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집』, 이린, 책과나무, 2018
작가님의 이메일에서 반가운 콜사인을 만났다. 저와 마찬가지로 아마추어 무선사의 콜사인을 ID로 사용하고 계셨다. 그렇다고 이메일 주소를 보고 빌려온 건 아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자세히 보다보니 알게 되었다. 참 반가운 이메일 주소다.
도서관 서가에서 이 책을 선택할 때는 수필문학 등단작가라는 작가의 소개에 선 듯 가방에 넣었다. 역시 등단이라는 단어가 실망시키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책이다.
그런데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하니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가 더디다. 주옥같은 글들이 많으나 조금은 무게감이 느껴져서 쉬이 읽혀지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라 내 스스로를 반성하면 읽어야 하는 책이라 점점 속도가 떨어진다. 비슷한 연배(나보다 약간 많은 듯한)의 작가님의 생각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참 많다.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사소한 일에도 다시 생각해보니 나름의 의미가 생생하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는 작가의 마음을 나도 느끼고 있다. 가을을 지나 겨울로 향하는 인생의 공통된 생각들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저자 소개
이린
본명 김미숙, 수필문학 등단, 한국문인협회회원, 충남문인협회회원, 논산문인협회회원, 수필예술동인, 충남예술문화상 수상, 충남문학발전대상 수상
저서: 『홀로 부르는 사랑노래』, 『말 많은 여자의 성찰』, 『마음의 뜨개질』, 시집 『가슴에 이는 바람』
hl3aqh@hanmail.net
독서 메모
가장 장수한 사람이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가장 뜻깊은 인생을 체험한 사람이다. - 루소
단 일회성 삶을 사는, 두 번 다시 살아 볼 수 없는 삶을 사는 인간에게 가장 뜻 깊은 삶이란 어떤 것일까? 하고 많은 생물 중에 미물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답게 가치 있게 살다 가는 지혜를 찾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화두인 것 같다.
돈의 액수에 따라 장소의 좋고 나쁨이 결정되는 대만에서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내고 표지를 마련하기도 한다. 십여 년 전 홍콩에 배낭여행을 갔다가 잘 꾸며진 공원인 줄 알고 들어가 본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고 예쁜 꽃들로 장식된 화려한 묘지공원엔 에스컬레이터까지 설치돼 있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옛사람들보다 늘어난 여명을 사는 시대가 됐다. 윤동주 시인이 원했던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기는 어렵겠지만, 노력한다면 죽는 날까지 존재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삶을 살기는 가능하지 않을까? 노력하고 노력할 것이다.
ㅂ선생이야말로 청춘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청춘은 나이로 따져지지 않는다. 끓는 용암보다 뜨거운 열정과 굳센 강철 같은 의지를 갖고 있는 한 그는 청춘이다. 늙는다고 슬퍼하고 세월이 가는 걸 한탄하며 어른으로서 받들어 모심만 원하는 이야말로 노인이고 늙은이인 것이다. 늙음이란 살아온 시간의 길이에 의한 게 아니라, 이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늦었다고 느끼는 순간부터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부터이다.
언젠가 나는 죽을 것이고 내개 속해 있던 모든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흔적, 사실 나는 내가 사라진 후에 남겨질 흔적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흔적을 남기고 싶거나 흔적에 대한 집착도 없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그저 내가 존재하는 동안 나대로의 존재감에 충실하려는 것뿐이다. 다만 어떤 형태로든 조금이라도 남겨질 흔적이 있다면 흉하거나 추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분노나 섭섭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반대로 당장의 분노나 섭섭함을 뛰어넘어서 상황에 대한 이해와 함께 상대의 기분이나 감정을 먼저 생각해 준다거나 자신의 분노나 감정을 눌러 참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닐 거다. 조금만 참고 생각해 보면 기왕에 지나간 일들에 대한 분노나 서운함을 상대에게 표출함으로써 빚어지는 문제는 어쩌면 백해무익한 것이 될 수도 있으니, 차라리 묻어 두고 좋은 얼굴로 상대를 대한다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이어질 인간관계에도 도움이 되리란 생각을 한다. 인간관계란 것이 칼로 무 자르듯 당신 같은 인간하고는 절대로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고 절교를 선언해 버리고 싶은 때도 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계속 관계를 이어 가다 보면 더러는 전화위복처럼 더 좋은 관계로 발전되기도 하니 말이다.
어느 책에서 본 글에 사람이 뭔가를 상대로 열심히 싸운다는 것은 그 상대에게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란다.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싸우면 싸울수록 상대방과 더 얽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하게 얽힌 실타래는 막무가내로 잡아당기기보다는 살살 달래 가면서 조심스럽게 풀다 보면 어느 순간 쉽게 풀리기도 한다는 걸 차마 어쩌지 못한 마음을 가진 이는 알고 있다.
호칭은 귀한 것이다. 호칭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하나의 호칭이 만들어질 때는 그 호칭에 맞는 의미와 가치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붙여진 호칭의 의미를 알고 그에 걸 맞는 도리와 처신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우리가 사는 사회도 한결 격이 높고 살기 좋은 사회가 될 것이다.
우리 뇌에는 자신아 알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는 특성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문제에 대하여 말을 해도 자신이 원하는 것만 받아들인다는 거다. 지식을 취할 때도 그렇겠지만,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상대가 원하는 거나 고쳐 주기를 바라는 얘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만 받아들이고 기억한다는 거다.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는 삶의 나날들에서 문득 바퀴살 하나가 부러진 듯 마음이 허허로운 날 마주 앉아 나누는 차 한 잔만으로도 위로가 되 ㄹ수 있는 마음의 거리가 가까운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또한 그에게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참 많은 날들을 여자는 자신의 원칙을 지켜 주지 않는 남자를 원망하며 힘들어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남자가 때때로 들고 들어오는 습득물과 심심하면 만들어 내는 그의 피조물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아니, 언젠가부터 여자 스스로도 어질러진 잡동사니들과 함께하는 게 거슬리지가 않고 편한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길들여진다는 말을 여자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여자는 집에 대한 생각도 바꿨다.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건 자신이 원하는 것만이 아닌 상대가 원하는 것과의 타협과 조화가 중요하며, 좋은 집이란 크고 멋있게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안과 안정을 주는 곳이라야 된다고 말이다. 그런데도 여자는 여전히 길을 가다가 나지막한 울타리에 빨간 넝쿨장미가 열리고 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핀 꽃밭과 넓은 유리창을 가진 깨끗하고 예쁘게 잘 꾸며진 단독주택을 보면 멈춰 서서 한참씩 들여다보곤 한다.
매주 한 번씩 나는 꿈을 꾼다. 복권 당첨번호가 발표되는 토요일 하루 일을 마치고 온 집안이 조용해지는 늦은 밤이 되면 나는 홀로 지갑을 연다. 화려하고도 황홀한 꿈이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심장의 펌프질도 조금 빨라지는 걸 느끼며 고이 간직했던 복권을 꺼내어 번호를 맞춰보기 시작한다. 혹시나 하던 기대가 역시나 무너져 버리는, 불과 5분도 안 되어 깨져 버리는 허망한 꿈이지만.
내가 옳고 당신은 틀렸다고 판단을 하기 이전에 상대의 느낌과 감정에 공감하고 이해해 줄 줄 아는 마음이 정말 중요하다. 그 사람도 나도 제각기 다른 환경과 풍습 속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서로 다른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할 줄 알아야 된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아무런 불편 없이 말하고 소리 지르고 노래할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복인지 몰랐다. 이런저런 이유로 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전혀 몰랐었다. 돈 많은 사람들이 누리는 물질적인 풍요에 대한 부러움이나 질투는 할 줄 알면서 내가 몸으로 하고 싶은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 주저 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뿌리가 튼튼하지 못한 식물이 병이 쉽게 들고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도 정신이라는 뿌리가 튼튼하지 못하면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이가 아무리 높은 학력이나 많은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바르고 건강한 정신이 뒷받침 되어야만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두 번 다시 안전 불감증으로 인한 가슴 아픈 사고가 일어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미안하고 부끄럽고 어리석은 어른들이 개과천선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된다. 그리하여 하루빨리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우리나라 좋은 나라, 안전한 나라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너무나 어른스러운 아이의 배려에 나는 과연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의 마음에 그런 배려를 해 본적이 있는지 스스로 자문을 하게 됐다. 그리고 문득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타인의 마음이나 감정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이 자신의 기분, 자신의 욕망밖에 생각하지 않은 모자라는 어른들이 넘쳐나는 세상이 됐다. 자신의 욕망에 대한 절제와 겸손, 이웃에 대한 배려는 이제 옛 시절의 낡은 덕목이 되고 말았다.
'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 > 독서 메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자의 글씨』, 구본진, 다실북스, 2021 (0) | 2022.04.23 |
---|---|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이영, 청년정신, 2009 (0) | 2022.04.22 |
『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 김비, 박조건형, 한겨레출판사, 2020 (0) | 2022.04.20 |
『새발로 하는 산책』, 문소리외, 마음산책, 2021 (0) | 2022.04.19 |
『굿나잇』, 박근호, 히읏, 2022 (0) | 2022.04.18 |