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이 불안하고 소란한 세상에서)』, 이윤주, 위즈덤하우스, 2021

그루 터기 2022. 3. 9. 05:33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이 불안하고 소란한 세상에서), 이윤주, 위즈덤하우스, 2021

 

저자 소개

이윤주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한 뒤 고등학교에서 국어와 문학을 가르쳤다. 그다음엔 신문기자로 일했다. 교사였을 때 교지를 편집하는 일을 가장 좋아했고 기자였을 때 서평 쓰는 일을 가장 좋아하더니 지금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고 있다. 속상한 일이 생기면 이따 집에 가서 글을 쓰면 돼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를 견디는 시간을 썼다.

 

 

독서 메모

 

내게 가장 소중한 일은 하루하루를 지나친 기대와 미움 없이 살아내는 것이다. 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만만치 않으니 나 힘든 걸 애먼 데 화풀이하지 않고, 최소한의 교양과 상식을 유지하며 나이 드는 것이다. 다가오지 않은 것들을 염려하지 않고 흘러가는 것들에 목매지 않으며. 그렇게 사는 데에 글쓰기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교감과 소통에 대한 갈망이 덜한 게 아니다. 다만 빨리, 한꺼번에 하지 못할 뿐이다. 머뭇거리고 주춤거리기 좋은 틈과 간격 속에서 내성적인 사람들은 더 깊고 단단한 통로를 낸다. 글쓰기도 그렇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따지기 앞서, 글을 적어나가는 과정에서 확보되는 거리가 쓰는 사람을 안심시킨다.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물러섰다가 한 번 더 고민한 뒤에 한 걸음만 나아가도 된다는 사실이 그들의 에너지를 끌어낸다.

 

삶은 성실하게 인간을 시험한다. 네가 버틸 수 있는지, 버틴다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 못 버틴다면 어쩔 것인지. 바이러스가 신체를 위협하듯이. ‘믿는 구석이 있는 인간은 버틸 수 있다. 그게 나한테는 글쓰기였다. 진통제처럼, 소염제처럼, 때로는 백신처럼.

 

인간의 뇌에는 감정을 관장하는 부위와 이성을 관장하는 부위가 따로 있다. 전자가 편도체, 후자가 전 전두엽이다. 슬픔에 빠지면 편도체가 과로한다. 그런데 그 슬픔을 '슬프다'라고 쓰는 순간 편도체가 쉬고 전 전두엽이 일한다. 슬픔의 진창에서 발을 빼고 '슬프다'라는 언어를 가만히 응시할 수 있는 것이다. 슬픔이 언어가 되면 슬픔은 나를 삼키지 못한다. 그 대신 내가 슬픔을 '본다'. 쓰기 전에 슬픔은 나 자신이었지만 쓰고 난 후에는 내게서 분리된다. 손으로 공을 굴리듯, 그것은 내가 가지고 놀 수 있는 무엇이 된다.

 

촘촘하게 연결된 글자들을 들여다보면서, 아이가 겨우 잠든 새벽녘 노트북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비친 여성의 얼굴을 나는 상상했다. 잠 한번 실컷 자는 게 당장의 소원일 그들로 하여금 그 쪽잠을 기꺼이 반납하게 한 에너지를 상상했다. 그것은 적어도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엄마의 힘'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밥벌이의 현장에서 부당한 시스템에 부딪혔을 때, 그리고 그것에 이의를 제기할 능력이 없을 때, 그래서 그 무능이 모멸로 돌아왔을 때, 나는 이따 집에 가서 글을 쓰면 돼라고 생각했다. 이미 세계에 공고하지만 납득하기는 어려운 권위들이 내게 순종을 요구할 때, 그를 따르지 않으면 내가 감내해야 할 고통이 더 많아질 때, 넙죽 고통을 받아 들지 못하는 비겁함이 또다시 모멸로 돌아왔을 때도 이따 집에 가서 글을 쓰면 돼라고 생각했다. 글을 쓴다고 실제로 뭐가 달라지는 건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겪은 일을 언어로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은 희한하게도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것이 구체적인 세계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지 못해도, ‘쓸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내게 구체적인 힘이 되었다. 내 힘을 내가 안다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이따 집에 가서 글을 쓰면 되니까.

 

단일하고 순결한 자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참된 자아란 허상에 불과하며 우리는 상황에 따라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복수의 자아를 연출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그 복수의 자아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가장 간절히 도달하길 열망하는 자아가 있을 수 있다는 게 내게는 중요하다. 수많은 역할 중에서도 어떤 역할이 가장 만족스러운가. 어떤 배역일 때 나는 나의 품위를 유지하기 가장 쉬운가.

 

내가 겪은 일을 언어로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은 희한하게도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것이 구체적인 세계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지 못해도, '쓸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내게 구체적인 힘이 되었다.

 

삶이 너무 지독할 때는 쓸 수가 없다. 하지만 지독하지 않으면 쓸 이유가 없다. 그 중간의 어딘가에 모든 글쓰기가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를 아끼는 어른의 마음은 양가적이다. 아이가 고작 인어공주 보고 우는 것만으로 맘이 부서지는 동시에, 아이가 더욱 더 풍요로운 서사 속에서 생을 누리기 바란다. 아이의 앞날에 되도록 애타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동시에, 아이의 마음이 메마르지 않기를 바란다. 꽃길만 걸었으면 하는 동시에, 타인의 불행을 모른 척하지 않았으면 한다. 염병하지 말고 하나만 해라, 하나만. 내가 나를 다그쳐본다. 양립할 수 없는 일들이라는 걸 안다. 풍요로운 서사를 이해하는 인간이라면 인어의 슬픔에 공명하지 않을 수 없다. 애가 탄다는 건 마음이 메마르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불행을 모른 척하지 않는 인생이 온통 꽃길일 리가 있을까.

 

자기 자신을 거대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꼭 '나는 잘났다'는 식의 높은 자아상에서 비롯되는 건 아니다. 자아상이 높든 낮든 자아 자체는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부풀 수 있다. 이를테면 극단적인 자책감(또는 죄책감)이 그렇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전후 사정 덮어놓고 '내 탓'이라며 머리를 쥐어뜯는 사람이 있다. 나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어. 나 때문에 망쳤어. 이런 태도는 얼핏 대단한 자아와는 거리가 먼 '소심'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라는 존재가 한 사건을, 사람을, 인생의 행과 불행을 좌우했다고 판단한다는 점에서 그 자아는 비대하다.

 

나는 모든 관계에서 내가 어쩌지 못하는 부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돌아보면 그것이 관계를 바로잡기 위한 시작이기도 했다. 나의 부피를 줄여 몸을 가볍게 했을 때, 내 힘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어디까지인지 알 때, 진짜 상대방을 위한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대단하지 않아도 소중한 관계, 내가 당신을 돌보고 당신이 나를 돌봐줄 때 우린 연결되지만, 그 끈은 상대의 존재를 쥐고 흔들 만큼 지배적일 수 없고 지배해서도 안 된다. 주위를 둘러보니, 관계에 크게 허덕이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들의 자아는 자신과 타인의 거리를 왜곡하지 않는 정도의 크기인 듯했다.

 

비대한 자아는 많은 부분에서 삐걱거린다. 왜 저 사람이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닐까. 내가 잘못한 건 아닐까. 하지만 자아의 부피를 조금 줄이고 들여다보면, 사람들은 대체로 나를 '굳이 싫어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나는 대부분의 타인에게 치명적인 존재가 아니다. 세상은 내게 특별한 선의도, 악의도 없다. 그렇다고 삶이 고통스럽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만'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다.

 

자아의 부피를 조금 줄이고 들여다보면, 사람들은 대체로 나를 굳이 싫어할 만큼한가하지 않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나는 대부분의 타인에게 치명적인 존재가 아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나는 대부분의 타인에게 치명적인 존재가 아니다. 세상은 내게 특별한 선의도, 악의도 없다. 그렇다고 삶이 고통스럽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만'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다.

 

자아가 없는 글은 글이 아니다. 하지만 비만한 자아에 깔린 글은 (쓸 때나 읽을 때나) 부끄럽다. 그런 글을 자위행위에 비유하곤 하는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쁜 건 아니지만 남들 앞에서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에세이는 저자가 매우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장르다. 자기 이야기를 자기 입으로 해야 할 때 성숙한 인간은 '나는 나와 얼마나 가까운가.'를 고민한다. 너무 가까우면 나는 나를 과장한다. 과장은 연민을 부르고, 연민에는 중독성이 있다. 자기 연민에 중독된 사람의 이야기는 유익하지도 않지만 무엇보다 지루하다. 그렇다고 자신과의 거리가 너무 멀면 고유성이 사라진다. 내가 내 입으로 나의 이야기를 해야 할 근본적인 이유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에세이를 쓰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밀당을 멈출 수 없고, 자신과의 밀당은 결과적으로 타인과의 거리, 세계와의 거리를 설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고유한 나''이 넓은 세계'의 어디쯤에 둘 것인지의 문제다. 나는 나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동시에 이 세상에서 그 고통이 놓일 위치를 치열하게 성찰해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전자만 알고 후자를 모르면 남의 장례식장에 가서 상주에게 자식의 입시 고민을 늘어놓게 된다. 이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글쓰기가 정말 두려워진다. 두려워서 안 쓰고 싶다. 아니, 솔직히 쓰긴 쓰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이 먼저라 차라리 두려움을 모르고 싶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니까, 충분히 그리고 영원히 두려워하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어떤 인간이 드물게 용맹한 덕에 자신의 코어를 향해 돌진한다고 해서, 그 글쓰기가 모두 <헝거>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나밖에 모르는 나의 고통을, 세상에서 내 고통이 으뜸이라는 술주정이 되지 않게 하면서도, 세상에 굳이 전달해야 하는 이유를 예리하게 찾아내야 한다. 고통받되 고통에 잡아먹히지 않고 고통을 바라보는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니까 <헝거> 같은 에세이는 평생 자신과 지겹도록 싸워온 '인간'인 동시에 그런 자신과의 거리 확보에 성공한 '작가'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이다. 성숙한 인간이면서 숙련된 작가이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헝거>를 마난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록산 게이를 열렬히 사랑한다. 내가 내 몸에 가두어진 존재임을 절감하는 순간에, 그것이 내게 상처를 입히고 흉터를 남기는 모든 순간에 펼쳐 볼 <헝거>가 내게 있고, 그걸 쓴 록산 게이가 세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느 정도 힘이 날 만큼 사랑한다. 내가 비록 아직은 남의 장례식장에서 상주에게 자식의 입시 고민을 늘어놓는 인간이면서 술주정과 다름없는 글이나 끼적이는 작가라 해도, 이 책을 만난 이상 내 흉터를 붙들고 영원히 울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박완서 선생이 소설가로 한창 활동하던 때 대학을 갓 졸업한 아들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알려져 있다. 헤아려보니 내가 선생을 처음 알게 된 게 90년대 후반이니 선생이 그 참혹한 일을 겪은 지 10년쯤 뒤다. ‘참척이란 단어를 그때 처음 알았다. 선생이 참척을 당하고 모든 작품 활동을 중단한 채 홀로 토해낸일기가 발표됐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처럼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일 또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중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누군가 나를 싫어하는 데는 그만의 이유가 있다.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설령 어찌할 수 있다 해도, 어찌하는데 사용할 에너지나 마음이 내게 없다면, 또다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글을 쓰고 나면 많은 의견을 듣는다. 쉽다, 어렵다, 친절하다, 복잡하다, 가볍다, 무겁다, 따뜻하다, 불편하다……. 쉽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저급한가. 고심하고, 어렵다는 말을 들으면 너무 현학적인가 고심한다. 따뜻하다고 하면 너무 감상적인가 싶고, 불편하다고 하면 너무 독단적인가 싶다. 그런 평가들을 쫓아다니며 읽는 사람의 선호에 맞추려 하다 보면 결국 쌀로 밥 짓는 소리를 하게 된다. 아무에게도 미움 받지는 않겠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닌 소리. 글을 쓰다 한 번씩 두려워질 때마다 나는 외운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글은 결국 누구에게도 필요 없는 글이다.’

 

강형욱 훈련사는 한 인터뷰에서 강아지 훈련사라고 속이고 가서 사람을 교육하는것이라고 말했다. 오은영 박사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진단하는 도이에 부모를 진단하고 아이를 훈육하는 동시에 부모의 행동을 바로 잡는다. 애든 개든, 문제는 관계.

 

다시 말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는' 누군가의 개입으로 어떤 불행의 크기는 줄어들고 있다. 강형욱 훈련사는 훈련의 과정 자체를 고통스러워하는 보호자에게 지금 견디지 않으면 나중에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오은영 박사 또한 고통스러워하는 보호자에게 지금 이 아이와 싸워 이기자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으로 만들자는 것이라고 말한다.(중략) 글도 그렇다. 나는 글을 쓰며 수시로 내게 개입한다. 글을 통해 세상에 개입한다. 그렇게 매일 '고쳐질 가능성'을 타진한다. 포기하지 않고.

 

나보다 많이 알고 많이 겪고 많이 써본 사람은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더 많이 알고 겪고 써도 두 개의 프리즘을 가질 수는 없다. 이 불편하고 부당한 세상에서 그것은 드물게 공정한 일이다. 공정하다면, 운동화 끈을 고쳐 묶지 못할 것도 없다

 

왜 내가 불특정한 타인들에게 내 말을 좀 들어보라고 해야 하는가. 왜 저 무수히 훌륭한 책들 사이에 (그보다 못할 것이 뻔한) 나의 책을 추가해야 하는가. 저자들로부터 그런 고뇌와 두려움을 직접 듣는다. 세상에 ○○○ 같은 작가가 있는데 왜 제가 굳이 보태야 할까요. 나는 대답한다.

○○○는 자기 인생만 살아봤지, 작가님의 인생은 안 살아봤잖아요.”

 

모든 인간이, 한평생을 지지고 볶아도 결국 제 인생 하나 살다 간다는 사실이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많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아니면 안 될 일'들이 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도 없다는 말도 맞지만 태양 아래 ''는 나 하나라는 것도 맞다. 모든 글은 쓴 사람의 몸(마음)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한 태양빛이다... 나보다 많이 알고 많이 겪고 많이 써본 사람은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더 많이 알고 겪고 써도 두 개의 프리즘을 가질 수는 없다. 이 불편하고 부당한 세상에서 그것은 드물게 공정한 일이다. 공정하다면, 운동화 끈을 고쳐 묶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실패는 다르다. 실패는 그 자체보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마음'이 나를 단련시키기 때문이다. '작은' 실패가 중요한 건 그 때문이다. 너무 한 방에 때려눕히는 실패 말고, 몇 번쯤 겪어도 스리슬쩍 넘어갈 수 있는 실패. 몇 번 반복해도 그렇게 막 난리가 나지는 않는구나, 하는 안도감을 주는 작은 실패들. 그 경험이 훨씬 소중하고 장기적으로 쓸모가 크다.

 

스스로 무용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때는 '큰 성공'보다 '작은 실패'가 도움이 된다. 몇 번 반복해도 그렇게 막 난리가 나지는 않는구나, 하는 작은 실패들. 그 경험이 훨씬 소중하고 장기적으로 쓸모가 크다.

 

흔히 책을 읽는 것도 소통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현실 소통'에 쉽게 피로를 느끼는 사람들이라는 점은 그래서 재밌다. 행간을 잘못 읽어도 책은 잠적하거나 꾸짖지 않으니까. 내 멋대로 해석하고 오해해도 내게 피해가 돌아오진 않으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니까. 듣고 싶을 때 양껏 듣고, 듣기 싫을 때는 치워버려도 되니까. 책이 건네는 말들에 대하여 내가 어떤 개소리로 응대해도 내 밥줄이 끊기지는 않으니까.

 

어떤 인간이든 지나치게 외로운 처지에 빠지지 않을 권리가 있고 그것이 인권의 다른 말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누구에게나 닿을사람이 필요하고, 닿고자 하는 의지와 닿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차단된 환경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오늘도 나에겐 밤이 있지, 심지어 밥은 내일 있어, 라고 생각할 대의 은밀한 희열이 있다. 밤에 읽는 책은 낮에 읽는 책보다 명료하다. 밤에 듣는 음악은 낮에 듣는 음악보다 우아하다. 밤에 하는 생각은 낮에 하는 생각보다 반자본적이다.

 

늦은 아침에 눈을 뜨면, 그 시간에 눈을 떠도 된다는 사실 자체에 쾌감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묘한 불안이 찾아들기도 한다. 지금 이 시간 수많은 전화와 메일에 동시다발로 회신하는 사람들, 보채는 아이를 먹이고 입히는 사람들, 경작하는 사람들, 모여서 언쟁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외로움 섞인 열패감이 간질간질 올라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밤은 다르다. 밤의 나는 작은 승리자다. 이 승리는 누구도 패배시키지 않는데, 나는 누구보다 위엄을 찾는다. 느리지만 담대하고, 섬세하지만 호기롭고, 고독하지만 오롯하다. 낮에 나를 짓눌렀던 과제들이 기묘하게 어떤 말미를 받는 느낌도 든다. 나는 말미를 받은 상태에서 일하며 마음이 한갓져서 효율이 오르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고독을 방어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인다. 아니,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미니멀로 사느냐, 맥시멀로 사느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죽을 때까지 오늘은 이 끈, 내일은 저 끈, 돌아가며 만지작거리더라도, 외롭다고 해서 아무 끈이나 동여매 질식하는 일이 없는 것이 좋겠다.

 

그 자체로 누군가의입이 되고, 또 누군가의 입을 열게 하는 일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으며 그중에는 내가 없다는 걸 받아 들여야 했다. 내가 쓰고 싶은, 아니 쓸 수 있는 글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야 했다. 압도당해도 괜찮고, 현실을 비틀거나 때론 부시해도 되며, 은유와 상징이 팩트를 넘어서는 글로 나는 돌아가고 싶었다. 그것은 아마도 문학이었다.

 

여전히 글은 편하고, 말은 편하지 않다. 과거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단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 많다. 말은 매번 마음을 따라잡지 못하는 느낌이다. 내가 전하고 싶은 수많은 마음은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혼탁하거나 납작해진다. 올 들어, 태어나 가장 힘든 일을 겪고 있는 한 친구에게 계절이 몇 번 바뀌는 동안 내가 해준 말이라고는 "계속 기도할게"뿐이었다. 단 한순간도 진심 아니었던 적 없지만, 할 때마다 무력해지던 말.

 

몇 번이고, 그에게 말이 아닌 글을 쓰고 싶었다. 내 마음에 꾹꾹 쌓여 있는 공감과 응원의 소리를. 하지만 쓰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쓰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삶의 어떤 부분은 글 '따위'가 부연할 수 없다는 걸, 이제 조금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말이 마음을 따라잡지 못할 때가 있다면 글은 마음을 윤색할 때가 있다. 윤색이 나쁜 게 아니라도, 어쨌든 그게 '마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