍요로워졌을 때다. () 뺄셈이 존재하는 이유는 더 나은 덧셈이 자리할 공간을 만들기 위함이다. 미니멀리즘을 단지 비우기 기술로만 치부한다면 나의 삶은 다 비우고 더 극심한 방황을 할 것이다. ‘무엇을 비울까고민한 다음 오래지 않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를 이어 생각해야 한다.

 

'무엇을 비울 것인가'를 고민한 다음 오래지 않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를 이어 생각해야 한다. 뭘 얼마나 더 비우고 덜어갈지 고민한 시간 이상으로 늘어난 빈자리를 무엇으로 어떻게 가치 있고 풍요롭게 채워갈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살아보니 없어 좋은 점 못지않게 있어 좋은 사람. 있어 다행인 물건, 있어 고마운 감정, 있어 마땅했던 갈등과 고민이 많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삶이 있으면 즉 음이 있는 것이지, 헤어짐과 죽음만 있는 삶이란 또 없으니 말이다.

나는 여전히 라디오, 종이책, 신문과 잡지에 그것만의 가치가 있고 역할과 자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 전화로 할 수 있는 대화를 굳이 얼굴 맞대고 나누고 같은 활자이지만 스크린이 아닌 만지고 냄새도 맡을 수 있는 종이로 읽는다. 그림이나 조화보다는 시들어 죽더라도 생화를 곁에 두고 싶어 하고 이어폰으로 들어도 되는 음악을 공연장에 가 라이브로 듣는다. 소비하는 문화 예술의 본질은 그것을 채운 내용물 못지않게 무엇을 담느냐에 달려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문화, 음악, 미술도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와 함께 소비하느냐에 따라 경험의 질이 달라진다.

 

우리가 여전히 보고 듣고 만지고 살을 부딪을 수 있는 독서, 만남, 음악, 꽃을 갈망하는 이유는, 진화한 문명과 기술은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는 추억의 폭이 좁기 때문이다. 기술 문명의 발전이 우리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물리적으로 가벼워지고자 문명의 이기를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지만, 가벼워진 무게만큼 삶은 더 묵직한 것들로 채워지기를 갈망했다. 다용도, 다기능, 경량화, 소형화로 공간은 여유로워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늘어난 공간을 무엇으로 어떻게 유의미하고 가치 있게 채 울지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질문에는 이미 '모든 것을 경량화하려는 기술과 멀어지기'라는 답이 숨어 있었다.

 

원하는 것은 뭐든 척척 얻을 수 있는 삶보다, 간절히 원했다 노력해 얻을 때 삶은 더 소중해진다. 문명의 발전이 기다림, 아쉬움, 간절함에 대한 희생을 전제한다면, 나는 진보의 속도를 거슬러 하나씩 되찾아 올 생각이다. 그 저항력을 제공한 첫 주자가 라디오였다. 밥을 먹고 그릇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작은 음량으로 라디오를 틀어놓는다. 몰입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수시로 팝업창이 떠 성가시게 하지도 않는다. 은은한 배경 정도 위치에 멈춰서, 삶이 제 속도를 유지하고 흘러 갈 수 있도록 관망할 뿐이다.

 

내 삶을 우아하게 하는 많은 것들은 환경이라는 접점을 반드시 공유한다. 환경보호를 실천하는 행동은 나를 돋보이게 하며, 자잘한 경비 유출을 방지하고, 이상적인 스트레스의 감도를 낮춰주며, 미래에 대한 불안도 줄여준다. () 집 안을 둘러보니 이미 나의 일상 대부분은 환경 친화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단지 집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선택을 했을 뿐인데도 공간은 조금씩 에코하우스에 가까워진다.

 

나의 생활양식은 내가 소유한 물건에 의해 종용되고, 그 물건과 더불어 개개인은 다시 스스로를 조각한다. 위대한 인물이 죽은 후에 후손들이 그의 업적을 기릴 수 있도록 적절한 장치가 되어주는 것은 썩지 않고 남은 그 인물의 유품이다. 정약용의 서적과 일지, 편지가 남지 않았다면, 그의 공로와 지혜, 사상과 혁신의 유용한 사료로 활용할 길도 없다.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삶에 자리했던 물건들을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